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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가 하는 말 / 김 홍 은

장대명화 2015. 12. 20. 22:02

 

                             수레바퀴가 하는 말 / 김 홍 은

 바람이 살며시 얼굴을 스쳐간다. 어디선가 향긋한 냄새가 알듯 말듯 스며든다. 언젠가 산 계곡 솔숲에서 은은하게 느끼던 나긋나긋한 푸른 향기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고요하다. 숲속은 포근한 혼효림이다. 저 나무들도 인생의 삶과 같지 않은가. 수종간의 소리 없는 경쟁을 하며 아등바등 살아가지만 여유롭게 보인다. 오늘 따라 윤지(輪枝)가 예사롭지 않다. 자연도 오랜 세월이 지나다 보면 안정되어가는 극상림(極相林)으로 이루어지겠지.

  입춘을 앞두고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차갑지가 않다.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묵은 이파리들이 팔랑댄다. 마치 느린 가락의 진양조에 맞추어 춤을 추듯 너울거린다. 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동작으로 점점 빨라졌다가는 느려진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반복이 이어지다가, 한 잎이 허공으로 날아간다. 어느 잎은 하늘 높이 날다가 포물선을 그린다. 팔랑팔랑 대며 팽그르르 돌다 떨어진다. 기다란 용수철을 연상케도 한다. 어쩌면 수면위로 밀려나가는 동그라미 진, 물결의 잔잔한 파문을 떠올리게 한다. 아름다운 환상이다.

  굴렁쇠를 굴리며 푸른 잔디밭을 끝없이 달려가던 소년의 모습을 아련히 생각나게도 한다. 그곳에는 잊을 수없는 향수가 스며있다. 언덕에는 찔레꽃이 피어 있고, 강변에는 하얀 할미새가 꽁지깃을 쫑긋쫑긋 초싹대며 날아들던 어린 시절을 어이 잊을 건가.

맑은 시냇물을 작은 돌로 막아, 모래밭 사이로 물길을 돌려 풀잎으로 물레바퀴를 만들어 뱅글 뱅글 돌리며 놀던 그리움이, 빛바랜 일기장 글씨처럼 흐릿해져 간다. 물레바퀴를 만드는 기술은 솜씨다. 솜씨만 있어서도 안 된다. 눈썰미가 있어야 한다.

  청국밀 줄기를 끊어다가 만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물고기 꾸레미풀을 이용했다. 물고기를 잡았을 때, 아가미를 꿰던 풀줄기를 끊어다 한 뼘이 되게 자른다. 이를 축으로 이용하고, 남은 줄기를 세 마디 정도의 길이가 되게 짧게 끊어 바퀴살로 만든다. 축의 중심지를 조심스럽게 손톱으로 반을 갈라 바퀴살이 열십자가 되게 낌는다. 이때 솜씨가 필요하다. 또 눈썰미가 있어야 잘 끼울 수 있다. 적당한 물줄기의 폭포를 만들어 조절을 해야 물레바퀴가 잘 돌아간다.

  애써 만든 바퀴가 어느 때는 비실비실 돌까말까 애를 태우면 무척 속이 상했다. 다시 정성들여 바퀴살을 만들어 끼우고 바퀴 축을 양쪽 손마디에 걸치고 물살에 댄다. 잘 돌아갈까 가슴을 조인다. 손끝이 간지럽다. 와-, 성공이다. 이때  즐거움은 방앗간집 주인이라도 된 양, 친구들 앞에서 으쓱대기도 하였다. 기분을 어찌 할 줄 몰라 물위에다 수제비를 뜨며 기쁨을 표현 했었다.

  이 풀이 왕미꾸리꽝이라는 이름도, 식물공부를 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배운다는 것은 깨우침이다. 아무리 익힘을 다해도 뜻이 없으면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어릴 적에는 몰랐으나 이제 생각하니 중심이 되는 바퀴축이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겠다. 또한 바퀴살이 있어야 물레바퀴가 돌아간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화합이며 삶의 이치가 아니던가.

  달 밝은 밤이면, 손에 손을 잡고 둥그렇게 큰 원을 만들며, 강강술래를 하던 어린 목소리들이 아직도 귓전을 맴돈다. 바로 순수한 동심원(童心圓)을 그리던 마음은 오늘도 초침, 분침, 시침이 되어 세월은 묵묵히 가고 있다.

보름달을 바라보면, 누나의 수틀도 생각난다. 하얀 천에다 고운 색실로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꽃그림을 수놓던 천을 빼내고, 대나무 틀을 굴렁쇠 대신 굴리며 놀다가 야단을 맞던 개구쟁이 시절이 그립다.

  인생의 바퀴를 완성하기 위해 학문만 익히고, 우월감에 젖어 고아한척 이기심에 빠져 있으면, 한치 앞만 바라볼 뿐이다. 남을 위한 숭고한 희생정신은 값진 깨달음이 있어야 행할 수 있다. 물레바퀴가 회전함으로 전기를 일으켜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처럼, 어둠을 밝혀주는 불빛 같은 사람. 

  직선보다는 곡선이, 곡선 중에서도 원형은,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킨다. 하나의 원 보다는 다섯 개의 원을 연결하면 오륜(五輪)이 된다. 이는 올림픽 상징도(象徵圖)가 아니던가. 세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마음이 되고, 함께하는 화합의 자리는 언제나 아름답고 화평해 보인다.

  사람은 하나의 수레바퀴다. 바퀴는 크기에 따라 그 용도도 다르다. 크건 작건 주어진 그 역할에 얼마나 열심히 회전하느냐에 결과를 얻는다. 사람은 누구나 평탄한 인생길에 여유롭게 굴러가는 바퀴가 되기를 원한다. 수레바퀴가 부드럽게 돌아가려면 보물을 욕심내어 혼자서 싣고 가기 보다는 서로 나눌 때, 힘이 덜 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삐걱거리는 바퀴에 윤활유만 칠 줄 알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줄은 모른다.

  그렇다고 인생의 빈 수레를 끌고 가는 사람은, 늘 허망한 삶일 뿐이다.

  인류는 커다란 원이나 다름없다. 원형은 원심력을 지니고 있다. 그 힘이 한곳으로 지나치게 쏠리게 되면 중력을 잃게 된다. 한개 한 개의 바퀴살도 균형을 지켜 중심축을 지킬 때, 수레바퀴는 원하는 방향으로 안전하게 굴러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