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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 수필 ㅡ 화 화 화 외 8편

장대명화 2026. 1. 29. 04:31

                         화 화 화 / 이 은 희

 

화化, 옷이 벗겨지는 찰나이다. 바람에 반쯤 떨어진 껍질이 툭 떨어진다. 붉은 나상이 적나라하다. 바람결에 하늘거리는 꽃 한 줄기, 감탄이 신음처럼 배어나온다. 방금 전까지도 잔털로 무장한 껍질 안에서 잔뜩 움츠렸던 꽃봉오리, 이제 갑옷을 벗고 고운 꽃잎을 화르르 펼치리라. 껍질을 벗는 모습은 언제나 볼 수 없다. 식물도 자존심이 있어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고 상대가 누구인가를 따지리라. 개으른 사람보단 부지런한 사람, 세상일이 내 마음 같지 않아 불면증에 시달린 자, 대낮보단 사랑하는 자에게 민낯을 보여주리라.

  묘시에 깨어 있어야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개양귀비가 하나둘 털북숭이 옷을 벗더니 오월의 정원을 붉게 수놓는다. 절정에 다다른 꽃송이가 피고지며, 정원 구석구석에 붉을 화끈하게 지르리라. 사람들은 꽃 한 송이를 두고 ‘요염하다’ ‘단아하다’ 한마디로 쥑인다며 온갖 상찬에 침이 마른다. 식물은 말이 없는데 인간만 무시로 흔들리는지도 모른다.

 

  화火, 활활 타오르는 불꽃, 그리스 신전 성화를 닮았던가, 사진의 배경은 짙푸른 하늘, 새빨간 개양귀비, 드넓은 하늘을 붉은 꽃송이가 떠받치는 형상이다. 마치 하늘에 투영된 깃발 같기도 하고, 날것의 붉은 심장도 같다. 사람들은 나에게 열정이 넘친다고 말한다. 좋아 하는 일 앞에선 물 불 안 가리고, 지칠 줄 모르는 나의 심장, 그 심장도 신열이 올라 저렇게 빨갛지 않을까 싶다. 아니, 어찌 좋아 하는 일 앞에서만 신열을 앓겠는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 앞에서 끙끙거리다 심장에 종종 불꽃이 일어난다. 그 불꽃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아 몸속 구석구석에 반점처럼 부어올라 처방약을 달고 산다. 화로 달라진 심장을 서서히 잠재우는 대상은 역시 꽃이다.

  일년초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심는 식물이다. 특히 개양귀비는 모종이 어려운 품종이라 꽃씨를 가능한 여러 곳에 넉넉히 뿌려 새싹을 솎아내는 것이 낫다. 꽃이 피고지고 열매를 맺으면, 장마가 오기 전에 부지런히 씨앗을 거둬야만 한다. 개양귀비와 끈끈이대나물 꽃씨는 마치 연필로 꼭 찍은 점처럼 씨앗이 작디작다. 볕에 바짝 마른 씨방은 빗살이 살짝 건들기만 해도 씨앗은 와르르 쏱아지기 때문이다.

  지인은 번거로운 일을 왜 자초하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나도 나에게 묻는다. 내 안에 체증인 불 화를 꽃 화로다 다스린다는 응답이다. 일상에서 맞닥뜨린 상심에 솟은 화를 자분자분 잠재우는 화, 내가 전념하는 일은 직장생활과 글쓰기에 덤으로 식물 가꾸기와 그 식물을 지인에게 공유하기다. 처음에는 소소한 정원 가꾸기 정도였는데, 식물이 백여 가지로 늘어나니 할 일이 정도를 넘는다. 주말의 하루는 육신을 혹사시켜야만 일이 끝난다.

  못된 근성이 발동한 탓이다. 골몰무가汨沒無價 일에 빠져 몸을 사리지 않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그럴 땐 일을 저지하는 곁님이 필요하다. 그의 손애 이끌려 방으로 들어오면, 침대에 시체처럼 허릅숭이처럼 삭신이 쑤신다고 구시렁댄다. 그것도 잠시 꽃이 보이면 다시 방문턱을 넘는다. 방금 전에 행위를 잊고 꽃에 미친 듯 즐거워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진풍경이리라. 피로감도 피로 나름, 즐거움에서 오는 피로를 그 누가 알랴. 즐거운 노동을 버리지 못하는 화살, 꽃化을 떠나선 살 수 없는 존재이다.

 

  화和, 짙푸른 우암산을 병풍삼아 들여놓고 붉은 개양귀비를 즐긴다. 하늘정원은 구속이 없는 절대 자유의 시공간, 장자의 소요유逍遙遊가 따로 없다. 정원에서 유유자적도 사나흘, 꽃의 재잘거림과 식물의 묘한 생태를 혼자 보기가 아쉽다. 급기야 수백 명이 어울리는 SNS에 식물을 올려 자랑한다. 태평양처럼 넓은 오지랖을 어쩌면 좋으랴. 꽃의 향기는 백 리를 가고, 사람의 향기는 만 리를 간다고 했던가. 씨앗을 뿌려 피어난 꽃을 이웃과 무시로 나눈다. 울산의 카친에게도 꽃씨를 주었더니 그곳에서도 하늘정원 새싹이 돋는다. 내가 나눈 꽃은 그냥 꽃이 아니다. 생화학 유기적 반응에서 일어난 엔도르핀을 사방으로 마구 정화하는 중독성 강한 식물이다.

  노을빛 동살을 배경으로 더덕 줄기를 사진에 담는다. 위로 타고 오르는 본능의 더덕줄기가 마치 외다리의 새처럼 보인다. 문인이 쓴 끌 속의 ‘외다리 성자’가 바람개비 등 ‘뭐뭐’ 같다는 댓글이 오른다. 식물 줄기 사진 한 장에 각자 사유가 깊어지는 시간이다. 더불어 즐거운 대화가 이어지고, 침묵하던 지인의 이야기도 바라본다.

  이웃과 마음을 나누는 일은 더없는 기쁨이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은 향기로운 조화를 낳는다. 꽃化 덕분에 마음에 맞는 분들과 살뜰한 정을 나누는 기회를 만든다. 마음속 불(화火)의 화신의 아드레날린은 자연이 만든 산신의 꽃化으로 잠재우고, 그 꽃을 SNS에 공유하니 세상과 조화(和)롭다. 억지로라도 웃으면 엔도르핀이 돈다고 했던가.

  ‘하하하’와 비스름한 ‘화화화’를 읊조려본다. 주위를 돌아봐도 행복은 물질의 소유가 전부는 아니다. 나의 소소한 행복은 좋아하는 풀꽃과 마주하며 식물을 정성껏 키워 이웃과 즐거움을 나누는 일. 꽃에서 삶의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오늘도 일상에서 지친 심신을 화化를 가꾸며 다스리고 몸속 세포의 긴장을 눅잦힌다. 눈앞에 꽃의 세계, 네가 만든 소소한 천국이다.

 

 

                         바람의 제물/ 이 은 희

 

회오리바람이 집을 에워싸는 듯하다. 강도 높은 바람 소리에 잠 못 이루는 밤이다. 내가 머무는 공간은 사계절 바람이 부는 바람골. 가는바람에서 된바람까지 바람의 종류를 셀 수가 없다. 더위가 여러 날 지속하더니 태풍을 부른 것인가. 태풍은 고온에서 일어난다고 하는데, 기상에 관하여 깊이 알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바람의 제물이 될 나의 소중한 식물들을 단속하는 일이 중요하다. 아파트 복층에 머물며 겪은 산 경험으로 바람을 맞을 채비를 서둘러야만 한다.

 

나뭇잎은 나무의 소중한 일부분이다. 인간은 그저 봄바람에 현란할 정도로 눈부신 이파리의 몸짓과 오색으로 물든 고운 단풍잎을 기억한다. 살아보니 바람의 몸짓이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하늘이 노한 것처럼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고 강한 번개와 태풍을 몰고 오면, 나무는 단호히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험한 날씨를 견뎌내고자 작은 제물로 자신의 일부분을 내주어야 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강풍은 가혹하게 나무둥치를 부러뜨릴지도 모른다. 지난해 태풍 링링이 하늘정원에 남긴 처참한 광경이 떠오른다.

 

묘시에 참혹한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이다. 수십 그루의 해바라기의 꽃송이가 보이지 않는다. 마치 동백꽃이 스러지듯 꽃의 목이 잘려 바닥에 나뭇잎과 함께 잔해로 뒹군다. 어찌 그뿐인가. 바닥에는 수국과 가침박달나무의 생생한 이파리와 줄기가 너저분하다. 인정사정없는 가혹한 처사다. 꽃들이 보기 좋은 시절에 꽃밭을 초토화해 버린 것이다. 실망감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동백꽃은 나무 발치에 꽃을 떨어트려 보기라도 좋지, 해바라기의 꽃송이는 어디론가 날아가 헤매는지 모른다. 날바닥에 추레한 꽃송이만 서너 개 나뒹굴고 있다. 간밤의 바람 소리에 스산한 광경을 예감했어야 했다. 정원에 상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한동안 나가기가 꺼려진다.

 

해바라기는 여름내 불볕을 먹고 자라는 식물이다. 무더위 속에서도 물만 주면, 불평 없이 키를 장대 같이 키우고 꽃을 환하게 피운다. 꽃대가 멀대 같이 큰 것이 꼭 나를 닮은 것 같아 해마다 씨앗을 심는다. 해바라기는 무엇보다 해를 바라기 하는 일편단심의 순수와 노랗게 활짝 핀 꽃의 표정이 밝아 기분이 좋아진다. 하늘정원을 꾸린 장소가 24층 옥상층이라 그런가. 하늘이 가까워서 그런지 새벽과 저녁 무렵에 물을 주지 않으면 식물들이 더위를 견디지 못한다. 여름휴가도 식물들 걱정에 멀리 가지 못하고 당일치기로 다녀올 정도이다. 그렇게 애지중지한 꽃과 나무가 싹쓸바람에 상처 입고 흩어지니 그 상심을 어찌 말로 다 하랴.

 

해바라기가 바람의 제물로 바친 것이 꽃이라 마음이 불편하다. 자연이 보낸 태풍 앞에선 어쩌지 못하는 마음만 애달프다. 꽃송이는 해바라기의 목숨이다. 자신의 온몸을 바쳐 사수한 것이 과연 무엇일까 뒤늦게 돌아본다. 그맘때쯤 정원에 정답게 어우러졌던 더덕꽃과 나팔꽃 덩굴, 수국과 백일홍, 푸른 잎만 무성한 국화 등속이다. 그들은 태풍을 맞고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버젓이 생을 유지해가는 걸 보면, 해바라기가 제물이 된 덕분이다.

 

세상에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부유한 삶을 이어가는 사람도 있다. 사회생활을 하며 느낀 것은 갑부는 혼자 부자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기업도 당신이 부리는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성심껏 일을 해줘야만 성장할 수가 있다. 자산이 사유재산인 양 마음대로 부리다 물거품이 된 기업이 여럿이다. 또한, 인간을 인간같이 대하지 않고 당연한 듯 수족처럼 부리며,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인 양 허세를 부리다 감옥 행한 기업인이 어디 한둘이랴. 이런 기업에 청춘을 묻고 열심히 일한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사랑과 열정을 쏟은 무수한 시간은 또 어쩌랴. 우리는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오죽하면 우리네 삶이 빚진 인생이란 말이 나올까.

 

문득 희생의 삶을 살다가 하늘로 돌아간 친정어머니가 떠오른다. 어머니는 당신의 몸을 보살핀 적이 없다. 첫새벽에 일어나 늦은 밤까지 늘 분주했던 어머니시다. 남편과 자녀, 시어머니까지 열 식구를 돌보며 수십 마리의 가축을 기르셨다. 어디 그뿐이랴. 동네에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의 머리도 깎아드리고, 어려운 사람을 그냥 보고 지나치질 못하여 몸과 마음이 분주하셨으리라. 세월이 흐르고 보니 어머니의 선한 행동이 나에게 돌아와 번듯이 사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우리는 소신대로 전설처럼 걸어간 선인에게 빚진 자들이다. 그들도 삶의 제단에 제물로 내놓은 것들이 상당하리라. 부모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다하셨고, 해바라기도 자신의 심장을 내놓고 스러졌다. 나는 과연 삶의 제단에 무엇을 내놓았는가. 제물이라고 하기엔 미미한 것들이라 부끄럽다. 창밖에 나뭇잎이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다. 바람 속에서 온몸이 흔들려야 새싹도 돋고 꽃도 피어나는가. 우주 만물은 대가 없이 얻어지는 건 없음을 보여준다.

 

                      묘시(卯時) / 이 은 희

 

오늘도 죽음 같은 잠에서 깨어난다. 화들짝 놀란 듯 단박에 눈이 떠진다. 누가 깨우지 않아도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시간이 새벽 다섯 시 무렵, 묘시이다. 과로한 날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단잠에 들지만, 그렇다고 둔감한 사람은 아니다. 잠결에 사람의 숨결이 느껴지면, 눈을 번쩍 뜨는 자칭 예민형이다. 예전에는 자정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는 식구 덕분에 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많다. 여하튼 나에게 알람시계는 여벌이고, 몸이 시계이다.

 

몸이 알람시계 역할을 수행한 것이 꽤 오래이다. 묘시에 자동으로 잠을 깨는 형국은 아마도 직장생활 삼십사 년의 새벽 출근이 한몫했으리라. 골몰히 생각하니 학창 시절에도 새벽에 깨어있길 좋아한 것 같다. 식구들이 잠든 새벽에 깨어나 서정윤의 ‘홀로서기’ 시를 베껴 쓰며 세상을 향하여 당당히 홀로서기를 바랐다. 별거 없는 사소한 일상을 깨알 같은 글씨로 메모하며 자신이 변화하기를 원했다. 적어도 그 시절엔 몸 안의 온 감각이 살아 정신의 변신을 돕던 세포들이 많았던 것 같다.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시공간, 묘시가 준 선물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묘시를 갈망한다. 그 시간을 누렸던 공간이 청년시절 집안의 책상이라면, 이제는 꽃과 나무들이 자라는 탁 트인 정원이다. 24층 복층 아파트 테라스에 가꾼 꽃밭 덕분이다. 나는 꽃밭이 하늘과 가까이에 있어 ‘하늘정원’이라 부르며 이곳에서 묘시를 보내길 원한다. 아무리 피곤해도 몸을 일으켜 하늘정원으로 향한다. 이럴 땐 마치 뇌가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닌 발이 기계처럼 인도하는 느낌이다.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는 구속과 간섭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시간이다. 내 영혼의 울림을 듣는 시간이다. 사색이든, 꽃밭을 일구든, 모든 것을 내 의지로 이룩하는 시간이다.

 

묘시는 사람들이 잠들어 고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대부분 새벽은 고요하고 바다의 심연 속 같다고 말한다. 그 말은 새벽을 잘 모르는 소리이다. 동살이 비추기 전에 주위는 굉장히 수런거린다. 새들의 지저귐이 꽤 높아 그 소리에 놀란 개가 컹컹 목청을 높인다. 바람에 나뭇잎 제 살 스치는 서걱대는 소리와 꽃봉오리의 털북숭이 껍질 벗는 미세한 소리까지 들린다. 거기에 처마 끝 청아한 풍경 소리와 정원을 거니는 자갈 밟는 나의 발자국 소리도 더한다. 물상의 소리를 다 적을 순 없지만, 이런 소리가 들려야만 묘시이다. 모두가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묘시만의 음률이다. 과거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다. 어느 순간 나의 귀와 감각이 열린 것이다.

 

묘시의 하늘정원은 계절마다 분위기와 경치가 다르다. 특히, 초겨울에서 늦봄까지는 푸르스름한 동살의 하늘빛이 대단하다. 자연이 펼치는 푸름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곱디고운 색이다. 지금도 기억에 오롯이 남는 광경은 푸르스름한 배경으로 샛별 하나와 처연한 초승달, 그리고 처마 끝에 매달린 물고기 한 마리가 노니는 풍경이다. 이 얼마나 환상적인 조합인가. 단순 미학의 극치에 넋을 놓은 적 있다. 이런 풍경을 다시 보고자 하늘을 수없이 바라보나 기약이 없다. 여름으로 갈수록 푸름의 빛살은 약해지고 붉은 빛살이 늘어난다. 이제 더위가 가까이에 있다는 증거이다.

 

몽환적 분위기 속에서 노니는 날도 있다. 구름의 유속이 빠른 날은 마치 다도해를 만난 듯 섬들이 꿈틀거린다. 구름이 우암산과 백화산, 고층 아파트의 허리춤까지 내려 와 그 대상이 보였다 안보였다 하니 섬이 꼭 움직이는 듯 보인다. 그런 날은 구름이 24층 하늘정원에도 머문다. 발밑에도 구름이 잔뜩 깔려 신선이 된 듯 구름 위를 걷는 듯 몽환적 느낌이다. 이 또한, 낮에는 볼 수 없는 묘시가 준 신비스러운 풍경이다.

 

윤오영 수필가는 인시(寅時)를 다분히 향유한 분이다. 인시는 묘시에 바통을 넘기는 시간이기에 한 시간여 공유하는 접점이 있다. 요즘 말로 선생과 나는 새벽형 인간이다. 그와 마주하면, 서로 공감한 새벽 이야기의 끝이 없으리라. 그는 생활의 시간을 셋으로 나눈다. ‘자는 시간, 나다니는 시간 그리고 가장 짧은 밤중에 몇 시간’으로 나눈다. 가장 소중한 시간이 밤중의 짧은 시간, 바로 인시란다. 나도 그처럼 생활을 셋으로 나눠보니 자는 시간과 직장생활, 새벽의 한 시간이다. 새벽 5시부터 6시는 오로지 나를 위한 황금 같은 시간이다.

 

새벽 5시에서 7시, 하루를 여는 묘시는 새뜻하다. 밤과 낮의 경계지점, 감성을 키우는 시간이다. 무딘 감성이 살아나고, 영감이 번뜩이는 시공간이다. 신비스러운 새벽을 이루는 조력자가 여럿이다. 존재감을 일으키는 신선한 바람과 앞산이 뒷산을 업은 듯한 산등성이들, 산 굽이굽이 피어오르는 안개와 구름, 꽃과 나무가 주는 그윽하고 깊은 정취가 감성을 건드린다. 무엇보다 새벽을 새벽같이 달구는 소리와 생업을 위하여 산업공단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가슴을 울린다.

 

묘시는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시간이다. 작은 정원을 손수 가꾸는 일은 삶의 속도를 식물의 움직이고 자라는 속도에 맞추는 일이다. 변화무쌍한 하늘과 사계절 변하는 산을 하늘정원으로 불러들여 벗하니 장자가 말한 소요유(逍遙遊)가 아니겠는가. 삶의 갈피에 숨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마음에 담아가니 삶은 충만해지리라. 오늘은 영원한 묘시지기로 받아달라고 감히 신께 청한다.

 

             괴이하고 불경스러운 언어-소품문의 대가,이옥을 중심으로 

 

작가의 입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소리가 있다. 글을 써야 하는데 ‘소재가 부족하다’는 고민거리다. 시간과 돈이 부족한 것이 아닌 글감이 없어 글을 쓰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말에 한 문인은 주변에 널린 것이 글감이란다. 하지만, 지면에 발표한 글은 남편과 자식이야기, 신변잡기로 일관한다. 그러던 차에 18세기 소품문을 접하며, 수필 소재에 관한 생각이 깊어진다.

 

18, 19세기를 대표하는 소품가인 이옥(李鈺, 1760~1815)의 문장을만나 가슴에 파문이 인다. 이옥과 관련 서적을 주문하여 탐독하며 적잖이 흥분한다. 소재가 부족하다는 문인은 이옥의 삶과 작품세계를 마주하면 부끄러우리라. 글감 탓은 핑계이며, 문학의 열정이 부족하다는 걸 깨닫게 되리라. 생활 주변에서 이옥의 눈에 띈 만물은 글감 대상이다. ‘한평생 소품문 창작에 전념한 흥미로운 작품을 많이 남긴 문인’이란다.

 

이옥의 생애는 한마디로 고독하고 불우하다. 세상 밖으로 밀쳐진 그가 글을 쓰지 않았다면, 생을 견디기 어려웠으리라. 1792년 정조가 출제한 문장 시험에 소품체를 구사하여 ‘불경스럽고 괴이한 문체’를 고치라는 하명을 받는다. 이에 불응하여 견책을 받고 충청도 정상현과 경상도 삼가현으로 두 번의 충군(充軍)에 갖은 고초를 겪는다. 그는 유배지에서 돌아와 과장(科場)에 출입하지 않고, 경기도 남양에 칩거하며 글쓰기에 열중하다 여생을 마친다.

 

이옥의 글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소재로 세상의 이치를 알린 작품들로 가득하다. 일상에 널린 물상인 새와 물고기, 짐승과 과일, 채소와 나무, 풀 등속을 자신만의 감수성으로 표현한다. 또한 자신이 체험한 세계를 독특한 해석과 철학적 사유로 빚어낸다.《백운필(白雲筆)》서문에서 ‘책명을 붓 가는 대로 기록한다는 필(筆)이라 하고, 매장마다 담(談)이라는 표제를 붙인 데서 알 수 있듯’ 작고 보잘것없는 것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묘사로 심금을 울린다. 그러니 18세기 어떤 지식인과 문사가 그를 따라올 수 있으랴.

 

이옥은 문학적으로 ‘일상성의 대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일상생활의 소재와 주제를 즐겨 다루는 ‘현대문학의 한 장르인 수필문학, 특히 생활수필 혹은 잡감 수필의 선구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 보면, 수필은 전통적이고 규범적인 ‘순정고문(醇正古文)’의 격식을 파괴한 문체로 시대의 아픔을 겪고 살아남은 문학 장르이다. 이옥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자신만의 개성적 문체와 내용을 고집한, 문학의 한 장르로 태동하도록 앞장 선 문장가이다. 일상성을 대표하는《봉성문여(鳳城文餘)》에 실린 작품, 시기(市記)이다.

 

12월27일에 시장이 열렸다. 나는 너무나 심심하고 지루한 나머지 종이창의 구멍을 통해 시장 풍경을 엿보았다. 그때 마치 눈이 올 것처럼 하늘이 컴컴했는데, 눈구름인지 먹구름인지 분변하기가 어려웠다. 대략 정오는 이미 넘긴 시간이었다. 송아지만 하게 보이는 소를 몰고 오는 사람도 있고, 소 두 마리를 몰고 오는 사람도 있고, 품에 닭을 안고 오는 사람도 있다. 팔초어八梢魚(문어)를 들고 오는 사람도 있고, 돼지의 네 다리를 결박한 채 들쳐 매고 오는 사람도 있고, … 서로 만나 허리를 숙여 절하는 사람도 있고, 서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있고, 서로 화를 내며 밀치고 다투는 사람도 있고 손을 잡아당기며 서로 희롱하는 남자와 여자도 있고, …

 

시장 풍경을 다 구경하지 않았는데 땔나무를 한 짐 짊어진 사람이 나타나 종이창 바깥으로 바로 보이는 담장 쪽에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나 역시 안석에 기대어 누웠다. 한 해가 다 저물어갈 무렵이기 때문인지 시장은 더욱 사람들로 북적댔다. -이옥,《봉성문여(鳳城文餘)》, 시기(市記) 중에서

 

겨울 저잣거리의 인정과 풍물을 진솔하게 그려낸 장날 풍경이다. 경상도 삼가현에 충군으로 머물며 지은 글이다. ‘있고’ 라는 반복 문장이 단조롭지만, 사람마다 각각의 특색과 변화가 있는 생동감 넘치는 글이다. 선비들이 주저하던 저잣거리 풍경을 화가 김홍도나 신윤복이 그림으로 문장가 이옥이 글로 남기지 않았다면, 그 시대의 생활상과 사람 냄새나는 풍경을 어찌 느낄 수 있으랴. 그의 글로 18세기 선인의 문화와 풍습이 눈앞에 생생하다.

 

후인은 글 속에서 선인의 삶을 공유하고, 그 시대의 문화를 고증한다.《글쓰기 동서대전》의 저자인 한정주는 이옥의 작품집《백운필》에 실린〈담충(談蟲)〉을자신이 본 수천수만 편의 소품문 가운데 가장 탁월하고 독보적인 걸작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일상에서 발견한 ‘사소하고 하찮고 보잘것없는 미물(존재)의 위대함과 비범함, 거대함의 역설’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일찍이 우연히 수숫대를 꺾어서 그 한마디〔節〕를 쪼개본 적이 있다. 가운데가 텅 비어 구멍이 나 있고 위아래로 마디에 미치지는 못하였는데 그 크기를 비교하자면 연근 구멍과 같았다. 그곳에 살고 있는 벌레가 있었다. 그 벌레의 길이는 기장 두 알가량 되는데,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생명력이 느껴졌다. 나는 한숨을 쉬고 탄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즐겁구나, 벌레여! 이 사이에서 태어나고 이 사이에서 성장하고, 이 사이에서 기거하고, 이 사이에서 입고 먹고 자는구나. 더욱이 이 사이에서 늙어가겠지. … 귀로는 듣지 않고 눈으로는 보지 않으며 그 수숫대의 하얀 속살을 이미 실컷 먹으며 배부르게 살다가, 이따금 우울하거나 답답하고 심심하거나 지루할 때면 그 배때기를 세 번 굴려서 위의 마디에 이르러 멈추니, 이 또한 하나의 소요유(逍遙遊)라고 하겠다. 어찌 거대하고 광활해서 여유로운 땅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즐겁구나, 벌레여!”-이옥,《백운필(白雲筆)》,〈담충(談蟲)〉중에서

 

어느 날 거대한 갑충인 벌레로 변한 그레고리 잠자, 카프카의《변신》을 떠올리게 하는 실험성 짙은 글이다. 이옥이 스스로 벌레가 되었다는 말은 없다. 하지만, 글 속에서 사물과 자아의 주관적 일체감이랄까. 수숫대 속의 벌레를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벌레는 이옥 자신을 의인화한 것이다. 자신이 펼치고 싶은 세계를 마음대로 펼치지 못하는 세상과 불화를 수숫대 속 벌레에 비유한 것이다. 서얼 출신에 문체반정으로 속세로 밀려난 그가 미물인 벌레가 되어야만 비로소 기탄없이 말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닌가. 그의 생애와 맞물려 글에서 소외감과 고독감이 느껴진다.

 

정조로부터 소품체 작가로 지목된 강이천(1768년~1801년)은 이옥의 작품을 읽고 ‘붓 끝에 혀가 달렸다.’고 전한다. 하지만, 문장가인 이옥의 고민도 다르지 않다.《백운필(白雲筆)》서문에서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또 무엇을 가져다 말하고 붓으로 써야 할 것인가?’ 자문하였다. 이러한 작가 정신이 시대를 앞서가는 대가(大家)로 이끈 것이다. 또, 남다른 점은 25세의 이옥은 제야를 특별하게 기념한다. 그는 문학의 신에게 제를 올리며〈문학의 신에게 올리는 제문〉과〈섣달 그믐의 바람〉을 지었다. 문학의 신은 아마도 자기 내면의 다른 이름이리라. 글을 짓고자 갉아먹은 자기 정신에게 사죄하는 의미로 제를 올렸다니 참으로 흥미롭지 않은가.

 

21세기 수필가는 ‘괴이하고 불경스러운 언어’를 탐독한다. 시대의 아픔을 나눈 벗과 그의 작품을 알아보고 책을 엮은 후인이 있어 다행이다. ‘이옥의 작품은 양적으로 많을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우수하다. 그는 수많은 작품을 창작했으나 체계적으로 정리된 적이 없다.’고 전한다. 그나마 절친한 벗인 김려(金鑢, 1766~1822)가 그의저서《담정총서(藫庭叢書)》에 일부를 실었다. 이 밖에《백운필(白雲筆)》과《연경, 담배의 모든 것》,《이옥전집》등은 최근에 와서야 발굴된 것이다. 그의 수필(소품문)이 제자리에 안착하지 못하고 어딘가에 떠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두 눈을 크게 뜨고 고서를 관심 있게 볼 일이다.

 

수필 인구 삼천 명 시대를 맞고 있다. ‘21세기는 수필시대가 될 것이다.’ 라는 이어령 선생의 예언이 적중한 것이다. 수필을 일러 문학성이 없다고 말한다. 18세기에도 소품문을 폄훼하다 못하여 징벌까지 내리는 문체반정이 벌어진다. 당대에도 이어지는 모욕을 당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수필가들이 변화해야만 한다. 현대수필 발행인 윤재천 교수는 ‘문학성은 변화에서 나온다. 수필은 변화해야 하고 디자인하라’고 주문한다. ‘문학성은 다양한 변화를 두려워해선 안 되고, 남의 눈치 보지 말고, 남을 닮으려 하지 말고, 자기만의 글을 써야 한다.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실패해보고, 성공도 해봐야 한다.’ 18세기 소품문의 대가 이옥처럼 자신만의 철학이 담긴 수필의 길을 열어가야만 한다.

 

지금 우리는 가을의 영토 안에 머문다. 산야에 단풍을 보니 이옥의 문장이 떠오른다. 이옥의 중흥유기(重興遊記)처럼, ‘어디를 가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고, 누구와 함께 하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온 천지에 오색 단풍 들고 낙엽이 구르니 어찌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랴. 인간의 마음은 아름다움에 흔들리라고 지구에 자리하는가 보다. 선인처럼 글감 잡으러 가을 속으로 떠나보자.

 

                        문 / 이 은 희

 

문門은 소통의 다른 이름이며 표현이다. 일단 문 앞에 서면, 그 안에서 펼쳐질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지며 오감이 발동한다. 그렇다고 그 안에서 내가 상상했던 것들이 똑같이 전개되진 않는다. 아무 생각도 느낌도 들지 않을 때도 더러 있다. 그저 문턱을 넘기 전 문 앞에서 자유로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 좋고, 무엇보다 앞으로 펼쳐질 대상과 무언의 신고식을 즐기는 것이 좋다.

 

그리고 문이 주는 이미지나 분위기가 모두 다르기에 더욱 매력을 느낀다. 그동안에 보았던 문門중 나의 오감을 자극했던 것들이 많지만, 최근에 다녀온 그곳의 장면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히 다가온다.

 

순천만 자연생태공원 입구에서 표를 사고 안으로 들어가고자 기다리던 터였다. 입구에 딸린 대문 격인 울타리일까. 아무튼 문에 뚫린 틈새로 비치는 연둣빛에 눈이 부시다. 앞으로 다가가 그 뚫린 부분을 자세히 살피니 새의 형상이다. 철새가 마치 따스한 봄날 연둣빛 나무를 스쳐 자유롭게 날아오르고 있는 모습이다. 이어 새들이 힘차게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논둑엔 자운영 꽃이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고, 마른 갈대들이 바람결에 너울댄다. 그 속에서 땅을 일구는 순박한 농부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 안에 들어가 보지 않아도 평화로운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거다.

 

입구를 들어가고자 기다리던 사람의 등만 쳐다보았다면, 문에 조각된 철새의 형상을 볼 수 없었으리라. 순천만은 갈대와 습지, 철새 도래지로 유명하다. 이 지역의 상징으로 철새를 대문에다 조각한 것 같다. 마침 그 틈새로 새잎 돋은 나무가 생기를 불어넣어 철새가 날아가는 듯한 상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안을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미 문을 통하여 순천만과 소통이 이루어진 셈이다.

 

문文을 짓는다. 두 번째 관문에 들어선다. 문門보다 조금 더 어려운 문文이 아닐까 싶다. 약으로 치면 매우 쓰디쓴 고약, 고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느낀 것들을 기억의 힘으로 문자화한다. 얼마나 대단한 문文 인가. 이 과정을 거쳐 내가 스쳐온 흔적을 사후에도 영원히 남을 기록을 남기니 말이다. 무엇보다 작가라면 글을 멋지게 지어 남기고 싶은 마음 굴뚝같으리라.

 

순천만 기행에서 돌아와 아니 문門에 조각된 철새를 본 그 순간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 머릿속은 분주해진다. 그 장면은 나의 뇌 한구석을 헤집고 똬리를 튼 것이다. 녀석은 부르지 않아도 일상에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랑 놀자고 한다. 참으로 미칠 노릇이 아닌가. 먹고사는 일이 먼저인데 순간순간 놀아달라고 하니 숨이 턱턱 막힌다. 언제쯤이면 저 철새처럼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을까.

 

그러나 시간이 많다고 글이 술술 풀리는 건 아닌 것 같다. 하나 분명한 건, 뇌리에 '그것'이 정확히 구성되기 전까지는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릴 수가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애면글면하며, 사유는 더 깊어진다. 그렇게 고뇌하여 얻어진 문장文章,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순간이다. 이 얼마나 영광된 순간인가. 글쟁이는 그 멋과 맛을 알기에 시시포스의 고역을 계속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問, 결미를 짓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다. 나에게 묻고 또 묻는다. 내가 정작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독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어 고역을 마다치 않고 짓는 행위를 계속하는지 말이다. 이 질문은 내가 붓을 꺾지 않는 한 이어질 것이고, 그 해답 또한 내 안에서 찾아야만 하리라.

 

순천만 입구에서 본 철새가 나의 시선은 붙잡은 건 아마도 내 모습과 같은 형상이라 여겨선지 모른다. 문 틀 안에 갇혀 있는 새의 모습, 그러나 그 틈새로 완연한 봄빛이 스며들어 연둣빛 희망이 감돈다. 그러니 새가 문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나, 갇혀 있지 않은 철새이다. 마치 내가 창살 없는 세상의 감옥에 갇혀있으나. 희망을 안고 자유로이 날아가는 모습을 그리는 거나 같다.

 

결국 이런 내 행위는 현실과 욕망의 다툼처럼 보이나 나自我를 찾아가는 작업이다. 문門에 갇힌 철새가 순간 훨훨 나는 착시를 일으킨 것은, 아마도 현재 어쩌지 못하는 내 자리를 탓하며 자유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형상이 꼭 나인 양 중첩하여 바라보고 느낀 사유로 문文을 짓고, 이 모든 과정은 문問, 묻고 또 묻는 일로 시작되고 끝을 맺으리라.

 

문門, 문文, 문問의 과정을 통하여 만물과 소통하고, 내 안의 나를 찾아 달래고 어루만져, 세상에 다시 설 힘을 얻는다.

 

 

                    고사목의 변(辯) / 이 은 희

 

고사목이 눈에 든다. 금방이라도 연둣빛 신록에 묻혀 나무줄기 여기저기에서 푸른 잎이 돋아날 것만 같다. 구병산 팔백여미터 산길을 오르는 중에 만난 허옇게 말라버린 소나무. 꽃 빛바랜 화석 같다. 몸체가 굵고 하얘서 유난히 도드라진다. 시선은 나무의 줄기를 따라 하늘을 바라보지만, 신록에 가려 우듬지가 보이지 않는다.

고사목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자니 뜬금없이 '군중 속의 고독'이란 낱말이 뇌리를 스친다. 혹여 이 나무가 바로 '고독의 실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다다른다. 고독도 깊으면 병이 되고, 관계 또한 과하면 탈이 나지 않던가. 저 많은 나무 중에 누구와도 소통이 어려워 지쳐버린 나무인가. 주변의 수종을 살펴보니 대부분 활엽수종이다. 참나무와 아기단풍, 산진달래 등속이다. 그 속에 죽은 나무는 소나무 한 그루뿐이다.

죽은 나무를 바라보는 이마다 해석을 달리하리라. 나무의 사인을 물어보지 말자.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빈곤이 드러나듯, 빈곤의 뒷면에는 풍요가 득세하고 있지 않던가. 봄빛의 향연이 벌어지는 숲 속이다. 연둣빛으로 물든 갖가지 나무들과 연분홍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그 자체만으로도 환상적이다. 나무의 껍질은 벗겨지고 맨살로 반짝이는 소나무. 바로 풍요 속 빈곤의 실체가 아닐까 싶다.

의미 찾기를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이나 그리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와 함께 나선 여인네는 죽은 소나무는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산중에 흐드러진 산진달래 꽃에 홀려 감탄하느라 여념이 없다. 산 밑에서 몰려오는 알록달록 차려입은 등산가들 또한 고사목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산 정상을 향하여 빠르게 오른다.

고사목이 살아 있다고 믿고 싶다. 이렇게 기품이 넘치는 나무를 어디에서 만나랴. 주위 나무들을 보자. 나무 굵기로 보나 자태를 보나 아마도 살아 있을 때 주위 사무들의 시선을 독차지했을 것 같다. 푸름 속에서도 고사목으로 기죽지 않을 늠름한 자태가 그 증거이다.

어찌 보면, 빈곤의 실체는 고사목이 아닌 나와 주변의 것들이다. 위로를 받고자 숲에 든 내가 아닌가. 빈약한 사색과 관찰로 나무가 안타깝다고 애잔한 눈길을 보낸 건 잘못이다. 고사목은 고독의 달인이자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베푸는 자선가다. 그의 몸집엔 벌레나 곤충들이 헤집어 놓아 크고 작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나무는 죽어서도 공덕을 쌓는다. 뚫린 공간에서 실체 없는 바람도 쉬어가리라. 그의 몸을 빌린 자들도 그에 폭넓은 아량과 베풂을 알까. 나처럼 미욱하여 머문 공간만 바라보고 내면을 읽지 못한 탓이다.

나무는 남다른 고독을 꿈꾸고 있다. 하늘을 향하여 멋스러운 자태로 서 있는 나무. 고사목으로 꺾이지 않는 늘 푸른 소나무로, 아니 쓰러지지 않는 화석으로 숲 속에 늘름한 모습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순간 줄기마다 솔잎이 무수히 돋아 성성한 나무로 주변 나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새봄은 마술을 부린 양 나의 눈에 콩깍지를 씌운다. 멀쩡한 사람도 마구 흔들어 놓는 봄날의 변變이다.

 

                         잠 / 이 은 희

 

바닷바람에 나부끼는 흰 깃발이다. 옆에선 파란 천막이 공중에서 노닌다. 시선을 낮추니 바닥에 검은 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가만가만 다가간다. 발목 물 찰랑대는 물결 소리가 전해질까 조심스럽다. 드디어 그의 자태가 드러난다. 썰물로 드러난 바닷길 위에 자신의 안방인 양 드러누운 남자.

깊은 잠이었다. 분명히 여러 소리가 그의 고막을 울렸을 터인데 아무런 기척이 없다. 파도와 갈매기의 울렁거림이 자장가로 들리는가 보다. 그가 드러누운 바닥은 굴을 캐고 난 빈 껍데기가 닥지닥지 붙은 돌무더기이다. 편평한 갯벌이 하고 많은데 왜 하필 딱딱하고 까슬까슬한 돌 위란 말인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밀물의 의식도 없이 그는 누워 있다.

바닷가를 둘러본다. 드넓은 갯벌 위에선 관광객이 조개를 잡느라 한창이다. 저들도 나처럼 휴가지로 섬을 선택한 사람들일게다. 장고도는 인적이 드문 개발이 덜 된 곳이다. 책자나 인터넷에서 섬의 정보를 찾아본 이라면 알고도 남으리라. 섬에 오려면 한 달 전에 예약을 마쳐야 하고, 변변한 식당이 없어 식단표를 작성해 먹을거리를 챙겨야 한다.

무엇보다 한 시간 전에 항구에 닿으라는 말을 어기면 발을 동동 구르게 된다. 허겁지겁 도착하여 표를 끊었으나 여객선엔 짐차를 실을 공간이 없다고 한다. 대가족을 동반한 우리도 어김의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섬에 먼저 닿은 가족은 짐을 기다리며 배를 쫄쫄 곯아야 한다. 성미 급한 섬 손님은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조개를 잡으로 바다로 내달린다.

갯벌은 금세 밭을 일군 듯 파헤쳐진다. 둘 서넛씩 바닥에 주저앉거나 허리를 구부러 조개를 잡는 일에 몰두한다. 호미와 삽으로 파헤친 갯벌은 마치 경작해놓은 대지 같다. 막내 제부가 허리를 펴다가 자신이 파놓은 갯벌을 보고는 흠칫 놀란다. 텃밭을 이렇게 일구면 농사는 분명히 대풍이겠지 생각한 모양이다.

인간의 욕심은 언제 어디서나 발동하는가 보다. 조개를 재미로 잡는다지만, 욕심은 허리조차 굳어가는 줄 모른다. 이카로스는 과욕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날개가 태양열에 녹는 줄도 몰랐다던가. 아픈 허리를 손으로 짚고 함지에 담긴 조개를 보며 내심 흐뭇해하지만, 굳어진 허리를 펴느라 밤새 조개 타령을 하리라.

휴가가 '휴식'이란 타이틀이라면, 나처럼 금세 조개잡이도 싫증이 나리라. 일상을 벗어나 섬으로 편안한 휴식을 취하러 온 것이지만, 대부분 사람은 진정한 휴식의 의미를 생각지 않는다. 떠나온 목적보다는 탐심만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사진 기사를 자청했지만 이내 무료해진다. 천천히 갯벌을 벗어난다. 큰 바위에 청송이 고슴도치처럼 생긴 섬 안에 섬, 명장섬이다. 모두 조개잡이에 여념이 없어서일까. 섬을 구경하는 이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명상이라도 하듯 갯벌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건 갈매기 무리뿐이다. 저들은 바다가 심어 놓은 열매를 탐하는 인간군상을 그저 무념무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역광선인 바다는 은빛 물살로 찬란하다. 바다로 달려가는 검은 그림자는 부모의 조개잡이를 지켜보거나 함께 놀아달라고 보채다 지쳐버린 아이들일 것이다. 두 팔을 휘저으며 마치 새처럼 은빛 물살과 노닐고 있다.

명장섬을 휘돌아보고 갯벌로 돌아가는 길이다. 썰물로 드러난 바닷길 위에 호롤 잠든 남자를 발견하고야 섬에 온 의미를 깨닫는다. 바닷가에서의 진정한 휴식자는 잠든 남자와 아이들이리라.

검버섯 핀 그의 얼굴은 평화롭다. 나비잠의 자태다. 그가 누운 바다는 양수의 또 다른 의미인가. 태초의 자리. 어머니의 자궁을 떠올리려는 건 아닐까.

태아가 모체에서 깊은 잠을 자듯 그는 지금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밀물과 썰물이 오가는 바다가 아닌 지상에서 최상의 안식처라고 그의 표정이 말하는 듯하다.

그가 무언의 깃발을 전한다. 백기가 그의 말을 대변하는가. 모든 걸 내려놓고 싶었다고. 내 안에서 무시로 꿈틀거리는 욕망, 질투, 분노, 고통으로부터의 항복이다.

저물어가는 해가 바다의 표정을 바꾼다. 보석처럼 반짝거리던 물결이 이제 황금빛 물결이 되어 술렁거린다. 살갗에 스치는 바람 또한 서늘하다. 머지않아 밀물이 바로 밀려들리라. 숙소로 향하는 내 눈길과 발길이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아직 그대로다.

삶에 재충전의 시간은 끝났다. 이제 당신도 나도 세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그에게 새롭게 태어날 시간이라고 텔레파시를 보낸다. 시나브로 잠에 들 시간이 임박한다.

 

                    양푼 예찬 / 이 은 희

 

 가스 불에 찻물을 올립니다. 그의 온몸은 금세 열로 펄펄 끓어 오릅니다. 주위에서 무어라 저지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파란 불빛 하나에도 그는 온몸을 부르르 떱니다. 파편이 여기저기에 투명한 자국을 남깁니다. 붉은 깃발을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가는 성난 투우 같습니다. 머지않아 파란 불 빛과 함께 싸늘히 식어갈 체온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우직한 바보인가 봅니다. 그런 그의 무모한 열정이 꼭 나를 닮은 듯하여 이따금 두려워집니다.

 그의 집엔 늘 손님으로 북적거립니다. 차 한 잔을 대접하기 위해 그를 찾아 빠르게 찾아 나섭니다. 국그릇 두 배 크기, 겉과 속은 한 가지 빛깔인 황금색입니다. 그러나 연륜은 못 속이나 봅니다. 가장 평평한 자리인 배가 얼룩덜룩 검은 회색빛이 감돌아 목리문처럼 빗금이 수없이 그어졌습니다. 빛이 바랜 양푼입니다.

 온데 상처투성이가 난 누런 그릇을 의식 없이 손으로 낚아챕니다. 이젠 부끄러운 줄도 모릅니다. 수십 년 전, 철모르던 어린 새댁이 아닙니다. 살림에 묘를 부릴 줄 아는 아줌마로 세월 속에 서 있습니다. 이젠 그와 썩 잘 어울립니다.

 스테인리스 주전자가 찬장 턱에 올라앉아 울상입니다. 날렵하고 윤이 나는 삼각스테인리스 주전자 위로 먼지가 뽀얗게 앉았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아 더욱 외롭답니다. ‘차라리 날 식구로 만들지나 말든지.’ 그의 볼멘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우리 집에서 양푼은 다른 소품들의 질투의 화신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결혼해서 시골로 들어가 시어머니와 함께 살 때의 꼭 내 모습과 어쩌면 그렇게 닮았을까. 퉁퉁 부은 볼멘소리로 안달을 했습니다. 하늘하늘 꽃무늬가 들어간 하얀 도자기 그릇은 내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연일 땔감을 베어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가마솥에 밥을 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을음으로 혼수로 가져 간 폼이 나는 그릇은 자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궁이 불씨가 사윈 뒤에는 검게 그을린 부엌과 그릇을 닦느라 쪼그리고 앉아 한나절은 소비하였습니다. 도시의 젊은 새댁은 허리와 손목이 쿡쿡 쑤셔와 남몰래 눈물을 흘린 적도 많답니다.

 시어머니는 작은 양푼에 보글보글 라면을 맛나게 끓이기도 하고, 찻물을 올리기도 합니다. 나물을 살짝 데쳐 감칠맛나게 무치는 용기로 두루두루 애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용도로 쓰이는 양푼을 이해하질 못했습니다. 어린 새댁은 무시로 깔끔을 떠는 성격이랍니다. 찌그러지고 볼썽사나운 양푼에 마구잡이로 끓이고, 볶고 청결하지 못하다 느꼈습니다. 새댁은 볼멘소리로 하루빨리 깨끗한 아파트로 이사 가고 싶다며 투정을 부렸답니다. 그리고 수없이 마음속으로 혼자 기와집을 그렸지요. 깨끗한 입식 부엌에 하얀 도자기 그릇을 내놓고 아기자기하게 생활하는 행복한 주부의 모습을 말입니다.

 일 년 후, 학수고대하던 아파트로 둥지를 옮겼습니다. 가족들과 일방적인 상의 끝에 양푼을 모두 버렸는데,한 녀석이 시어머니를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했던가요? 그 습관을 제가 버리질 못했습니다. 스테인리스 주전자를 한두 번 사용하다가 원 상태로 돌아가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어느덧 양푼에게 길들여졌나 봅니다. 옛것이 무조건 나쁘고 불편한 것만이 아닌 듯합니다. 요즘은 실용성을 고려하지 아니한 겉포장을 중시하는 풍조가 대단합니다. 그렇습니다. 속 빈 강정처럼 겉모습만 호화스러운 것들이 많은 시대랍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듯 내실이 없는 사람이 겉으로 드러내길 좋아합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어느 한 시인의 말이 떠오릅니다. 돌(石)보다 옥(玉)이 더 많은 시대랍니다. 사실 올바른 나를 지키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시시때때로 주변의 것들이, 다채롭게 다가옵니다. 제가 사는 이 시대는, 유혹이 참으로 많습니다.  허욕과 물욕을 찾아 불나방처럼 날아듭니다. 화려한 불빛을 좇다 자신의 일부분이 타들어가는 줄 모른 채 말입니다. 결국, 날개를 잃고 바닥에 고꾸라져 안간힘을 씁니다. 비로소 후회의 눈물을 흘려도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똑 같은 후회를 하지 않도록 이제부터라도 충실히 내면을 가꾸어야겠습니다. 겉과 속이 같은 양푼처럼 말입니다.

 얼마 전, 백화점 쇼핑을 하다가 양은냄비를 보았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아이들 간식 값만도 못하는 가격을 달고 있었습니다. 높게 쌓여 있는 것이 그의 진가를 알 수 없게 합니다. 젊은 새댁들이 알 리가 만무합니다. 아마도 그의 진가를 몰라도 이건 알 것입니다. 쉬이 식어버리는 짧은 사랑을 말할 때, 양은 냄비 같은 사랑이라 빗대어 놀립니다. 그래서 은근히 양은 냄비가 푸대접을 받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인간에게 주는 실용성을 논한다면 함부로 말할 일이 아닙니다. 늙은 새댁은 뚜껑 없는 양푼이 아쉬워 욕심을 부립니다. 단돈 이천오백 원으로 남모르는 주부의 행복을 삽니다.

 한여름 별미인 시원한 콩국수를 말기 위해, 국수가 불지 않도록 후루룩 삶아냅니다. 꼬들꼬들하게 아이들이 좋아하는 라면도 끓여줍니다. 지인들과 양푼에 열무김치와 고추장을 한 숟갈 넣어 비빔밥을 만들어 정을 나눈 후, 입가에 고추장이 묻어도 흉보지 않는 허물없는 사이로 거듭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단순하며 어렵지 않은 글, 모든 것을 요리할 수 있는 가슴 큰 양푼처럼 편안한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설거지를 마친 후, 구수한 커피 한 잔이 간절한 시간입니다. 식구들이, 특히 시어머니가 양푼에 찻물을 올리는 무던한 늙은 새댁을 보고 미소 짓고 있습니다. 괜스레 지난 일이 그려져 얼굴이 늦가을 홍옥처럼 붉어집니다. *

 

                         검댕이 / 이은희 (동서문학상 대상작 2004)

 

검댕이가 긴 여행을 떠났다. 먹보인 녀석이 좋아하는 젤리도 마다하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덩그러니 보금자리만 남았다. 그런데 나는 놀라지도, 슬프지도 않다. 가족들은 두 눈에 쌍불을 켜고 그를 찾느라고 야단이다. 그러나 베란다와 온 방을 구석구석 찾아보아도 녀석은 나타나질 않는다.

 

검댕이는 우리 집에서 키우는 사슴벌레의 애칭이다. 유난히 검고 두개의 집게가 커서 붙인 이름이다. 이 녀석이 우리 집에 오기까지엔 할머니의 영웅담이 한몫을 했다.

 

어느 날이었다. 할머니와 손자가 나를 따돌리고 뭔가 작전을 수행하려는 눈치였다. 아이가 난데없이 사슴벌레에 관해 연구를 하려는 것도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것 같았다. 나 몰래 아빠에게 용돈도 얻어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날 벌어진 일을 흥분하신 할머니가 가족들에게 영웅담처럼 풀어놓으셨다.

 

도시에서는 흔하지 않은 곤충인지라 부르는 게 값이었다. 검댕이 한 마리의 가격은 만 오천 원인데 아이의 주머니엔 만 삼천 원밖에 없었다. 문방구 주인은 모자라는 이천 원을 가져오라고 했다. 하지만 검댕이를 빨리 갖고 싶어 주춤거리는 아이에게 그는 유혹의 손길을 내밀었다. 뽑기를 하면 만 오천 원이 나올 수 있다는 말에 아이는 귀가 솔깃하여 순순히 빠져들어 갔고 결국, 가지고 있던 돈마저 몽땅 뽑기 기구한테 빼앗겨 빈손이 되고 말았다.

 

그 다음 상황은 보지 않아도 그림이다. 아이는 눈물 콧물이 범벅되어 내 돈을 내 놓으라고 생떼를 쓰며 대성통곡을 하였을 것이다. 손자의 얘기를 들은 할머니는 눈썹이 날리도록 문방구로 달려갔고 문방구 주인을 사행심을 조장했다고 협박 반 애걸 반으로 모자란 돈 이천 원으로 타협을 보았다. 제일 작은 검댕이를 골라 주려고 하는 그의 손을 제치고 제일 큰놈으로 고른 손자와 할머니는 승전보를 울리며 개선장군처럼 돌아왔다. 용감무쌍한 할머니다. 덕분에 아이도 쓰라린 인생 경험을 했고 추억의 탑에 돌 하나를 더 얹은 셈이다.

 

웬만한 애완곤충은 우리 집을 거쳐 가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아이는 그들을 데려온 일주일은 호기심으로 밥도 제 때 챙겨주며 지나칠 정도로 깊은 관심을 가져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시간이 흐를수록 거들떠보지도 않아 그들의 뒤처리는 할머니의 몫이 되곤 했다. 그들도 사람처럼 사랑을 먹고 자라는가 보다. 사람도 사랑이 부족하면 거칠어지고 생기가 없어지듯, 그들도 기운을 잃은 듯 얼마 가질 못해 마침내 죽는 경우도 생겼다. 그런 모습이 딱해 앞으로 다시는 곤충을 사주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검댕이를 어렵게 데려온 얘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검댕이의 값보다 비싼 집만큼은 양보하지 않기로 했다. 자그마한 사육장이 이만 오천 원이다. 전에도 햄스터가 오천 원이면 집은 만 오천 원, 금화조가 팔천 원이면 새집은 이만 오천 원이었다. 주객의 전도였다. ‘배보다 배꼽이 크면 안 된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처음에는 고집을 부리던 남편과 아이도 못 이기겠다는 듯 네모난 석쇠를 사다가 구슬땀을 흘리며 녀석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제법 근사했다. 손수 집을 만든 남편과 아이는 어느 때보다 더욱 강한 사랑을 베풀었다.

 

하루는 검댕이가 벌렁 드러누워 배를 하늘로 향한 채 전혀 움직이질 않았다. 혹시 죽은 것은 아닌가 싶어 아이에게 물었다. 죽은 시늉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이는 그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그 녀석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내가 귀머거리인가. 갑갑하고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다음 날, 검댕이가 남의 집 화분 근처에서 방황을 하고 있지 않은가. 철끈으로 칭칭 감아 만든 튼튼한 집을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두껍고 무거운 책으로 눌려 놓기까지 했는데 어떻게 나왔을까. 그 후로도 그는 몇 번씩이나 탈출시도를 하여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검댕이의 등이 여기 저기 갈라져 상처투성이인 것이 눈에 띄었다. 실패를 거듭해도 포기하지 않고 빠져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구나, 여겼다. 헌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녀석은 정사각형인 석쇠의 네모난 구멍 밖으로 두 집게를 정면으로, 위로, 아래로, 그것도 모자라 사선으로 시도하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녀석이 빠져 나오게 된 비밀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자로 석쇠의 구멍을 재보았다. 가로, 세로 1.5센티미터. 검댕이가 정면으로 빠져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선의 길이가 약 2센티미터가 넘는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 실수였다. 아주 간단한 진리를 소홀히 다룬 것이다. 그는 우리가 놓친 맞모금의 길이를 발견한 것이었다. 겁도 없이 탈출하려는 검댕이를 보며 문득 내 모습이 겹쳐졌다.

 

신혼시절, 가난한 촌부의 아내는 오직 하나 욕심의 그릇을 채우기 위해 하루를 살았다. 셋방살이를 벗어나기 위한 알뜰함은 이내 작은 평수의 내 집을 얻을 수가 있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 헛된 욕심은 더 큰 것을 바라고 숫자를 헤아리며 여러 해를 보태었다. 겉치장을 위한 삶으로 내 머릿속엔 상상의 기와집은 수없이 그려졌다. 또한 직장에선 한 계단 더 높은 직급을 위하여 모든 상황을 내게 유리한 쪽으로 고민해갔다. 늘 내 주변의 것들은 경쟁대상이었다. 그렇게 열을 채우기 위한 욕망의 불꽃은 사그라지지를 않았다.

 

모든 부분을 고속질주로 이루어낸 어느 날, 원인 모를 병에 걸린 듯 가슴아파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건만 이유 없이 허전하며, 신열을 앓듯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내가 원했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물질만능 위주의 사회에 물든 내 모습, 순수감성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문득, 내 순수영혼을 잃고 욕망만 높아진 삶이 부질없는 짓이란 걸 알게 되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리는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화려한 불빛을 쫓아다니는 불나비 같았다. 노랗게 단풍이 든 느티나무 아래에서 까르르 웃던 열아홉 소녀의 그림자가 그립다. 계절의 아름다움을 시로 읊던 나는 어디에 묻혀 있는 걸까. 사유의 창을 열어 묻고 되묻는다.

 

그 동안 나는 내내 주위의 환경을 탓하며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감히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나에겐 언제나 벗어날 수 있는 열려진 문이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현실에 안주해버린 날 조롱하는 듯 했다. 나는 검댕이 보다 용기 없는 사람이었다. 그다지 절실하지도 않으며 실체 없는 고민을 늘어놓던 나의 몸부림이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그렇다. 검댕이의 자유를 향한 무모한 도전과 끈질긴 노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사력을 다해 1.5센티미터의 구멍에 온 몸을 던졌을 것을 상상하니, 전기충격을 받은 듯 온몸이 짜릿해왔다. 그랬다. 나의 삶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었다. 인생살이에서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볼 줄 알았다. 비껴보고, 누워볼 수 있는 삶을 몰랐던 것이다.

 

표면에 드러난 가벼운 것을 즐기며, 내면의 깊이를 모르는 지금까지의 삶이 아니었던가. 그래 지극히 사소한 것, 가끔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아주 작은 감성을 도외시했다. 철망에 긁혀 생채기투성이가 될 정도의 적극적인 삶과는 비교도 되지 않아 보였다.

 

식구들이 집을 비운 오후. 녀석이 왕성한 혈기로 사방을 활개 치며 돌아다닌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끌어안고 서서히 베란다 쪽으로 다가간다. 그리고는 창문을 반쯤 열었다.

 

서재로 돌아와서도 진정되지 않는 마음은 온통 그 녀석에게 가 있다. 이윽고 ‘툭’ 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 드디어 자유를 찾았구나.’ 작은 탄성이 일었다. 먼발치에서 둘러보니 역시 녀석이 보이질 않는다. 녀석이 기어가는 속도를 계산하며, 시간이 빨리 흘러갔으면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힘이 빠져왔다. 두 어깨가 축 처졌다. 검댕이가 없는 쓸쓸한 보금자리. 검댕이의 탈출은 가족들에겐 언제까지나 미제 사건으로 남을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