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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성 균 수필 / 누비 처네 외(9편)

장대명화 2025. 11. 25. 02:40

                               누비 처네 / 목 성 균

 

아내가 이불장을 정리하다 오래된 처네 포대기를 찾아냈다. 한 편은 초록색 한편은 주황색 천을 맞대고 얇게 솜을 놓아서 누빈 것으로 첫 애 진숙이를 낳고 산 것이니까 40여 년 가까이 된 물건이다. 낡고 물이 날라서 누더기 같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시골에서 흔치 않은 귀물이었다.

“그게 지금까지 남아 있었어-?”

내가 반색을 하자 아내가 감회 깊은 어조로 말했다.

“잘 간수를 해서 그렇지-.” 그리고 “이제 버릴까요?” 나를 의미심중 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그 건 분명히 처네 포대기에 대한 나의 애착심을 알고 하는 소리다. “나둬-.” 하자 아내가 눈을 흘겼다. ‘별수 없으면서---’ 하는 눈짓이다. 그 것은 삶의 흔적에 대한 애착심은 자기도 별수 없으면서 뭘 그리 체를 하느냐는 뜻이다.

 

나는 아내의 과단성이 모자라는 정리정돈을 비아냥거리는 경향이 있다. 버릴 물건은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데 아내는 그 걸 못한다. 그래서 가뜩이나 궁색한 집안에 퇴직(退職)한 세간들이 현직(現職) 세간들과 뒤섞여서 구접스레 했다. 그 점이 못마땅해서 나는 늘 예를 들어서 지적을 했다. 사실은 그 예가 아내에게 고의적으로 모욕을 가하는 것이긴 하지만, 버리지 못하는 삶의 흔적들에 대한 애착에서 놓여나게 하려는 내 나름의 정신과적 충격 요법이지 솔직히 모욕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장터거리 박 중사의 미치광이 마누라는 늘 일본 옥상 오비처럼 허리에 보따리 두르고 다니는데 그걸 풀면 온갖 잡동사니가 다 들었어-. 이 빠진 얼레빗서부터 빈 동동구리무 곽에 이르기까지 없는 게 없대-. 자기 세간사리 모아 두는 건 흡사 박 중사 마누라 잡동사니 주어 모는 버릇 같아-.’ 하는 식이다. 그러나 아내는 모욕을 느꼈는지 안 느꼈는지 오히려 역습으로 내게 모욕을 가하는 것이다.

“남자가 박 중사 미친 마누라처럼 중중거리지 좀 말아요. 체신머리 없게 시리-.”

 

박 중사의 미친 마누라는 늘 허리에 예의 보따리를 두르고 머리에는 들꽃을 꼽고 길거리를 중얼거리면서 다녔다. 내가 박중사 미친 마누라 허리에 두른 보따리로 ‘장군-!’ 하면 아내는 침흘리듯 중얼거리는 미친 짓을 가지고 ‘멍군-!’ 했다. 매사에 내가 부른 장군은 아내의 멍군에 당했다.

아내가 들고 “버릴까요?” 하는 누비 포대기는 내 인생의 사적(史的)인 물건이다. 아내가 그 처네 포대기를 들고 ‘버릴까요’하고 묻는 것은 내 비아냥에 대한 잠재적 감정의 표출이다.

아내가 첫애 진숙이를 낳고 백일이 지나도록 나는 아기를 보지 못했다. 서울에서 인쇄업(실은 프린트 사다)을 하고 있었는데 자리를 못 잡고 허둥지둥 승산 없는 분발을 계속하고 있었다. 사업 수완이 모자라는 때문이었다. 이미 자갈 논 한 두락 즘 게 눈 감추듯 해 먹고 이 업을 할건지 말 건지 망설이는 중이였다. 아내의 산고를 치하하러 집에 갈 형편이 안임에도 불구하고, 추석 밑에 아버님의 준엄한 하서(下書)가 당도했다.

인(人) 두껍을 쓰고 그럴 수가 있느냐고 힐책하신 연후, 제 식구가 난 제 새끼를 백일이 넘도록 보러오지 않는 무심한 위인은 이 세상 천지에 너말고는 없을 것이라고 명의(名醫) 침 놓듯 내 아픈 정곡을 찌르시고, 만약 이번 추석에도 집에 오지 않으면 내 너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라는 단호한 당신의 마음을 천명하셨다. 그 준엄한 하서에 동봉 된 소액환 한 장과 말미의 추신(追伸)이 마침내 불민한 자식을 울렸다.

 

추신은 추석에 올 때 시골서는 귀한 물건이니 어린애의 누빈 처네 포대기를 사오라는 당부 말씀이었다. 소액환은 누비 처네 값이었다. 그러면 네 식구가 좋아할 거라는 말씀은 안 하셨지만 사족을 생략하신 것일 뿐 그 말이 그 말이다. 아버지는 객지의 자식이 제 새끼를 보러 오지 못하는 실정을 아시고 궁여지책을 쓰신 것이다.

지금도 나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러나 믿을 도리밖에 없는 맏자식이니 아버지도 늘 내게 연민정도는 느끼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식에 대한 연민, 그 게 얼마나 부모의 큰 고초인지 내가 당시 아버지 나이에 이르러서야 알았다. 오죽하면 소액환을 동봉하셨을까. 그 소액환은 돈이라기보다 슬하에 자식을 불러 앉히는 아버지의 소환장이나 마찬가지다. 용렬하기 그지없는 자식에게 아비 노릇, 남편 노릇 하는 방법까지 일일이 일러주어야 하는 아버지의 노파심을 생각하니까 ‘불효자는 웁니다’ 하는 유행가처럼 서러웠다.

 

추석을 쇠고 우리는 아버지의 명에 의해서 근친을 갔다. 강원도 산골 귀래 장터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한가위를 지낸 달이 청산 위에 둥실 떴다. 그 때부터 십리가 넘는 시골길을 걸어가야 한다. 아내는 애를 업고 나는 술병과 고기 둬 근을 들고 걷기 시작했다. 아내 옆에 서서 말없이 걸었다. 달빛에 젖어 혼곤하게 잠든 가을 들녘을 가르는 냇물을 따라서 우리도 냇물처럼 이심전심으로 흐르듯 걸어가는데 돌연 아내 등에 업힌 어린것이 펄쩍펄쩍 뛰면서 키득키득 소리를 내고 웃었다. 어린것이 뭐가 그리 기쁠까. 달을 보고 웃는 것일까. 아비를 보고 웃는 것일까. 달빛을 담뿍 받고 방긋방긋 웃는 제 새끼를 업은 여자와의 동행,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그 때 처음 구체적으로 알았다.

 

아버지는 푸른 달빛에 흠뻑 젖어 아기 업은 제 아내를 데리고 밤길을 가는 인생 노정에 나를 주연으로 출연시키신 것이다. ‘임마, 동반자란 그런 거야-.’ 하는 의미를 일깨워 주신, 아버지는 탁월하신 인생 연출자였다. 처네 포대기가 그 연출의 소도구인 셈이었다. 그 때, “그 처네 포대기 아버지께서 사오라고 돈을 부쳐주셔서 사온 거야-.” 내가 이실직고를 하자 아내가 “알아요.” 했다. 그리고 말하기를 추석 대목 밑에 어머니가 아기 처네 포대기 사게 돈을 달라고 하자 아버지가 묵묵부답이셨다는 것이다. “며느리를 친정에 보내려면 애를 엎고 갈 포대기가 있어야 하잖아요.” 하고 성미를 부리자 아버지가 맞받아서 “애 아비가 어련히 사올까-.” 하시며 역정을 내셨다고 한다. 아내는 그 때 시아버지께서 무심한 신랑과 친정을 보내 주실 모종의 조치를 꾸미시고 계시다는 것을 눈치 채고 가슴을 두근거렸다고 한다.

 

교교한 달빛 아래 냇물도 흐름을 멈추고 잠든 것 같았다.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 때 내가 아내의 손을 잡았던 모양이다. “그 때 내 손을 꼭 잡던 자기 얼굴을 달빛에 보니 생률 친 밤 같았어-.” 아내가 처네를 쓸어보며 꿈꾸듯 말했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내의 칭찬이었다. 아마 그 때 내게 손을 잡힌 걸 의미 깊이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당신과 우리의 아기를 위해서 최선을 다할께-.’ 뭐 그런 결의쯤으로---. 아내의 다소곳한 안색이 그리 짐작 가게 했다. 나는 속으로 ‘다 아버지 덕이지 뭐-.’ 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얼마 안되어서다.

어째보면 두 남녀가 이루어 가는 우리라는 단위의 인생은 단순한 연출의 누적에 의해서 결산되는 것인지 모른다. 약간의 용기와 성의만 있으면 가능한 연출을 우리들은 못하든지 안 한다. 구닥다리 세간에 대한 아내의 애착심은 그 것들이 우리의 인생을 연출한 소도구이기 때문이다.

이제 아내의 애착심을 존중해야지-, 처네 포대기를 보면서 생각했다.

                                       

                                   

                                명태에 관한 추억 / 목 성 균

 

늦가을이나 초겨울이면 우리집 부엌 기둥에 명태 *한 코가 걸려 있었다. 산골 그을음 투성이의 초가집 부엌 기둥에 한 코로 걸린, 다소곳한 명태 한 쌍의 모습은 '천생연분'이란 제목을 달고 싶은 한 폭의 정물화였다.

 

밤이 이슥해서 취기가 도도해진 아버지가 명태 한 코를 들고 와서 마중하는 며느리에게 "옛다"하며 건네주시는 걸 본 적이 있다. 남용하시는 게 아닌가 싶은 아버지의 호기가 참 보기 좋았다.

그날, "아버님, 저녁 진짓상 차릴까요?" 며느리가 묻자 아버지는 "먹었다" 하시며 두루마기를 벗어서 며느리에게 건네주고 사랑으로 들어가셨다. 며느리는 두루마기 자락을 추녀 밑에 걸어 놓은 등불에 비춰 보더니 즉시 우물로 가지고 가서 빨았다. 아버지는 취한 걸음으로 이강들을 건너서, 은고개를 넘어서, 하골 산모랭이를 돌아서 두루마기 앞섶을 휘날리며 오셨을 것이다. 삶의 어느 경지에 취해서 맘껏 활개젓는 아버지의 손에 들려 온 명태 두마리가 얼마나 요동을 쳤으면 두루마기 자락을 다 더럽혔을까.

 

아침에 아버지가 "아가, 두루마기 내 오너라"했을 때, 며느리는 엄한 분부에 차질 없이 대령할 수 있도록 푸새 다림질을 해서 횃대에 걸어 둔 두루마기를 이때다 싶은 마음으로 내다 드렸다. 그 두루마기 자락에 온통 명태 비린내를 칠해 오신 것이다. 그리고 당당히 그 명태를 며느리에게 건네고, 며느리는 공손히 받아서 부엌 기둥에 걸었다. 한 집안 대주(大主)의 권위가 나를 감동시켰다.젊은 날의 어느 늦가을, 갈걷이를 끝내고 어디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막차에서 내린 나는 차부 건너편에 있는 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 섰다. 등피를 잘 닦은 남폿불 아래 놓인 어상자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명태들이 왜 그리 정답던지, 마치 우리 사랑채에 모여 놀다가 제사를 보고 가려고 가지런히 누워 곤하게 등걸잠이 든 마실꾼들 같았다. 그 명태를 한 코 샀다.

 

아버지가 두루마기 자락에 명태 비린내를 묻혀 가지고 왔다고 젊은 자식놈이 그러면 불경(不敬)이다. 옷에 비린내를 묻히지 않으려고 각별히 조심을 해서 명태 한 코를 들고 밤길 십 리를 걸어 집에 오니까 팔이 아팠다. 연만하신 아버지가 취중에 두루마기 자락에 비린내를 묻히지 않고 명태 한 코를 들고 십릿길을 걸어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결코 아버지는 당신의 출입 위상을 위해서 정성을 다한 며느리의 침선(針線)을 소흘히 여기신 건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아내가 명탯국을 끓였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면서 "웬 명태냐?"고 하셨다. 아내가 "애비가 사 왔어요" 하자 아버지는 잠깐 나를 쳐다보더니 "우리집에 나 말고 명태 사 들고 올 사람이 또 있구나!" 하시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그 말씀이 왜 그리 눈물겹게 느껴졌을까. 그날 아침 햇살 가득 찬 안방에서 아버지와 겸상을 한 담백하고 시원한 명탯국 맛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릿하다.

 

내 친구 중에는 명탯국을 안 먹는 자가 있어서 나는 일단 그를 경멸한다. 명태는 맛이 없는 생선이라는 것이다. 생선 맛이야 비린 맛일 터인데, 그놈은 비린 맛을 되게 좋아하는 놈이다. 사실 맨 북어포를 먹어보면 알지만 솜을 씹는 것처럼 맛이 없긴 하다. 그런데 고추장을 찍어 먹으면 숨어 있던 북어살의 구수한 맛이 입안 가득 살아난다. 그래서 말이지만 명태가 맛이 없는 것은 우리 입맛에 순응하기 위한 담백성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명태의 그 담백성을 몰개성적이라고 매도한다면 잘못이다. 생선은 비린 만큼 교만하다. 비린 생선들은 비린 그의 개성을 우선 존중해 주지 않으면 우리가 의도하는 맛을 내주지 않는다. 그러나 명태는 맛에 대한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 들지 않는다. 줏대도 없는 놈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건 줏대가 없는 것이 아니고 줏대없는 그의 본성 자체가 그의 줏대인 것이다.

나는 여태껏 썩은 명태를 보지 못했다. 오늘날의 명태 말고, 냉동 산업과 운송 여건이 불비한 시절, 동해안에서 태산 준령을 넘어 충청도 산읍 5일장의 어물전까지 실려 온 명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당연하다. 명태는 썩지 않는 철에만 잡히기 때문이다. 명태는 바닷물이 섭씨 1도에서 5도가 되어야 산란을 하러 북태평양에서 동해로 떼지어 내려오는데, 그때가 명태의 어획기다. 부패의 철을 비켜서 어획기를 설정한 주체는 어부가 아니라 명태다. 가급적 주검을 부패시키지 않으려는 명태의 의지가 진화된 결과로 보고 싶다. 어차피 그물코에 걸릴 수밖에 없는 회유성(回游性)이 운명일 바에는 주검을 부패시켜 가지고 혐오스러워하는 사람의 손길에 뒤채이며 어물전의 천덕꾸러기가 될 필요는 없다는 게 명태의 결론이었을지 모른다.

 

'썩어도 준치'란 말이 있다. 참 가소롭기 그지없는 말이다. 명태가 들으면 '무슨 소리야, 썩으면 썩은 것이지-'하고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부패 직전의 살코기에서는 글리코겐이 분해되여 젖산을 발생시켜서 구수하고 단맛을 낸다는 요리학적 설명이 있긴 하지만, 그건 숙성을 뜻하는 것이지 부패를 이른 말이 아니다. 자연에서 생선의 숙성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숙성을 보전하는 것은 기술이고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으로 요리사의 몫이지 준치의 몫은 아니다.

썩어도 준치'란 말은 청문회장에 나온 사람의 뻔뻔스러운 변명 같아서 부패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준치는 4월에서 7월까지 부패가 촉진되는 철에 잡힌다. 제 주검의 선도(蘚度)에 대한 대책도 없는 주제에 '썩어도 준치'라니, 명태에 비하면 비천하기 이를 데 없는 본성이다.

 

보릿고개가 준치의 어획기다. 배가 고픈 백성들은 준치의 어획을 고마워하며 먹었으리라. 어쩌다 숙성된 준치를 먹었을지 모르지만 대개 썩은 준치를 먹고 삶의 비애를 개탄하는 마음으로 짐짓 '썩어도 준치'라고 역설적인 감탄을 했을지 모른다. 얼마나 우리들의 슬픈 시대를 단적으로 대변하는 감탄구인가.

 

명태는 무욕으로 일관한 제 생의 담백한 육질을 신선하게 보전해서 사람들에게 보시(布施)했다. 명태는 제 속을 비워 창난젓과 명란젓을 담게 하고 몸뚱이만 바닷가의 덕장에서 바닷바람에 말려 북어가 되고, 대관령 너머 눈벌판의 덕장에서 더덕북어가 되었는데, 알다시피 제상의 좌포(左脯)로 진설되거나, 고사상 떡시루 위에 실타래를 감고 누워 사람들의 국궁재배(鞠躬再拜)를 받는 귀물(貴物)로 받들어졌다.

 

명태를 생각하면 언뜻 늦가을 텃밭의 황토 흙에 하반신을 묻고 상반신을 햇살에 파랗게 드러낸 채 서 있던 청정한 무가 떠오른다. 그 순박무구하고 건강하기가 과년한 산골 큰애기 같은 조선무가 없으면 명태의 담백한 맛을 살려 내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산골 동네 텃밭에서 그 청정한 무가 가으내 담백한 맛의 진수를 보여 주려고 뼈무르면서 명태를 기다렸다. 순박한와 단백한 생선의 만남, 그야말로 산해(山海)가 진미로 만나는 것이다.

문득 아버지의 호기가 그립다. 아침 햇살 가득 차 오르던 산골 초가집 부엌 기둥에 걸려 있던 순박한 명태 한 코가 집안 대주의 권위로 바라보이던 시절이 그립다.

 

*한 코 : 충북 괴산지방에서는 명태 두 마리를 한 쌍으로 해서 한 코'라고 말함

 

                                  생명 / 목 성 균

 

자고 나니까 링거액을 주사한 오른팔 손등이 소복하게 부어있다. 링거액이 샌 모양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멀겋게 부운 아버지의 손, 중풍이 오신 고통스러운 말년의 손을 내가 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자지간의 생명의 바통인가. 나는 아버지의 말년, 그 손을 잡고 병고를 위로해 드리곤 했었다.

 

아버지의 손은 퍽 크다. 내 손은 아버지의 손에 비하면 너무 병약하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숭배한다. 사랑한다. 어쩌면 지금 내 손이 아버지의 손과 똑같을까? 생명은 닮는다는 뜻일까?

 

고등학교 몇 학년 때인지 가정실습(家庭實習) 때다. 집에 왔다가 모내기를 돕게 되었다. 뒷골 천수답에 모내기를 했다. 나도 열심히 모를 심었다. 식구들과 일꾼을 몇을 얻어가지고 모를 심었다. 아버지는 며칠 동안 빗물을 잡아서 논을 삶느라고 고삐에 넓적다리가 스쳐서 피가 날 정도였다.

 

우리 농사 중 파종의 대미는 천수답 모내기를 끝마치는 것이다. 힘들고 의미 있는 과정이다. 그날 점심때, 우리는 오동나무 그늘에 점심 들밥을 차려놓고 먹었다. 신록이 우거진 그늘에서 뻐꾸기가 낭자하게 울었다. 소들은 모를 심느라고 일으켜 놓은 구정물로 엉덩이에 흙덩이가 엉겨 붙은 채 우리 옆 오동나무 그늘 아래서 풀을 어귀적 어귀적 씹으며 흘금흘금 오월 강산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우리 점심 차림은 너무 소박했다. 햇보리 밥과 묵은쌀이 반씩 섞인 밥에다 상추 겉절이, 배추 겉절이, 마늘잎을 넣고 조린 꽁치가 전부였다. 그리고 된장, 지금도 눈에 선한 황금색 튀장(토장) 한탕기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그 날의 점심 맛을 내준 것은 마늘잎 꽁치조림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입맛을 내준 것은 황금색 튀장이었던 듯하다. 아버지는 상추 이파리 서너 장에 밥을 두어 숟갈 푹 떠서 담고 그 황금색 튀장을 반 숟갈 듬뿍 얹어 꾸기 꾸기 해서 입에 넣으셨다.

 

아버지가 상추쌈을 입에 넣고 눈을 끔뻑하면 목울대가 아래위로 오르내렸다. 앞산을 건너다보며 볼이 메어지게 상추쌈을 잡숫던 중년 농부의 눈, 그 눈에 뻐꾸기 우는 녹음 방창한 산이 한 귀퉁이씩 그야말로 게눈 감춰지듯 하는 것이었다. 그 쌈밥을 잡고 있던 두 손이 링거에 손등이 통통히 부은 지금의 내 손과 똑같았다.

 

그 후 가끔 뒷골 천수답에 모내기를 하면서 아버지의 손등을 떠올려보곤 했지만, 실상 아버지 손등을 보고 천수답 모내기 점심밥 먹던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점심을 먹고 어디론가 가셨던 아버지는 잠시 후 싱싱한 칡잎에 소복하게 산딸기를 따 오셨다. 디저트를 구해 오신 것이다. 쌈밥처럼 두 손으로 잡고 들고 오신 것이다.

 

“받아라.”

 

나는 아버지의 손등까지 싸잡아 들었다.

 

아버지의 손은 육감적이고 내 손은 턱없이 왜소하다. 전혀 닮지 않은 손이 운명의 때에 보니 닮아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닮아 있다.

 

가장 수필다운 수필을 쓰는 사람, 목성균 수필 전집!

 

목성균의 유고 수필 전집 『누비처네』. 57세라는 늦깎이로 등단해 현대수필문학상을 수상하고, 갑작스런 발병으로 타계한 목성균의 수필을 하나로 엮었다. 죽을 때까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후 그의 영향을 받은 후배들이 양성될 정도로 뒤늦게 평가받은 수필가인 목성균이 <명태에 관한 추억> 이후 작성한 원고와 그 작품집에 실리지 않았던 원고를 하나로 모아 소개한다. 목성균은 시적 언어 구사력과 탄탄한 구성력으로 평범한 것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묵묵히 자연의 순리와 질서를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의 돈독한 삶을 그려내 감동을 전한다. 이 책은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인간적 체취가 있었던 지난 세월을 애정 어린 필체로 그려낸다.

 

수필계의 기형도라 불리는 목성균은 대학도 졸업하지 못하고, 이미 퇴직 후 다 늙어서 등단한 작가였다. 그 누구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으며 출신 잡지마저도 철저히 그를 외면했다. 반응 없는 글쓰기에 지쳐 그가 문학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쯤 그는 <옹기와 사기>라는 작품으로 폭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에세이스트 김종완이 가장 안심하고 추천할 수 있는 수필가가 목성균이라고 말할 정도로 목성균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를 진솔하게 전한다. 특히 작고 하찮아 보이지만 숨겨진 의미가 있는 것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삶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백하게 풀어낸다.

[출처] 생명 / 목성균|작성자 행복한 루치아

 

                      억새의 이미지 / 목 성 균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녘은 농부의 열망이 이삭처럼 널려 있기 때문인지 막 저녁 밥상이 들어간 부엌같이 끓이고 자친 온기가 남아 있다. 억새는 그 고즈넉할 뿐 쓸쓸하지는 않은 시절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들꽃이다.

 

억새꽃은 석양을 등지고 서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그래서 그 자리가 억새의 자리처럼 당연스럽다.

 

저녁 바람 이는 동구 밖 산모퉁이를 돌아들다가 표표히 나부끼는 하얀 억새꽃을 보면 나는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춘다. 저무는 역광에 윤택한 빛깔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억새의 도열이 나를 사열관처럼 맞이하기 때문이다. 아, 이 무슨 과분한 열병식인가! 나는 곧 제병관의 인도를 받으며 등장할 사열관을 앞질러 잘못 들어선 열병식장의 남루한 귀환병처럼 돌아서고 싶은데 억새들이 입을 모아 환성을 지른다.

 

“만세-. 수고하셨습니다.”

 

쥐뿔이나 무슨 수고를 했길래, 언제 한 번인들 나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분발해 본 적도 없으면서 공연히 격앙(激昻) 되어서 억새를 주목하고 걸음을 멈춘다.

 

억새는 우리 땅의 여분을 차지하고 자생하는 볏과의 다년생 풀이다. 나무도 못 자라는 바람 센 산정 분지, 뙈기밭 두둑, 등 너머 마을로 가는 길섶, 무덤 많은 야산 발치, 나루터 모래 언덕 같은데 군락을 이루고 자란다. 억새는 자생 여건이 나쁜 버려진 자투리땅에 뿌리를 나리고 씩씩하고 모질게 자라서 늦가을 황량한 산야를 하얗게 빛내 준다.

 

억새는 여름날 꼴머슴의 낫질에 호락호락 당하는 나약한 풀이 아니다. 억새를 베려고 낫을 댔다가 섬뜩해서 보면 어느새 억새를 움켜쥔 손가락이 베어져서 피가 난다. 억새 이파리는 소목장(小木匠)의 작은 톱같이 자디잔 날을 날카롭게 세우고 자신의 의지를 위협하는 힘에 대해서는 완강하게 저항을 한다. 억새는 이름처럼 억세고 기가 살아 있는 풀이다.

 

늦가을 석양빛을 등지고 서서 표표히 흔들리는 억새꽃의 담백한 광휘(光輝)를 보면 여한 없는 한 생애의 마지막 빛남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늦가을 석양 무렵 취기(醉氣)가 도도한 촌노(村老)들이 빈 들길에 죽 늘어서서 하얗게 가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뉘 잔칫집에서 파하고 돌아가는 길이다. 가는 건지 서 있는 건지 한담을 하며 느릿느릿 움직인다. 그러다가 마침내 언성이 높아지고 삿대질까지 오가는 언쟁으로 치닫는다. 대개 별것도 아닌 인생잡사(人生雜事)의 견해차를 가지고 다투는 것이다. 삶의 방식에 대한 고집, 작고 필수적이었던 인생관을 주장하는 노경(老境)의 굽힐 수 없는 자존심이 억새꽃처럼 하얗다. 겨우 일행의 중재로 다툼을 거두고 조금 가다가 일행의 다른 촌노들이 또 다른 견해차로 언쟁을 하면서 행렬을 멈춘다. 그렇게 저무는 들길을 유유자적 걸어가는 촌노들, 갓은 비딱하게 기울었고 두루마기 자락은 흩어져서 저녁 바람에 서걱댄다. 그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 나는 목이 메여 속으로 ‘어르신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수고를 한 것은 그 분네들이다. 간구하고 고난스러운 시대를 살아서 오늘에 이르게 해주신 어른들이다. 억새는 그 분들을 위해서 열병 대열을 짓고 있는 것이다. 그에 앞서 내가 지나가면서 목이 메이는 까닭은 억새의 열병 자세의 진실성에 미치지 못하는 부실한 내 삶에 대한 반성이다.

 

늦가을 강화도 해안 단애에 서 있는 억새를 본 적이 있다. 호말 떼처럼 불어닥치는 강한 해풍에 숨이 차는 듯 서걱이면서, 쓰러지는가 싶다가도 바람이 지치면 다시 일어서던 억새-. 그 모습은 마치 흰 중의적삼을 입은 개항기의 민병들이 마침내 무너질 필연의 보루(堡壘)에서 끝까지 버티던 가긍한 기개 같아 보였다. 막을 수 없는 외세를 막아 보려는 어리석은 짓이 자랑스러운 것은 그 게 민족혼이기 때문이다. 잘났든 못났든 오늘에 대한 과거가 고맙지 않은가. 바람 부는 수난의 보루에 표표히 나부끼는 억새가 흰옷 입은 어른들의 감투정신 같아 보여서 눈물겨웠다.

 

억새꽃의 흰빛은 냉담(冷淡)의 빛이 아니다. 내색은 않지만 참고 견뎌 낸 자신을 고마워하는 조선 여인들의 마음이 깃들인, 메밀짚을 태워서 내린 잿물에 바래고 또 바랜 무명 피륙 같은 흰빛이다. 가을 햇빛이 쏟아지는 강변 자갈밭에 길게 펼쳐 널은 흰 무명필을 본 사람은 생각했을 것이다. 거기에 무명필이 널리기까지의 길쌈 공정과 앞으로 홍두깨 다듬이질을 거쳐 옷이 기워지기까지 남은 침선공정(針線工程)이 얼마나 여인네들의 노고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를. 순전히 남정네들의 자긍심을 남루하게 둘 수 없는 여인의 마음, 억새꽃 빛깔에서는 그런 마음씨가 느껴진다.

 

가을밤 달빛 아래서 사운대는 억새를 보면 발갛게 등잔불이 밝혀진 방문의 창호지를 울리며 밤을 지새는 다듬이질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서 귀를 기울이게 된다. 고부간에, 동서간에, 혹은 시올케 간에 마주 앉아서 맞다듬이질 하는 소리는 더없이 그윽하고 맑다. 자지러지듯 빠르게, 멎는 듯 느리게, 크게, 작게, 한없이 이어지는 맑고 애잔한 리듬, 그것은 마음이 맞아야 낼 수 있는 소리다. 혼연일체로 마주 앉아서 시집살이의 애환과 갈등을 비로소 화해하는 소리다. 그 소리를 들으면 동구 밖에서 억새가 달빛 아래 사운대며 서 있는 것이 눈에 선이 보이는 것이다.

 

이제는 흰옷 입은 노인들의 권위 있는 행렬도 볼 수 없고 가을 달밤에 들려오는 다듬이질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가난하면서 가난을 가난으로 여길 줄도 모르고 성의껏 살던 삶이 사라져 버린 우리 땅의 여분을 차지하고 억새만 홀로 피어서 어쩌자고 저리도 고결스러운지-.

 

                            불영사佛影寺에서 / 목 성 균

 

태백산맥을 넘어 불영사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늦가을 짧은 해가 정수리를 넘어가 있었다. 깊어진 가을, 산사의 정취가 더욱 고즈넉한 때에 맞추어 도착했다.

 

스산한 바람에 집착執着처럼 매달려 있던 마지막 잎새가 지는 경내境內를 조용히 움직이는 여승들의 모습, 연못에 부처님의 모습이 비치는 불영사를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결혼 30주년 기념 여행길에 들러 보기로 했던 것이다. 애마愛馬 '엘란트라'를 주차장 한 녘에 멈춰 세우자 영감이 한 분 달려와서 주차료를 내라고 한다. 주차료를 주면서 농담을 건네 보았다.

 

"영감님, 말에게 여물 한 바가지만 주세요."

 

영감이 무슨 소린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다. 먼 길을 달려와서 마방馬房에 드는 지친 말에게 우선 여물바가지와 물을 주어서 원기를 회복토록 하는 것이 옛날 마방 주인의 인심이었다. 국토의 등성마루를 아무런 가탈을 부리지 않고 숨을 고르게 쉬며 달려 넘어온 내 차가 기계라기보다 꼭 충직한 말 같아서 해본 농담인데, 관광지 인심에 절은 영감이 옛날 마방 주인처럼 내 말귀를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나의 취미는 여행이다. 우리 생활 형편으로는 과분한 취미여서 아내에게 늘 마음고생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여행이 하고 싶어지면 짐짓 '삶이란 엄청 환멸스럽다'는 듯한 침울한 표정을 짓고 묵비권을 행사한다. 경지에 이른 내 '팬터마임'에 아내는 참지 못하고 "도졌군, 또 병 도졌어…." 하며 음흉한 계략인 줄 아는지 모르는지 가난한 여비를 마련해 주곤 했다.

 

물론 아내를 동반자로 하는 여행이 나의 희망이지만, 아내는 둥지를 못 떠나는 어미 새처럼 죽지로 삶을 끌어안고 꼼짝하지 않았다. 그것은 남편의 무능을 보완하려는 반려자의 본능일 터인데 나는 아내의 천성이 그러니 어쩔 도리가 없다고 자기합리화를 하며 늘 혼자 여행을 떠났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아내를 강압적으로 내 옆자리에 태우고 여행을 떠났다. 하기는 아내가 내 강압에 굴복한 것이 아니고 결혼 30주년 기념이라는 여행 의미에 여자 마음이 어쩔 수 없이 움직이고 만 것인지 모른다.

 

불영사 입구의 아름다운 계곡에는 유감스럽게도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 있었다. 그 아름다운 냇물에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어야 한다. 바랑을 진 여승의 조그만 몸이 늦가을 엷은 햇살 아래 징검다리를 조심스럽게 밟고 건너가는 탈속적脫俗的인 산수화 한 폭을 콘크리트다리가 깔고 앉아버렸다. 아쉬움이 남는다.

 

콘크리트다리 위에 서서 다리 아래를 본다. 냇물이 마치 잠투정하는 어린 것이 어미의 젖을 물고 소롯이 잠들 때처럼 옹알옹알하며 여울목을 넘어 교각 아래 모여 정식靜息한다. 물속의 물고기들도 지느러미를 접고 조용히 물에 떠 있다. 냇물도 가을의 깊이에 따라 여위어 가는 듯했다. 그 거울 같은 수면에 아내와 내 얼굴이 나란히 비쳤다.

 

"우리 약혼 사진을 보는 것 같은데…."

 

내 말에 아내가 감개무량한 미소를 지었다. 30년 전, 시골 사진관에서 사진사의 의도적인 농담에 수줍게 웃는 순간이 찍힌 빛바랜 약혼사진 생각이 나서 한 말이다. 그러나 수면에 나란히 비친 우리의 두 얼굴, 이미 많은 세월의 흔적을 깊이 새겨 놓았다. 어차피 결혼 30주년 기념사진에나 걸맞은 얼굴이었다.

 

다리를 건너면 길은 숲속으로 나 있다. 조락이 끝난 숲은 깊이 가라앉아 적요한데, 나목들이 다가서는 겨울 앞에 내실內實의 무게로 담연히 서 있다. 아직 겨울잠에 들지 못한 다람쥐의 바쁜 움직임이 숲의 적요를 가볍게 흔들고 어디론지 간 뒤, 더 깊어진 숲의 적요에 나는 문득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아내는 익숙지 않은 짓을 당하자 숫처녀처럼 흠칫하며 "누가 봐요." 했으나 손을 빼지는 않고 대신 걸음걸이만 다소곳해졌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불영사의 산문이랄 수 있는 둔덕진 숲길을 넘어서 호젓한 산기슭을 따라 내리막길을 걸었다. 손을 잡힌 채 다소곳이 따라오는 아내가 마치 30년 전 약혼 사진을 찍고 돌아오던 호젓한 산길에서처럼 온순했다. 어느 일요일, 애들을 데리고 대문에 페인트칠을 하라고 자백이 깨지는 소리를 지르던 중년을 넘긴 여인의 꺾인 일면은 흔적도 없다. 여행은 사람을 이렇게 순정純正하게 만드는 것인가.

 

절은 나지막하게 나려 앉으며 불영계곡의 물굽이를 틀어 놓고 멎은 산자락에 안겨 있었다. 규모는 크지 않고 여염집의 아낙네처럼 소박하고 안존한 모습이 여승의 도량다울 뿐이었다.

 

절 앞에 불영사의 이름을 낳은 연못이 있었다. 부처의 모습이 비친다는 연못도 가을 깊이 가라앉아서 면경面鏡같이 맑다. 연못 저편에 내외간인 듯싶은 초로의 한 쌍이 손을 잡고 불영佛影을 찾는지 열심히 연못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절 구경부터 하기로 했다. 절 마당 들머리에 불사를 위한 시주를 받는 접수대가 차려져 있고, 어린 여승 둘이 엷은 가을 햇살 아래 서서 시주를 받고 있었다. 우리는 여승 앞에 섰다. 여승이 합장을 하고 맞아 준다. 조그만 시주를 하고 시주록에 이름을 적었다.

 

두 여승은 앳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볼그레한 볼, 도톰한 붉은 입술, 크고 선연한 흰자위와 까만 눈동자, 가늘고 긴 목덜미의 뽀얀 살빛, 처녀성이 눈부신 아름다운 용모였다. 배코 친 파란 머리와 헐렁한 잿빛 승복이 나의 속심俗心을 공연히 안타깝게 할 뿐, 정작 두 여승은 여느 소녀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밝게 웃고 새처럼 맑은 목소리로 지저귀고 있었다. 절을 돌아보았다. 조촐한 절이었다. 대웅전 중창 불사로 절 마당이 어질러져 있다. 오래된 장맛처럼 깊은 절 집의 여운이 울어 나게 고색창연한 대로 놔두지 않고 절 재정이 좀 나아졌다고 참을성 없이 불사를 벌이는 게 아닌지-.

 

여승의 깊은 인상 때문일까. 고요한 승방 쪽을 자꾸만 기웃거렸다. 시주대 앞에 서 있는 여승들의 방은 어느 것일까. 방에 경대鏡臺는 있을까. 자신의 용모에 대한 애착도 홀연히 버리는 경지를 향해서 용맹정진할 어린 비구니에 대한 속인의 아쉬움이 가시지를 않는다. 화장은 안 해도 로션 정도는 바를 것 아닌가. 공연히 쓸데없는 걱정을 하다가 대웅전을 향해 합장하고 절을 물러 나왔다.

 

나올 때 보니 두 여승은 불경을 외는지 염불을 하는지 삼매경에 들어 있었다. 얼굴이 홍시처럼 익어 있는데 법열法悅의 상기上氣인지 노을빛이 물든 것인지 신비스럽기 그지없었다. 어린 여승들이 천진한 소녀의 세계와 부처의 세계를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여승 곁을 지나 왔다. 마치 대웅전 본존 불상 앞을 지나는 마음 같았다. 아내도 내 심정 같은지 발끝으로 따라왔다.

 

절 앞의 연못까지 와서 나는 환상을 본 것 아닌가 하고 절 쪽을 뒤돌아보았다. 여승은 우리가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새 절 안으로 들어가고 거기에 없었다.

 

연못의 벤치에는 초로의 부부가 아직 손을 잡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인생을 관조하는 듯한 여유 있는 모습과 다정다감한 내외간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우리는 그들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방해하기 않기 위해서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서서 연못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연못을 들여다보아도 부처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불영은 속진俗塵이 묻은 중생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 내 눈에는 안 보이더라도 아내의 눈에는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었으나, 아내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내가 비록 불심은 없는 사람이지만 크게 욕심부리지 않고, 남에게 못할 짓 안 하고 산 만큼 부처님은 잠시 현신現身을 해주셔도 무방할 것 같은데 부처님은 함부로 현신을 하지 않으시는 모양이었다.

 

산사에 어둠이 내리려고 했다. 초로의 신사 내외가 산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산골은 기습적으로 어두워진다. 절의 외등이 불을 밝히면 절의 모습이 막이 오른 무대의 세트처럼 생경한 모습으로 되살아나서, 승방 문에 등잔불이 밝혀질 것이라는 내 고답적인 절 이미지를 '착각하지 마-.' 하듯 가차없이 지워 버릴 것이다. 나는 아내를 이끌고 외등이 밝혀지기 전에 절을 떠났다. 적막해지는 절에 남는 그 두 여승이 혹시 절밖에 나와 서 있나 싶어 돌아보며….

 

우리 앞에 저만치 그 초로의 신사와 부인이 손을 잡고 어두워지는 고요한 산길을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의 발걸음이 더 빠른 듯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나는 발걸음을 늦추었다. 그들을 추월함으로 피차간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깨어지는 불편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깊은 가을의 어두워진 주차장에서 말처럼 내 차가 적적하게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차 곁으로 갔을 때, 저쪽 차의 사람이 우리 차 쪽으로 다가왔다. 먼저 도착한 그 초로의 신사 내외였다. 우리가 뒤따라 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아닌가 싶었다. "안녕하세요. 절에서 먼 빛으로 두 분을 지켜보았습니다. 다정다감한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별 말씀을요. 두 분의 모습이야말로 참 보기 좋았습니다."

 

아내가 솔직하게 말했다.

 

"준비해 온 커피가 있는데, 우리 차로 가서 같이 드실까요?"

 

"네, 감사합니다…."

 

나는 그분들의 친절이 부담스러웠는데 아내가 얼른 친절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그쪽 차로 가서 보온병에 준비해 온 커피를 그분들과 함께 마셨다. 어두운 주차장에는 차가 몇 대 없었다. 주차장이 너무 넓어 보였다. 가을이 깊긴 깊구나 싶었다. 주차료를 받던 마방 주인도 가고 없다.

 

"우리는 백암온천으로 가는데, 가을이 깊어서 그런지, 동행이 그립네요. 방향이 같으시면 동행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쪽 남자의 말이었다.

 

나는 깊은 감동으로 그분들을 바라보았다. 초면에 격의 없이 사람을 대할 수 있는 이분들의 인품 앞에 나는 망연茫然했다. 이분들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한, 거리 유지가 실은 내 고즈넉함을 방해받지 않으려는 인색한 거리였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에 주눅이 들었다. 단아한 인품이 엿보이는 그분들의 모습이 열심히 후학을 기르고 퇴직한 선생님 내외 같아 보였다. 사람을 좋아하는 순수한 인간미와 기탄없는 마음의 자유, 이분들과 동행을 하면 좋은 여행을 배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혼 30주년 기념여행을 수학여행으로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여행이 인품만큼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내가 이분들의 격에 맞지 않을 경우 우리 피차에 불편이 될 뿐, 좋은 여행 동반자는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백암온천 한번 가 본 곳이라서 덕구온천으로 갈 계획입니다."

 

"그러세요. 동행하고 싶었는데, 유감입니다. 그럼 좋은 여행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들이 먼저 출발하고 우리도 따라서 출발했다. 앞차의 빨간 미등이 따라오라는 선도의 눈짓 같았으나, 울진 외곽 삼거리에서 그들의 차는 백암온천 쪽으로 우회전을 하고 우리 차는 덕구온천 쪽으로 좌회전을 했다.

 

오늘밤은 덕구온천에서 자고, 내일 새벽은 동해의 어느 포구에서 밤바다의 오징어를 퍼담듯 잡아오는 어부의 자만심이 어떤 건지, 일출처럼 추켜세운 만선의 깃발을 보리라. 그리고 숙면한 포구 아낙네들의 목청이 생선처럼 퍼덕이는 어판장 모퉁이 좌판 앞에 앉아서 산 오징어 회도 먹을 것이다.

 

                             조선낫과 왜낫 / 목 성 균

 

조선낫과 왜낫이 낫이라는 인식만으로 동류인식(同類認識)될 수는 없다. 꼭 국적이 다르기 때문이라기보다 외양처럼 판이한 그 성품 때문이다. ‘조선낫은 진중하고 왜낫은 경박하다.’ 조선낫에 대한 편향적 지적일까. ‘조선낫은 미욱스럽고 왜낫은 지능적이다.’ 그리 말하니 조선낫을 천하게 보는 것 같아서 싫다. 그러면 상식적 사실대로 말하자. '조선낫은 무겁고 왜낫은 가볍다.' 사용의 효율성에 착안한 연장의 상반된 차이가 국민성 때문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조선낫은 대장간에서 대장장이가 무쇠를 녹여서 벼려 내는 수제품이다. 대장장이의 솜씨에 따라 낫의 모양이나 성질이 가지각색이다. 모양새가 뭉툭하든가, 넓적하든가, 날이 좀 무르든가, 좀 강하든가 대장장이의 이력과 성격을 물려받아서 개성적이다. 조선낫은 장인 정신이 깃든 물건이다. 그래서 내 것이 되면 내 식구처럼 애착이 간다.

 

왜낫은 공산품이다. 주물공장에서 기계의 자동공정으로 만들어지는 획일적인 제품이다. 대장장이의 정신이나 애착의 망치질이나 담금질 같은 손맛은 전혀 들이지 않았다. 몰개성적이다. 김 서방네 왜낫이나 박 서방네 왜낫이나 똑같다.

 

조선낫은 베고 찍는데 같이 쓰이지만 왜낫은 베는데 밖에는 쓸 수 없다. 조선낫은 베는 것은 물론 나무도 일격에 목질부(木質部) 깊숙이 찍는 우직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가벼워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턱없이 무거우면 다루기 불편하다. 마침맞은 낫의 체중, 조선 사람 체신만 하다. 낫날은 강하지도 무르지도 않은 중용(中庸)의 품성을 지녀야 한다. 나무를 찍을 때 날이 강하면 한 낫질에 이가 빠지고 무르면 욱는다. 낫날은 사냥한 동물의 숨통을 끊는 호랑이의 어금니같이 지긋이 파고드는 끈질기고 굴함 없는 힘과 가격(加擊)의 저항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 날을 세울 수 있는 것은 대장장이라고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장인의 경지에 이른 대장장이나 할 수 있다.

 

전에 우리 동네 사람들은 낫은 반드시 새벽밥을 해 먹고 이화령 너머 문경장에 가서 벼려 왔다. 연풍장에도 대장간이 있었는데 대장장이가 젊었다. 선친이 작고하고 가업을 물려받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중용의 낫날을 세우기에는 아직 미숙했던지, 굳이 낫은 문경장의 대장장이가 잘 벼린다고 인권(引勸)하고 사양했기 때문이다. 그 겸양의 미덕이 장인이 될 자질일 수 있다. 조선낫이 나무를 찍는다고 왜낫도 나무를 찍는다면 경거망동이다. 왜낫은 경박한 체신에 팩하는 성미만 살아서 가격했을 때 저항 충격을 받아들이는 도량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낫으로 나무를 내려치면 마치 방정맞은 개가 금방 삶아낸 호박을 덥석 물었을 때처럼 낫날의 이빨이 몽땅 빠지고 만다. 왜낫은 처음부터 나무의 절단을 고려한 바가 없다. 잘 벨 수 있는 날카로운 날에만 주안점을 두었다. 그래서 농작물 거둠질에 제격이다. 날의 냉혹성, 왜낫을 보면 찰과상이 우려된다.

 

왜낫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일본 강점기에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이주해 온 일본 농민들이 들고 왔을 것이다. 그리 보아서 그런지 조선낫은 흰 무명 중위적삼을 입고 짚신을 신은 조선 농민 같고, 왜낫은 유카타를 입고 게다를 신은 이주 농민 같다.

 

헛간 시렁에 조선낫과 왜낫이 뒤섞여 있었다.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모습 같아서 꼴 보기 싫었다. 나는 굳이 조선낫과 왜낫을 격리해 놓곤 했는데 며칠 후에 보면 다시 뒤섞여 있었다. 내 배타적 감정과 무관하게 왜낫의 편리성은 이미 토착화되어 있었다.

 

전에 우리 집에 말수가 없는 머슴이 있었다. 그는 가볍고 잘 드는 왜낫을 안 썼다. 벼를 벨 때 다들 왜낫을 들려고 덤비지만, 그는 “왜낫은 헛개비 같아서 싫어. 손아귀에 쥐는 맛이 있어야지” 하며 투박하고 무거운 조선낫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낫질이 거칠다면서 벼를 베어 나가면 다른 사람 배는 베었다. 그의 말대로 낫질이 거칠어서 이삭을 흘리고 벼 그루터기의 높낮이도 일정치 않았지만 한다는 장정의 두 몫은 베었다. 왜낫을 든 장정들이 질투를 느끼고 "그렇게 거친 낫질을 하면 나도 그만큼 벨 수 있어" 하며 덤볐지만 당나귀 호말(胡馬) 따라가기지. 어림도 없었다. 우리 머슴한테 덤빈 장정들이 “대체 낫질 어떻게 하는겨? 맘대로 안 되네.” 줄항복을 하고 새삼스럽게 우리 머슴 낫질 하는 걸 눈여겨보는 것이었다. 그러면 우리 머슴은 겸손하게 “낫 힘이여” 했다.

 

맞는 말이다. 조선낫의 힘은 찍는 데만 쓰는 것이 아니다. 베는 데도 힘을 발휘했다. 왜낫은 순전히 날로 베지만 조선낫은 힘으로 벤다. 벼를 벨 때 두 포기씩 모아 쥐고 베는 게 보통이나 장정들은 세 포기씩 모아 쥐고 벤다. 조선낫으로 하면 ‘투,투,투’하는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한 낫질에 세 포기가 수월하게 베어지는데 왜낫으로 베면 ‘착, 착’하는 날카로운 두 음절을 내고 세 음절은 침묵으로 버티기 일쑤다. 왜낫의 경박한 체신에는 가속력을 발휘할 근력이 모자랐다. 그럼 얼른 자동차 기어 변속하듯 새로운 힘을 보태 주어야 ‘착’ 하는 나머지 소리를 내며 세 번째 포기가 베어졌다. ‘착,착,(-) 착’이다. ‘투.투,투’에 비해서 리드미컬하지 못했다. 낫질의 리드미컬한 진행과 그렇지 못한 진행이 일의 간격을 벌려 놓았다. 조선낫 같은 사람이 조선낫을 쓸 줄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해 늦가을 해거름에 신태인에서 부안 쪽으로 가다가 동진강 둑에 서서 해가 뉘엿뉘엿 지는 휴면기에 든 일망무제의 흰 들판을 보았다. 동학군의 함성과 선봉에 선 녹두장군의 위용이 노을이 불타는 지평선에 아른거리며 내 가슴에 불을 질렀다. 국모가 시해(弑害)되고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토지조사를 하는 일본인들의 측량 말뚝이 들판에 꽂히고, 동양 척식회사가 들어오는 등 밀물처럼 밀어닥치는 일본 세력 앞에 속절없이 침몰되었을 들판의 가없는 넓이가 저무는 강둑에 서 있는 나를 슬프게 했다.

 

태인과 신태인은 이 들판 외곽에 자리 잡은 두 소읍(小邑)이다. 문득 ‘태인은 조선낫이고 신태인은 왜낫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척회사에서 이 들판을 식민 자본으로 헐값 매입해서 일본 이주민에게 되팔았다. 영세농들은 모두 일본 이주민의 소작인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생산한 쌀을 전부 일본으로 실어갔다. 쌀을 실어가기 위해서 호남선 연변에 역이 생기고 역 앞에 역촌이 생기므로 기왕의 태인과 구별해서 신태인이라고 이름 지었을 것이다. 태인에는 들판을 뺏긴 조선낫같이 우직한 조선 사람들이 물 떨어진 물꼬의 물고기처럼 모여 살고, 신태인은 왜낫 같은 일본 이주민들이 득의만면(得意滿面) 해서 신 거주지를 형성했으리라.

 

도대체 이 넓은 들판의 벼를 무슨 수로 베었는지 궁금했다. 지금이야 콤바인으로 베지만 그 시대에는 순전히 낫으로 베었을 것이다. 조선낫으로 베었을까, 왜낫으로 베었을까. 조선 사람들은 벼를 베고 일본이 주민들은 논둑에서 감독을 했을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우리 머슴처럼 조선낫으로 벼를 베려고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본이 주민들은 “이 무지한 조센징아. 가볍고 잘 드는 닛폰 낫이노로 베라”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조선낫이고 왜낫이고 손목에 신명이 빠진 농군들이 무슨 수로 낫질할 힘이 났으랴. 낫의 무게도 잊어버리고 휘몰아치는 낫질은 논둑에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농기를 꽂아놓고 농악을 울리며 노동의 기쁨을 고양할 때나 할 수 있다. 일은 신명으로 하는 것이다.

 

조선낫을 보면 나운규가 주연한 영화 ‘아리랑’의 주인공 미치광이 영진이가 생각난다. 영진이가 일본 경찰관의 앞잡이인 악덕 지주 오기호를 응징할 때 휘두른 낫이 조선낫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조선낫을 보면 과묵한 참을성의 폭발력이 느껴져서 나는 지긋이 낫자루를 잡고 ‘참아, 부디 참아’ 하는 맘이 들곤 했다.

 

1920년에서 1930년 사이, 동척 회사의 수탈에 항거해서 독립운동 성격인 소작쟁의가 발생했을 때, 농민들의 무기는 조선낫이었을 것이다. 왜낫이었으면 “어허, 사람이노 다친다"면서 일본 이주민들은 대수롭지 않은 듯 슬금슬금 피했겠지만 조선낫 앞에서는 혼비백산해서 “사람이노 살려” 하며 줄행랑을 쳤을 것 같다. 과묵한 참을성의 폭발과 경박한 적의가 파르르하는 것은 위협의 느낌이 사뭇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조선낫을 좋아하는 것은 물론 감정적인 편견이다. 조선낫과 왜낫이 우리 헛간 시렁 위에 뒤섞여 있는 걸 내선일체의 모습으로 볼 게 아니라 왜낫의 귀화(歸化) 모습으로 보는 게 올바른 투시법인지 모른다. ‘무겁다’의 반대말이 ‘가볍다’라면 조선낫과 왜낫은 상호보완의 여지가 있다. 낫이라는 동류로 인식하는 것이 타당하지 배타적인 생각이나 하는 것은 시대착오다. 그렇다 하더라도 싫은 건 싫은 거다. 나는 경박하고 냉혹하고 이지적인 날을 세운 연장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베는 데 쓰이는 것 자체가 싫다. 국모를 시해한 닛본도의 가차 없는 날에 대한 증오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존재와 이름 / 목 성 균

 

모든 존재에는 이름이 있다. 사람의 발길에 짓밟히는 길섶의 질경이에서부터 여름 황혼녘에 먼지처럼 나는 하루살이와 같은 미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은 물론, 크고 작은 수많은 산봉우리, 사람이 살지 않는 외로운 섬들, 깊은 밤하늘의 별 떨기와 같은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에는 이름이 있다.

 

하물며 사람임에랴. 그런데 사람에게 이름이 없다니-! 나는 젊어서 사방사업 현장 주임 노릇을 한 적이 있다. 민둥산에 수풀과 나무를 심는 일인데 인근 두메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일을 했다. 그 출력 인부의 노임을 주기 위해서 사역 부를 작성할 때 주민등록증을 대조하면서 이름 없는 사람을 더러 발견했다.

 

남자의 경우에는 이름이 없는 사람은 없지만 여자들, 특히 나이 든 노인에게서 이름이 없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여자들의 이름은 대개 무성의하게 작명되어 있었다. 좀 잘 지었다는 이름도 대개 끝에 아들자(子) 자를 붙여서 영자니, 순자니, 복자니 하는 아들을 바란 심정을 솔직하게 들어낸 이름들이 많았다. 또 언년이니 섭섭이니 끝예니 하는, 산고가 끝나고 고고한 울음소리가 울린 안방 산모 곁에서 시어머니가 가랑이 사이가 밋밋한 갓난것을 들여다보고 서운한 나머지 한 말이 그냥 이름이 된 경우도 많았다. 남존여비 사상이 사회질서를 지배하던 유교적 시대상이 잘 반영된 여자의 이름들이다. 그래도 천하든지 말든지 이름 두 자를 얻은 여자들은 존재를 인정받은 것이라 다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숫제 이름도 없는 여자들도 있었다. 박씨니 김씨니 홍씨니 하는 성씨 밑에 그냥 씨 자만 붙어 있는 여자들, 대개 살날이 조만간 끝날 노인들 중에서 가끔 눈에 띄었는데 바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태어난 죄로 길섶의 질경이처럼 한평생을 살았을 그분의 생애가 눈에 선해서 일을 시키기가 죄송할 따름이었다.

 

면사무소 호적 서기 말에 의하면 그런 이름의 내력은 왜정시대에 호적을 처음 만들며 이름이 없는 여자들을 호적 서기가 사무 편의적으로 적어 넣은 것이라고 한다. 남에 이름을 함부로 적어 넣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공란으로 둘 수도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성씨 밑에 씨자만 적어 넣은 것이다. 그걸 호적 서기의 무성의라고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것은 유교적 관례였다. 묘비에도 보면 비록 정경부인이라 할지라도 여자는 '貞敬夫人 延安 李氏之墓'라고 성 밑에 씨 자만 적혀 있는 반면 남자의 경우에는 '領議政 鄭公 一善之墓'라고 벼슬 아래 분명히 이름이 적혀 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했다. 존재의 분명함에 따라서 그 이름은 빛났고, 그래서 존재를 확립하라고 사주팔자를 따져서 이름을 성의껏 지었다. 이름은 돌림자와 성을 제외하면 임의로 정할 수 있는 것은 한 자에 불과하다.

 

내 이름 목성균을 아는 사람은 나 말고는 가족과 일가친척, 몇몇 친구, 몇몇 문우들뿐이다. 그 이상 더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는 걸 나는 바라지 않는다. 유명해지는 건 분장을 하고 무대에 오르는 것처럼 소심한 나를 불편케 한다. 나를 기억하는 몇몇 분들이 아니면 나는 사실상 이름이 없어도 크게 불편을 느낄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분들을 위해서 나는 내 이름을 소중하게 간수해야 할 의무를 느낄 뿐이다.

 

목성균, 부르기도 좋고 글 뜻도 보기 좋다. 우리 아버님이 내 이름을 참 잘 지어 주셨다. 그러나 나는 작명의 의미에 대해서는 모른다. 내가 명성 있는 존재가 되었다면 아버님은 내 이름자에 대해서 무슨 말씀을 해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럴 때 나는 공연히 몸이 달아서 이름값을 하려고 분발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성씨인 화목할 목(睦) 자와 돌림자인 고를 균(均) 자는 족보상에 정해져 있는 글자니 만큼 다시 언급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가운데 글자인 정성 성(誠) 자에는 자식에 대한 아버님의 간절한 소망이 깃든 글자다. 부모로서 최초에 자식한테 건 기대, 작명의 공덕을 아버님은 얼마나 피력하고 싶으셨을까.

 

아버님은 그런 날을 기대하시며 나를 지켜보셨을 것이다. 누가 ‘아비보다 자식이 더 났다’고 하면 흡족해서 ‘음, 이름값은 하는 편이지-!’ 아버님은 늘 그 말씀을 한 번 해보고 싶으셨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아버님의 꿈이었을 뿐, 이름을 헛되이 한 존재의 가벼움만을 나는 아버님께 보여 드렸다. 따라서 아버님은 그 말씀을 해보지 못하고 가슴에 묻은 채 돌아가셨다.

 

나는 성 밑에 씨 자만 붙은 사방사업을 하던 두메의 이름 없는 안 노인네만치도 삶을 천착(穿鑿)치 못했다. 너는 이름만큼 성의껏 살았느냐? 내 이름의 가운데 자인 정성 성(誠) 자가 가혹하게 내게 힐문(詰問) 할 때가 있다.

 

                                  소년병(少年兵) / 목 성 균 ​

 

​아내가 열심히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자 명단에 자기 오라버니 이름이 들어 있나 싶어서다. 아내는 자기 오라버니가 이북에 살아 있겠지 하는 일루의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6‧25 사변이 나던 그 해 아내의 오라버니는 인민군으로 끌려갔다. 쇠꼴을 해 가지고 동네 들어서는 열일곱 살짜리 소년을 인민군이 장총을 메워보고 총이 땅에 끌리지 않자 됐다면 끌고 갔다고 한다.

 

그 해 늦가을, 전세는 이미 국군이 평양까지 갔느니 압록강까지 갔느니 하는데 한 골짜기의 가을은 늘 그렇듯이 청명하고 싸느랗게 그 해 여름의 비극 따위는 도외시한 채 깊어가고 있었다.

 

해거름에 나는 할머니와 뒷골 밭에서 무를 뽑고 있었다. 하늘이 살얼음처럼 새파랬다. 단풍이 불타는 산골짜기가 가을 깊이 잠겨서 죽은 듯 고요했다. 무밭에 산그늘이 지자 싸느란 냉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할머니는 부지런히 무를 뽑고 나는 무더기를 지어서 짚단으로 덮었다. 된서리에 대한 대비다.

 

한참 무를 뽑는데 그늘진 산에서 조심스럽게 가랑잎 밟는 소리가 나더니 산짐승처럼 조심스럽게 인민군 패잔병이 나타났다. 인민군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피더니 할머니와 내가 무를 뽑는 밭으로 왔다. 장총이 땅에 끌릴 듯했다. 인민군은 키만 덜렁했지 기껏해야 나보다 두서너 살 위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인민군의 누런 무명 하복(夏服)은 찢어지고 때에 절어 있었다. 헝겊 군화도 해져서 발에 안 걸리는 듯 새끼로 동여맸다.

 

인민군은 아무 말 없이 조선무를 옷에 썩썩 닦아서 허기진 듯 어적어적 씹어 먹었다. 얼굴은 패각(貝殼)이 기어 다닌 갯벌처럼 더러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중에는 분명히 눈물자국도 섞여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가는 것이다.

 

할머니가 어쩔 줄을 몰라 하시며 하시던 일을 멈추고 밭둑으로 나가 앉아서 “이리 와서 앉아 먹어요.” 하고 인민군을 불렀다. 인민군은 할머니를 따라 밭둑으로 나와서 할머니 곁에 나란히 앉았다.

 

무 한 개를 다 먹은 인민군은 밭둑에서 일어섰다. 할머니가 얼른 머리에 쓰고 계시던 무명 수건을 벗어서 “해줄 게 아무것도 없네—” 하시며 인민군의 볼을 싸매 주셨다. 사시장철 밖에서 쓰고 사시는 할머니의 살갗 같은 당목 수건이었다. 소년병은 땀에 절어 퀴퀴한 냄새가 나는 할머니의 당목 수건을 해 주는 대로 가만히 받아들였다. 이미 뼛골까지 파고드는 산속의 추위를 겪은 때문일까, 당목 수건에 밴 냄새가 고향의 부모님 냄새처럼 그리워서일까.

 

인민군 소년병은 다랑논을 건너서 맞은편 산등성이를 쳐다보았다. 할머니도 쳐다보고 나도 쳐다보았다. 잎이 거의 진 나무들이 서 있는 산등성이가 까마득하게 높아 보였다. 인민군 소년병이 그 산등성이를 향해서 올라갔다. 인민군이 올라간 산발치에 옻나무가 새빨간 이파리를 달고 서 있었는데 그 눈부신 빛깔이 공연히 슬퍼서 맘속으로 ‘형—!’ 하고 부르는데 할머니가 나를 끌어안으셨다. 할머니도 내 맘 같으셨던 모양이다.​

 

지금도 늦가을 외진 산골짜기에 서 있는 빨갛게 단풍 든 나무를 보면 장총을 땅에 끌면서 저문 산으로 올라가던, 위장망 끈이 얼기설기 붙어 있는 남루한 여름 군복을 입은 소년병의 작은 등허리가 보인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당목 수건으로 볼을 싸맨 얼굴로 우리를 뒤돌아보던 산짐승같이 슬픈 눈매가 보인다. 새빨간 옻나무 단풍 이파리가 보인다.​

 

그 인민군 소년병이 과연 식구들에게 돌아갔는지, 어디서 얼어 죽었는지, 토벌대의 총에 맞아 죽었는지 그 해 가을이 다 가고 겨울이 깊어질수록 내 걱정도 같이 깊어졌다. 그날 밤 어머니는 김장할 무채를 썰고 할머니는 물레를 돌리셨다. 밤이 꽤 깊었는데 할머니가 걱정스럽게 말씀하셨다.

 

​“코끝이 매운 걸 보니 된내기(된서리)가 내리나 보다. 그 어린게 어디서 된내기를 피할꼬—.”

 

​나는 그 해 여름 새재를 넘어서, 낙동강을 건너서 대구 아래 경산까지 아버지를 따라 피란을 다녀왔다. 별을 보면서 한뎃잠을 많이 잤다. 내 나이 열세 살이었다. 길게 날아가던 별똥별을 세다가 밤이슬을 맞으며 잤다. 여름이지만 이슬에 몸이 젖으면 추웠다. 된서리를 맞으면 얼마나 더 추울까. 그날 밤 나는 단 구들 위에 요를 깔고 이불을 덮고 누워서 인민군 소년병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할머니가 늦잠을 깨우며 “우리 도령이 무서운 꿈을 꾸셨나, 어쩐 눈물자국인고-” 하셨다. 그날 밤 나는 소년병이 얼어 죽는 꿈을 꾸었다.​

 

가끔 늦가을 논둑 밑에서 얼어 죽는 메뚜기를 본다. 그때마다 소년병 생각에 참을 수 없는 마음이 되곤 했다. 아침에 보면 빳빳이 죽었는데 햇살이 퍼지면 메뚜기는 꼼지락거리며 살아났다. 그렇게 메뚜기는 겨울이 깊어지는 만큼씩 서서히 죽어간다. 나는 그게 신기해서 메뚜기의 죽음을 관찰한 적이 있는데, 밤에 따뜻한 이불 속에만 들어가면 그렇게 얼어 죽어가는 소년병이 생각나서 잠을 이루지 못하곤 했다. 나의 소년 시절은 그 인민군 소년병 못지않게 고통스러웠다.​

 

나는 할머니가 당목 수건으로 볼때기를 싸매 준 그 인민군 소년병이 아내의 오라버니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차마 아내한테 그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다.

 

                       

                            옹기와 사기 / 목 성 균

 

사기砂器나 옹기甕器나 다같이 간구한 살림을 담아 온 백성의 세간살이에 불과하다. 다만 사기는 백토로 빚어 사기막에서 구웠고, 옹기는 질흙으로 빚어 옹기막에서 구웠다는 점에서 근본이 좀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토광의 쌀독이 그득해야 밥사발이 제 구실을 했고, 장독에 장이 그득해야 대접, 탕기, 접시들이 쓰임새가 있었다. 당연히 옹기가 살림의 주체이고 사기그릇은 종속적 위치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기껏해야 여염집 살강에나 놓일 주제에 제가 무슨 양반댁 문갑 위에 놓은 백자나 청자라도 되는 양 행세를 하려 드는지, 나는 사기가 마땅치 않았다.

 

어린 시절, 나는 부엌의 살강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를 않았다. 살강에는 윤이 반짝반짝 나는 하얀 사기그릇들이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어머니의 사기그릇에 대한 탐애貪愛의 모습으로, 항상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한 번은 물을 떠먹으려고 살강에서 사기대접을 내리다가 그만 실수를 해서 부엌바닥에 떨어뜨렸다. 이놈이 내 실수에 패악悖惡을 부리듯 '쨍그랑'하고 제 몸을 박살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내 몸이 박살나면 네놈이 어디 온전한가 보자'고 벼르고 있었던 것처럼 서슴없이 자괴自塊행위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사기대접의 표독성에 놀라서 망연히 후환을 기다리는데, 아니나다를까 안방 문이 벼락치듯 열리더니 어머니가 부엌으로 쫓아 나오셔서 내 등때기를 훔쳐 때리시며 걱정을 하시는 것이었다.

 

"아이고,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이냐! 애지중지하는 네 증조부 대접을 깨뜨렸으니…."

 

어머니는 부엌바닥에 흩어진 사금파리를 주워 모으시며 그렇게 애통해하실 수가 없었다. 그후부터 나는 물동이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실지언정 절대로 대접으로 떠 마시지를 않았다. 어머니의 꾸중에 대한 억하심정이 아니라 다시는 어머니를 애통하게 하는 저지레를 하지 않으려는 주의심 때문이었다.

 

'주는 것 없이 밉다'는 말은 사기그릇에 대한 내 심정을 표현한 말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바깥사랑방에서 증조부와 같이 잠을 잤는데, 증조부께서는 한밤중에 내 엉덩이를 철썩 때리셨다. 오줌 싸지 말고 누고 자라는 사인이었다. 그러면 나는 졸린 눈을 비비고 사랑 뜰에 나가서 앞산 위에 뿌려 놓은 별떨기를 세며 오줌독에 오줌을 누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증조부 머리맡에 놓여 있는 자리끼가 담긴 사기대접을 발로 걷어차서 물 개력을 해 놓고 말았다. 아닌 밤중에 물벼락을 맞으신 증조부께서는 벌떡 일어나서 "어미야-"하고 안채에 다 벽력같이 소릴 치셨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란 말처럼 어머니야말로 잠결에 달려나오셔서 죄인처럼 황망히 물 개력을 수습하셨다. 그동안 나는 놀란 토끼처럼 구석에서 꼼짝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그런 실수를 두 번 다시는 하지 않았다. 그 실수가 있는 후에는 증조부가 밤중에 엉덩이에 '철썩'때리시면 나는 일단 일어나서 어둠이 눈에 익기까지 서 있었다. 그러면 어둠 속에서 하얗게 정체를 드러내는 자리끼가 담긴 사기대접, 그것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사기대접은 마치 노출된 매복병처럼 '어디 한번 걷어차 보시지, 왜-'하고 하얗게 내게 대들었지만, 천만에 나는 그 자리끼가 담긴 사기대접을 잘 피하고 지뢰를 밟지 않은 병사처럼 의기양양해서 가소롭게 노려보았다. 그러면 주무시는 줄 알았던 증조부께서 "오냐, 그렇게 조심성을 길러야 하느니라"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사기그릇이 판을 치고 있은 밥상 한가운데 놓여 있는 뚝배기를 보면 슬그머니 화가 난다. 사기그릇인 사발, 대접, 탕기, 접시, 종지 등은 겨우 밥, 숭늉, 반찬, 장물을 담아 가지고 정갈한 체를 하고 새침하게 앉아 있는데, 옹기그릇인 뚝배기는 제 몸을 숯불에 달궈서 장을 끓여 가지고 밥상에 옮겨 앉아서도 전더구니에 장 칠갑을 한 채 비등점沸騰點보전을 위해서 안간힘을 쓴다. 이 불공평한 밥상의 사회상社會相이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뚝배기 보다 장맛'이라는 말은 사람의 몰염치를 잘 드러내 보이는 말이다. 뚝배기는 장을 끓여서 우리 전통의 맛을 우려낼 뿐 아니라 밥상머리에 둘러앉은 가족의 단란을 위해서 펄펄 끓는 뜨거움을 참으로 장맛을 지킨다. 우리는 장을 맛있게 끓여 줄 수 있는 용기容器는 뚝배기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 일을 사기로 만든 탕기湯器는 해 낼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억지로 탕기에 장을 끓이면 되바라진 그 성미가 십중팔구는 '왜 내가 장을 끓여!'하고 분을 못이긴 나머지 제 몸을 두 쪽으로 '짝'갈라놓든지, 혹 장을 끓였다 해도 밥상에 옮겨 놓으면 '아나, 장맛!'하고 즉시 썰렁하게 장맛을 실추시켜 버릴 게 뻔하다.

 

사기는 이기적이다. 가당찮게 저를 조심스럽게 다뤄 주기만을 바란다. 옹기는 헌신적이다. 아무리 질박한 모습이 만만해 보인다고 해도 사기그릇이 죽 둘러앉아 있는 밥상머리에서 '뚝배기보다 장맛'이라고 기탄 없이 뚝배기를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뚝배기가 끓인 장맛이 좋으면 그냥 그윽하게 '음, 장맛!'하든지, 분명하게 '역시 장맛은 뚝배기야!'하고 뚝배기의 공을 치하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투박한 뚝배기의 모습은 옹기장이의 무성의한 공정 때문이 아니다. 그게 뚝배기의 전형典型일 뿐이다. 뚝배기의 투박한 모습 때문에 우리는 설렁탕, 곰탕이나 장맛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옹기장이의 뚝배기를 빚는 솜씨는 세련된 투박성의 창조라는 역설이 맞는다고 볼 수 있다.

 

임금님께서도 설렁탕, 곰탕, 보신탕 같은 탕류는 반드시 뚝배기에 담아서 드셨을 것 같다. 정갈하게 수랏상을 본다고 백자 탕기에 그런 탕류를 담아 올렸다면 탕의 맛은 비릿하고 썰렁한 게 중 이마빼기 씻은 국물 같았을 것이다. 임금님이 먹고 싶은 탕 맛은 저잣거리의 북적거리는 인간적인 진국 맛이었을 것이다. 그 맛은 뚝배기가 아니면 담을 수 없다. 현명한 수라청 상궁이라면 당연히 탕을 뚝배기에 담아 올리고 칭찬을 듣고, 어리석은 상궁은 백자 탕기에 담아 올리고 벌을 섰을지 모른다. 뚝배기는 몰로의 개다리소반에도 올라가고 대궐의 수랏상에도 올라갈 수 있는 반상班常을 초월한 그릇이다.

 

뚝배기는 못생겼어도 침울한 기색이 없다. 어수룩하고 성의 있어 보여서 기탄 없이 대할 수 있는 그릇, 따라서 사람을 보고 '뚝배기 보다 장맛'이라고 하는 것은 칭찬이다. 보기와 다르다는 말로서 그 사람을 재인식하고 호감이 갈 때나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뚝배기보다 장맛'이라고 평할 수 있는 사람은 평생을 한결같이 할 수 있는 친구로 보아도 무방하다. 옹기가 털버덕 주저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나는 마음이 푸근하다. 장광의 장독, 토광의 쌀독, 사랑 뜰의 오줌독, 부뚜막의 물동이, 안방의 질화로, 질화로 위의 뚝배기. 그 모든 옹기가 놓일 곳에 놓여 있을 때, 우리는 안도의 삶을 누렸다. 옹기 놓일 자리가 비어 있으면 가세의 영락零落을 보는 것 같아서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소년 때, 마음이 섭섭하면 뒤꼍 장독대 여분의 자리에 앉아서 장독의 큰 용적容積에 등을 기대고 빈 마음을 채우곤 했다. 거기 앉으면 먼 산이 보였는데, 봄에는 신록이 눈부시고, 여름에는 봉우리 위로 흰 구름이 유유하고, 가을에는 단풍 든 산등성이가 바다처럼 깊은 하늘과 맞대어서 눈물겹도록 분명했다. 나는 장독에 지그시 기대앉아서 그 풍경을 바라보며 젊은 날의 고뇌와 사념들을 삭여냈다. 그때마다 장독은 내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섭섭하게 여길 거 없어, 마음이 클 때는 다 그런거야."

 

이제 옹기나 사기나 다같이 우리 생활에서 놓일 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그것이 가세의 영락일 리도 없는 생활 문화의 변천 과정에서 새삼스레 옹기가 좋다. 사기가 나쁘다 하는 것은 부질없는 노스탤지어일 뿐이다.

 

 

                                    새벽 등산 / 목 성 균

 

새벽 산에 올라가서 자고 난 맑은 눈으로 날 새는 건너 산을 보면 먼길 떠나는 나무들의 행렬이 보인다. 나무들은 곁에서 보면 항상 그 자리에 서 있지만 멀리 떨어져서 보면 먼길을 와서 먼길을 빙하처럼 아주 천천히 산을 통째로 밀고 간다. 그건 욕계(欲界)가 깨어나기 전, 신새벽에나 볼 수 있다. 밝아 오는 산등성이의 나무를 보면 비로소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 길은 단숨에 달려가려는 자발적인 출발의 가까운 길이 아니다. 묵묵히 댓돌에 앉아서 한참동안 마음을 모아 신들메를 매고 비로소 천천히 무겁게 일어나서 사립을 나서는 남자의 굽힘 없는 의지 같은 아주 먼 길이다. 서두르지 않고 망설이지도 않고 평생 동안 가야 할 먼 길. 날 새는 건너편 산등성일 건너다보면 나무의 가는 길이 보인다.

 

미명에 명암을 드러낸 산줄기에 늘어선 나무들의 행렬, 멀어서 나무의 행동거지와 모습이 작긴 하지만 그래도 나무의 의중은 분명하고 크게 보인다. 앞선 나무와 뒤따르는 나무와의 똑 같은 간격. 그것은 이미 오랜 날을 함께 걸어왔고 앞으로도 함께 걸어갈 일행의 일관된 제자리의 지킴이다. 그 엄정한 질서가 움직여 가는 산등성이의 새벽을 더욱 뚜렷하게 부각시킨다. 그 나무들은 건너다보고 있으면 아득히 목어(木魚)소리가 들려온다. 아주 멀리서 아득히 살아오는 소리. 맑지는 앉지만 그렇다고 둔탁하지도 않은 잘 마른 목질부의 울림을 들을 수 있다. 용화사 아침 예불을 알리는 소리인지 아니면 환청인지 모르지만 꼭 먼 길 떠나는 나무들의 행렬 맨 앞에서 울리는 나무 북 소리 같다.

 

그 시간에 먼 길을 떠나는 게 어디 나무뿐이랴. 신발끈을 졸라매고 일터로 나가는 남자들도 나무만치나 많다. 아직 곤하게 잠든 자식들이 어여쁜 가능성을 위해서 저 산등성이의 묵묵한 나무들처럼 무모하게 사립을 나서서 어둠을 밀어내며 걸어가는 남자들의 길은 흡사 나무의 길과 같다.

 

새벽에 산에 오르는 사람도 많다. 산에 오른 사람들은 두 가지 부류다. 전생의 인과 응보인 나무를 등에 진 물고기처럼, 수륙재*를 지내서 제 과보를 풀어 줄 전생의 스승을 찾아 나선 중생들처럼 참을성 없이 발작을 하는 부류, 소릴 지르면서 나무를 등허리로 퉁퉁 치기도 하고, 숨가쁘게 사지를 휘두르기도 한다. 다른 한 부류는 나무을 등에 지고 조용히 서서 동트는 건너편 산을 바라보는 참을 수 있는 한 참아보자는 중생들이다. 나는 거기 속하는 중생이다. 새벽 산에 올라 건너편 산등성이의 먼 길 떠나는 나무들의 행렬을 잘 보면 나무들은 모두 사람이다. 사람들이 등허리에 나무를 지고 가는 것이다.

 

                <가장 수필다운 수필을 쓰는 사람, 목성균>

 

목성균의 유고 수필 전집 『누비처네』. 57세라는 늦깎이로 등단해 현대수필문학상을 수상하고, 갑작스런 발병으로 타계한 목성균의 수필을 하나로 엮었다. 죽을 때까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후 그의 영향을 받은 후배들이 양성될 정도로 뒤늦게 평가받은 수필가인 목성균이 <명태에 관한 추억> 이후 작성한 원고와 그 작품집에 실리지 않았던 원고를 하나로 모아 소개한다. 목성균은 시적 언어 구사력과 탄탄한 구성력으로 평범한 것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묵묵히 자연의 순리와 질서를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의 돈독한 삶을 그려내 감동을 전한다. 이 책은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인간적 체취가 있었던 지난 세월을 애정 어린 필체로 그려낸다.

수필계의 기형도라 불리는 목성균은 대학도 졸업하지 못하고, 이미 퇴직 후 다 늙어서 등단한 작가였다. 그 누구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으며 출신 잡지마저도 철저히 그를 외면했다. 반응 없는 글쓰기에 지쳐 그가 문학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쯤 그는 <옹기와 사기>라는 작품으로 폭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에세이스트 김종완이 가장 안심하고 추천할 수 있는 수필가가 목성균이라고 말할 정도로 목성균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를 진솔하게 전한다. 특히 작고 하찮아 보이지만 숨겨진 의미가 있는 것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삶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백하게 풀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