오래된 음악처럼 / 강 대 식
오래된 레코드판이 벽면을 가득 채운 찻집에 들어서니, 30년 전 유행하던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가 흘러나온다. 이 노래가 유행할 당시엔 조용필씨도 앳된 모습이었고 우리 또한 청춘이었는데, 오늘 반백머리의 사람들이 모여 음악을 듣고 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애절한 목소리와 멜로디가 중년 남성들의 가슴을 풀어지게 한다.
창가엔 꼬마 전등불들이 꿈을 꾸듯 주렁주렁 줄지어 매달려있다. 가끔씩 전구들이 리듬을 타고 불비를 쏟듯 흘러내리고, 우리들 가슴엔 추억이 흐르고 음악도 그렇게 흐른다. 저만치 어둠에 잠긴 무심천이 보인다. 그곳엔 바람 안고 서걱거리는 겨울갈대들이 천변을 가득 메우고 일렁이겠지. 피곤에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는 오래된 음악이 있고, 함께한 좋은 사람들이 있고, 그윽한 향을 풍기는 따뜻한 차가 있으니 더 이상의 무엇도 필요치 않다.
‘다방(茶房)’이란 말이 정답게 다가온다. 차가 있는 방 다방이, 요즘에는 우리정서에 낯선 음악과 함께 영어간판을 달고 두 집 건너 하나 꼴로 문을 연다. 나는 얼마 전 오래된 음악과 차가 있는 이곳을 발견한 뒤 자주 찾고 있다. 이곳을 찾는 이유 중 하나가 추억의 레코드판 음악을 들려주기 때문이다. 벽면을 가득 채운,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있는 레코드판들이 소중하다. 이곳에 오면 지나간 추억들이 저절로 떠올라 퍼즐을 맞추듯 하여 과거로의 여행을 가곤 하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없이 앉아 있게 된다.
1980년 초에는 음악다방이 대세였다. 다방마다 DJ를 두고 손님 취향에 맞는 음악을 들려주었고, 연인들 데이트장소도 단연 음악다방이었다. 오래된 음악만큼이나 오래된 추억 한 조각이 떠오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 무렵 잠시 상경해서 있을 때였다. 그때는 커피 맛을 몰랐었다. 그처럼 인생도 쓸 수도 있다는 것 또한 모를 때였다. 커피 맛도 모르면서 우리는 청량리로터리에 있는 한 음악다방을 아지트로 삼고 자주 갔었다. 다방에 들어가면 제일먼저 메모지를 한 움큼 집어 들고 구석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제트기가 그렇게 빠를까. 앉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쏜살같이 달려온 아가씨가 물 잔을 탁 내려놓곤 턱을 까닥인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무엇을 마실 건지 빨리 말하라는 제스처인 것을. “커피 두잔요.” 우리의 주문은 늘 간단했다.
주문을 받고 아가씨가 사라지면 메모지에 신청곡을 끄적거린다. 나는 당시 유행하던 이글스(Eagles)의 ‘호텔 캘리포니아(Hotel California)’를 적었다. 노래 가사 내용은, 어두운 사막 고속도로에서 마리화나를 피운 여행객이 시야가 흐려지고 머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하여, 찾아간 호텔에서 흐릿한 환상 속을 헤매며 상상의 나래를 펴는 이야기다. 위험한 향정신성으로 금기 되어 있는 상태를 노래한 것을 즐겨 듣다니…. 그러나 당시엔 노래에 담긴 뜻 같은 건 관심 없었다. 단지 강한 비트음악형식의 리듬이 기타소리와 함께 빠른 템포로 이어졌는데, 가슴을 쿵쿵 울리는 멜로디와 리듬감이 좋아 그냥 빠져 있었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아마 담배 한 개비 피울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하지 싶다. 커피를 가져온 아가씨는 커피를 테이블에 놓고 사라진다. 커피 물은 채우다 만 것처럼 겨우 반잔 정도이다. 손님을 살갑게 대하거나 반기는 기색은 없다. 정해진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기계라고나 할까. 북적이는 손님들이 자신을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쯤으로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노래제목을 적은 메모지를 DJ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 잔에 설탕 두 스푼에 프림 두 스푼을 넣는다. 신기하게도 까만 커피가 마법처럼 하얀 줄무늬를 그리며 갈색으로 변해갔다. 달달한 맛에 쓴 맛이 풍기는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넣고 눈을 감고 듣는 음악소리가 마치 나를 천상으로 인도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했다. 수십 명의 말소리가 뒤섞여 시끄러운 공간이었음에도 내가 신청했던 노랫소리는 어찌 그리 잘도 들리던지, 다른 잡음과 석이지 않고 내 귓속을 파고들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대학을 청주로 오면서 즐겨 찾는 단골 음악다방이 바뀌었다. 위치는 학교 맞은 편 뒷길에 있는 건물 2층에 있었는데 그 다방엔 늘 손님이 뜸했다. 손님이 없는 곳이라서 나로선 오히려 좋았다. 혼자 음악을 듣거나 공부를 하기에 적당했기 때문이다. 나야 편하고 좋았지만 주인 입장에서는 속상했을 것이다. 어느 날 가보니 DJ가 그만 두었는지 뮤직 박스 안에 사람은 없고 LP판만이 벽면을 가득채운 채 있었다. 손님이 점차 줄어들자 DJ도 내보내고 급기야 폐업할 지경에 이르게 됐던 것이다.
어느 날 저녁, 다방주인이 보자고 하여 찾아갔다. 이제 가게를 폐업해야 한다면서 필요하면 LP판을 모두 주겠으니 가져가라고 말을 하는 거다. 한두 장이 아니라 수천 장은 될 것 같은 그 많은 LP판을 모두 가져가라니, 순간적으로 욕심이 났지만 가져간들 가난한 하숙생이었던 나로선 보관할 곳이 없었다. 하여 고맙지만 보관할 곳이 없다고 정중히 사양하고 내가 즐겨 듣던 것으로 30여장만 골랐다.
그때 나는 보았다. 다방주인의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더니 주룩 흘러내리는 것을…. 젊은 여성이 어렵게 번 돈을 투자하여 문을 연 음악다방을 폐업하려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는가. 타향에서 누군가의 작은 도움도 큰 은혜로 느껴졌던 시절이었는데 돌아보니 나는 뻔뻔한 사람이었다. 커피 한잔 값을 지불하고 죽치고 앉아 공간을 사용했었다. 나에게는 편안한 안식처요 고향동네 누나 같았던 분이었는데, 무엇 하나 도와줄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고개 숙여 작별인사만 했던 당시 내 처지는 뒤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다. 하지만 힘겨웠던 내 청춘에 추억의 한 페이지를 만들던 시절이었다.
‘철이 없어 그땐 몰랐어요. 그 눈길이 무얼 말하는지….’ 이은하의 겨울 장미가 애절하게 흘러나온다. 음악은 어쩌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대변해 줄까. 어려운 사람을 보아도 도움의 손길을 주지 못하던 당시 나의 처지를 말하는 것 같아 가슴이 시려온다. 그 누나는 어디서 어떻게 나이 들어가고 있을까. 한번쯤 만나보고 싶다.
며칠째 계속되는 한파 속에서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이 따뜻한 차 한 잔에 천천히 녹아든다. 반달은 차가운 나뭇가지에 걸려 하얗게 웃고, 가로등불빛 사이로 나풀대며 눈송이가 춤을 춘다. 겨울밤이 음악 속으로 오는 건가. 음악이 겨울밤 속으로 가는 건가. 오래된 음악에 취해 사람에 취해 우린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며 그렇게 오래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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