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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나무- 이승애(충북청주) 2022 포항스틸에세이 공모전 은상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22. 12. 4.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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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자나무- 이승애(청주) 2022 포항스틸에세이 공모전 은상

 

바야흐로 온 세상이 꽃길이다. 고인쇄박물관 뜨락에도 봄꽃잔치가 벌어졌다. 모닥모닥 핀 영산홍이 온몸을 활짝 열어젖혔다. 삼색제비꽃, 흰색 철쭉꽃, 낮달맞이꽃도 저마다 꽃술을 치켜올렸다. 푸르른 하늘 허공에 상형문자가 만화방창 찍혔다.

 

꽃을 눈에 담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섰다. 맨 먼저 금속활자 조형물 직지가 눈길을 끌었다. 활자 장인이 오 년여 간 피나는 노력 끝에 복원한 금속활자이다. 전시관에는 직지와 시대별 인쇄문화 및 한국의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활자의 제작과정, 인쇄술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감상하니 삶을 바꾸기 위해 혼을 쏟아낸 선조들의 숨결이 깊게 느껴졌다.

 

천천히 돌아보는데, 특이한 모양을 한 물건이 눈에 띄었다. 원통형 나무 모양에 작은 솔방울 같은 것이 다닥다닥 열려 있었다. 하나는 색깔이 거무스름하면서 쇠붙이 같고, 하나는 누런빛에 부드러운 질감이 느껴졌다. 저것은 무엇에 쓰이는 물건일까.

 

낯선 물건에 눈을 가까이 대고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굵고 단단한 기둥에서 곧게 뻗어 나온 가지에는 활자가 송이송이 피어있었다. 가만 보니 금속으로 만들어진 활자나무와 밀랍으로 만든 활자나무였다. 한 자 한 자 새겨진 활자는 냅뜰힘이 많은 장정을 닮았다. 쇠의 견고함과 글자의 단호함이 서로 맞물린 금속활자 나무는 보기에도 옹골찼다. 글자들은 하나같이 위를 향했다. 저 글자를 뚝뚝 따서 조합하면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될 것 같다.

 

금속활자전수교육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마침 장인이 주물사주조법으로 활자를 만드는 방법을 시연하고 있었다. 장인은 양각으로 새긴 어미자를 거푸집에 놓고 갯벌 흙을 채워 자국을 내었다. 주입구에 쇳물이 들어갈 수 있는 탕도와 글자에 쇳물이 흘러 들어갈 수 있는 가지쇠를 만들었다. 거푸집을 덮을 뚜껑에도 거푸집과 같은 방법으로 갯벌흙을 채우고 쇳물이 들어갈 수 있는 홈을 팠다. 거푸집을 덮어 단단하게 조인 다음 설설 끓는 쇳물을 부었다.

 

잠시 식힌 다음 거푸집을 열었다. 흙과 불, 쇠의 인연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활자 나뭇가지 끝에 꽃이 만발하였다. 장인이 나뭇가지 끝에 핀 꽃을 하나씩 따서 말끔하게 다듬으니 온전한 활자가 되었다. 활자를 조판에 가지런히 놓은 뒤, 유연묵을 묻히고 그 위에 한지를 놓고 인체로 골고루 문질렀다. 한지를 떼어내자 선명하게 찍힌 활자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인이 활자 나무에 꼴을 피우는 의식은 조심스럽고도 정성스러웠다. 활자를 위한 오체투지, 신성한 노동의 땀이 그를 적셨다. 의식이 끝나자 그는 허리를 펴고 땀을 닦았다. 거푸집을 열고 꽃이 활짝 핀 활자 나무를 들어 올릴 때, 장인의 표정은 의연했다. 1,200°C의 쇳물과 장인의 염원이 빚어낸 쇠붙이와 이타심이 합쳐져 만들어진 활자꽃이다.

 

내 안에서 뜨거운 무엇이 솟구쳐올랐다. 벌겋게 일렁이다 옹골차게 굳는 쇳물이 피워낸 활자 꽃을 보자 600여 년 전 문명의 꽃을 피웠던 문물의 시원이 내 안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안에 깊이 새겨진 인류애와 장인의 열정과 쇠의 순종이 있었기에 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달군다.

 

 예전에는, 지식과 정보는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활자가 발명되고 책이 하류층으로 보급되면서 바야흐로 무지의 둑이 허물어졌다. 닫혀있던 세상이 서서히 열리자 계급도 무너졌다. 성장을 거듭하며 정치, 사회, 역사, 철학, 종교에도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차갑게, 때로는 뜨겁게 쇠의 힘은 인류의 가슴에 녹아들어 문명의 꽃을 피웠다.

 

활자 나무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새벽닭 울음소리에 맞춰 소식을 전하는 신문도 더는 활자를 쓰지 않는다. 활자는 소임을 다했지만, 장인은 활자 나무에 꽃을 피우느라 여념이 없고 쇠붙이는 펄펄 끓어오르고 있다. 벌건 쇳물이 흘러 들어가던 탕도와 그 길로 뻗어나간 가지쇠, 그리고 가지 끝에 핀 꽃을 보는 내내 가슴이 뿌듯했다.

 

갓 태어난 활자 꽃 하나하나 만져보았다. 장인의 피와 땀 그리고 설설 끓어오르던 쇳물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쇠붙이는 불을 순순히 받아들여 불을 품었고, 불은 쇠 속으로 들어가 합일을 이루었다. 쇠의 숭고한 용해와 불의 열망이 피워낸 활자꽃 속에는 무한한 힘이 담겨있다.

 

며칠 자판을 두드려도 글길은 사막을 걷는 것 같았다. 머리를 쥐어짜며 휘두른 펜에선 헛꽃만 피었다 스러졌다. 조바심이 났다. 이대로 문충文蟲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싶어 밤잠을 설쳤다. 눈시울을 붉히는 날이 허다했다. 어쩌다 생각이 고여 펜을 잡으면 신기루처럼 아득히 사라졌다. 꽃눈 하나 틔울 수 없어 가슴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활자나무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저 작은 활자나무가 꽃을 피우기까지 수없는 좌절과 절망이 있었을 터이다. 하지만 쇳물 같은 붉은 열정과 뜨거운 가슴이 있었기에 활자나무 기술이 완성되었고, 조합된 활자로 책을 찍어 문명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활자나무를 만드는 장인의 정신이 있다면 나도 언젠가는 글꽃을 피울 수 있겠지. 쇠가 달구어져 활자 꽃을 피우는 시간을 통해 나는 모자란 열정을 충전한다.

 

활자꽃, 그 문화적 자부심을 품고 집으로 돌아왔다. 책장 앞에 서니 책장에 꽂힌 책들이 온통 꽃나무로 보였다. 욕심이 넘쳐 샀지만, 표지도 넘기지 않은 인문학, 읽다가 덮어버린 수필집, 팽개친 책 속에 핀 마음의 꽃들이 궁금했다. 책 서너 권을 빼 들고 책상에 앉았다. 한 권씩 펼칠 때만다 활자꽃이 길을 열었다.

 나는 지금 활자꽃이 만발한 꽃길을 읽고 있다. 그윽한 문향에 마음도 취한다.

 

                                                            구석의 시간 / 이 승 애

 

자료집을 찾으려고 책장을 가리고 있던 소파를 밀어냈다. 오랜 시간 밀봉되었던 책장이 부스스 눈을 뜨는데 뽀얀 먼지가 반기를 들 듯 사방으로 흩날린다. 바닥엔 검은 비닐봉지 하나, 백 원짜리 동전 두어 개, 작은 손걸레, 신문지 몇 장, 약봉지, 검은 고무줄 등 잡동사니들이 먼지와 뒤엉켜 널브러져 있다.

4년 전 이사하면서 갖고 있던 책 중 반 트럭 가까이 나눠 주었다. 그런데도 여덟 개의 책장이 부족해 몇 개를 더 사야 했다. 네 개의 책장은 서재에 놓고, 나머지 여덟 개는 거실에 놓기로 했다. 네 개는 한쪽 벽면에 붙여 놓았고, 네 개의 책장은 가구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도서관식 형태로 뒷면을 맞붙여 놓아 앞뒤로 꺼내 볼 수 있게 했다. 그러다 보니 공간이 좁아져 소파를 책장에 바짝 붙여 놓고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소파와 책장 사이에 묘한 구석이 생겼다. 너무 크고 두꺼워 책장에 꽂기 어려운 사전과 앨범을 이 구석에 놓았다. 마치 맞추기라도 한 듯 딱 들어맞는다. 사전과 앨범은 고요한 터에 저만의 자리를 차지해 헐렁했던 구석은 틈이 메워져 안정감이 있게 되었다.

오늘 오빠가 와서 자료집을 찾으려 소파를 밀었는데 이 지경이 되어 있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몽땅 드러내고 책들 사이에 낀 먼지를 털고 책장 구석구석 닦아냈다.

문득 요즘 내가 몰린 상황도 이 구석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어머니와 오빠, 나 이렇게 세 가족은 세상과 좀 동떨어진 구석으로 들어가 머무는 중이다. 아흔일곱의 어머니의 구부러지고 엉켜버린 뇌의 회로로는 사람들과 융합할 수 없고, 암투병중인 오빠는 활개를 치며 활동할 수 없으니 구석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나는 이 두 사람을 돌보아야 하는 상황이니 자의든 타의든 구석 한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차지한 구석이 삶의 늪이 아니요, 불행의 자리도 아니다. 구석이 꼭 패배자들이 숨는 음지의 장소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구석은 나름대로 나를 보호해주고 많은 것을 선물로 주기도 한다.

나는 그동안 쉼없이 돌아가는 시간의 톱니바퀴에 매달려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시간보다는 타인을 위한 시간에 더 비중을 두는 삶이었기 때문에 늘 목마름이었다. 언젠가부터 구석이 그리웠다. 구석에 머물게 되면 그동안 듣지 못했던 내면의 소리를 귀여겨 들을 수도 있고, 마음껏 게으름을 피우며 책도 읽고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세월은 내 소원과는 다르게 흘러갔고 오래도록 구석을 차지할 수 없었다.

신의 섭리는 참으로 묘했다. 원할 땐 주시지 않더니 불현 듯 허락해준 구석은 아늑함보다는 가시방석이었다. 은밀한 공간의 즐거움은 허황한 꿈이었다. 격리되고 단절된 시간이 길어질수록 매달려 있던 끈들이 뚝뚝 끊어져 나갔다. 우리의 구석은 평온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밀봉된 책장처럼 묵묵히 견딜 수밖에 없는 자리일 뿐이었다. 불안감이 먼지처럼 쌓여가고 듣지 않아도 될 말들이 몰려들어와 자리를 어지럽혔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은 너무 많았다. 구석은 그런 우리를 어머니의 자궁이 되어 품어주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한해가 가고 또 한해가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마를 새 없던 눈물샘도 조금씩 말라갔다. 여전히 고전 중이지만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구석의 안온함이 우리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은 좌절하고 절망하는 우리에게 구석이라는 자리를 마련해 주셨나 보다. 낮고 조용한 이곳에선 고통과 슬픔을 애써 참을 필요도 은폐할 필요도 없다. 느끼는 그대로 아파하고 슬퍼하다 보면 그들과 타협하게 되고 결국엔 받아들이게 된다.

채근담에 역경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힘들게 하지만 호걸로 만들기 위해 단련시키고 담금질하는 화로와 망치의 역할을 한다. 그 단련을 받아 이겨내면 몸과 마음이 함께 이롭고, 이겨내지 못하면 심신이 해롭다고 하였다.

 

(橫逆困窮 是煆煉豪傑的一副鐪錘 能受其煆煉 則身心交益 不受其煆煉 則身心交損)

 

우리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꿋꿋하게 정진하는 중이다.

구석은 결코 서두르거나 채근하는 법이 없다. 개인의 삶을 존중하고 기다려줄 줄 아는 미덕을 지녔다.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고 자장가를 부르듯 부드러운 손길로 고조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가지 않은 낯선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희석해 주고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힘을 북돋아준다.

구석이 무조건 호의만 베푸는 것은 아니다. 가끔 현실을 부정하고 뛰쳐나가고 싶을 때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할라치면 따끔한 회초리를 들어 현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르치기도 한다. 구석은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있다. 어떤 이에게는 쉼 의 자리요, 정화의 자리가 되기도 하고, 상처받은 마음의 치유 자리, 잃어버린 희망을 찾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나에게도 이 구석의 시간은 이 모든 것을 아우른다.

구석에 있으면 경쟁할 필요도, 남을 시기하거나 질투할 이유도 없다. 이곳은 남의 모습보다 내 모습을 더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이 은밀한 자리에서 마음에 군불을 지피며 오순도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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