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꾼이 진짜 부자인 이유/이 상 렬
만석꾼이 진짜 부자인 이유 / 이상렬
옛집은 고슬고슬한 시간의 이삭을 품고 푸덕하게 앉아 있다. 주인을 닮아 빈손들의 허기를 채웠던 인심은 세월을 보듬어 더욱 풍성하게 터를 잡았다. 하나 더 가진 자로서 이웃의 가난을 제 몫이라 여겼던 따뜻한 부자 만석꾼, 그가 살았던 고택 문턱을 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대문 앞을 서성였다.
가진 만큼 베풀라는 미덕을 몸소 짊어지고 간 고고한 흔적들이 아직도 살아서 발효하는 곳, 물질적 풍요의 그늘에 가려 욕심을 채우기 급급한 자들에게 주인은 죽어서도 큰 교훈을 집안 곳곳에 남겨 놓았다.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무형의 금은보화가 칸칸이 쌓여 제 스스로 광채를 뿜는 듯 집은 세월을 머금어 윤기가 지르르 흐른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꾸민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자연과 더불어 뿌리내린 초목들의 빛깔이 멋이요, 주인의 손때 묻은 크고 작은 장독대의 어우러짐이 조화인 것을……. 금수강산의 수려함을 모셔온다 한들 자연스레 생겨난 소박함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에 견줄 수 있을까 싶다. 기둥이며 마루며 처마를 지탱하는 나뭇결에는 오래된 듯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다. 곱게 물들 아름다운 낙엽의 빛깔이 원래 나무 안에서 영양분을 내려 받은 것이듯, 그것이 집이든 사람이든 멋스럽게 여문 것은 따로 장식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12대, 300년에 걸친 만석지기의 재산은 다 어디로 갔을까. 찬찬이 둘러보지만 부富는 보이지 않는다. 반쯤 열린 채 세월의 들고남을 알고도 모른 척 눈감았을 대문 또한 주인을 닮아 고집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늘 열려 있었다던 문이다. 배고픈 자의 수없는 체온이 드나들었을 문은 손때가 묻어 반지르르하고, 헤아릴 수없는 발길들로 닳아버린 문턱에는 아직도 허기진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안채와 사랑채는 아흔아홉 칸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낮고 소박하다. 그 단출함 뒤에 감추어진 깊이는 가늠하지 못할 만큼 깊고 신비롭기까지 하다. 무엇 하나 허투루 자리한 것이 없다. 옛집의 작은 집기 한 점에서도 부자의 소박함이 엿보인다.
툇마루에 걸터앉는다. 혹여 배곯은 행락객일까 하여 세월과 햇살을 함께 버무린 밥 한 상을 차려 낸다. 허기진 배에 요기가 끝나자 정성스럽게 말려둔 차 한 잔으로 나그네에 대한 반가움을 우려내는 듯 은은한 바람이 마루에 마주앉는다. 마나님의 미소를 머금은 듯 하늘의 구름은 푸덕하게 떠 있고, 옹기종기 들어찬 장독대는 열어보지 않아도 짠맛의 장들이 발효 중임을 직감케 한다. 나는 잠시 숨 가쁘게 사는 현실을 잊고 고즈넉한 옛집의 운치에 취한다.
사랑채에 들어서니 세 개의 편액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따금씩 세상이 번잡하고 팍팍하게 느껴질 때마다 나는 경주 최씨, 만석꾼이 남겨놓은 부富의 철학을 떠올리곤 했다. 용암고택龍庵古宅, 대우헌大愚軒 그리고 둔차鈍次가 바로 그것이다. ‘크게 어리석어라. 스스로 어리석음을 자처함으로써 상대방의 경계심을 없애라’는 의미의 ‘대우大愚’와, ‘어리석은 듯 드러내지 않고 버금가라’는 뜻의 ‘둔차鈍次’, 바로 이것이 경주 최씨가 만석의 부를 오랫동안 지켜올 수 있었던 철학이었다.
마음의 흐름은 마치 물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같으리라. 물결이 결코 스스로 높은 곳을 오를 수 없듯이, 우리네 마음 역시 다소 빈틈이 있어 허술해 보이는 사람에게 머무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나침반은 아무렇게나 던져놓아도 북쪽을 향하듯 슬기로운 사람은 흐르는 마음의 결대로 사는 이들이다. 지나치게 높은 곳에 마음을 두기보다 오히려 자고하지 않고 스스로 어리석음을 자처할 때, 비로소 무형의 재산인 마음을 얻게 되지 않을까.
반면,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의 몸이 아래로 곧 곤두박질치는 줄도 모르고 앉아 있는 나뭇가지를 슬근슬근 톱질하는 사람처럼,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가치를 두고 사는 이들이다. 오직 이기고 쟁취하는 것만이 존재의 이유라고 여기며 사는 사람들은 ‘대우大愚’니 ‘둔차鈍次’의 만석꾼 철학을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라.
처마에 반쯤 가려져서 보이는 조각난 하늘이 청명하다. 올려다 보이는 세상도 제 소유라 여기며 독점하려 않기 위함이었을까. 주인의 베푸는 미덕처럼 한 조각의 하늘도 딱 제 분량만 받아들인다.
호젓이 걷다 보니 어느새 곳간에 이르렀다. 곳간 마당에서 맞이하는 하늘빛처럼 소박한 주인의 마음 씀씀이가 담긴 육훈六訓에 내 가슴이 먼저 가 닿는다. 최씨 부자가 삼백 년을 넘게 부를 지켜 올 수 있었던 비결이 넉넉한 듯 비어있는 곳간에 있었다. 빌려 달라 굽실거리지 않고, 누구든 들어와 가져갈 수 있는 뒤주는 없는 자들을 자존심까지 배려해 두었다. ‘진사 이상의 벼슬에는 오르지 말라. 만석 이상 되거든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 없게 하라. 시집온 며느리는 삼년간 무명옷을 입혀라’ 이것이 바로 억척스럽게 피워온 그들만의 고집 ‘만석꾼 정신’이었다.
일 년 소작 수입은 쌀 삼천 석 정도였다고 한다. 이 중에 천 석을 객을 접대하는 데 썼다. 객이 많을 때는 큰 사랑채, 작은 사랑채에 일백 명은 족히 넘었다. 거기다가 떠나는 객의 손에는 과메기 한 손과 하루 분의 양식을 쥐어 보냈다는 그들의 삶을 되짚어 볼 때, 내 인생의 닻을 어디에 내려야 할지 정확히 가늠이 된다.
볏짚을 사이에 두고 형과 아우가 밤새 서로를 위해 단을 옮겼다는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는 나라에 나는 살고 있다. 들판에 일부러 챙겨 던지는 고수레, 늦가을에 과일을 수확할 때 두어 개쯤 남겨두는 까치밥, 새끼 밴 노루를 두 눈을 질끈 감고 놓아주는 사냥꾼, 그물을 털 때 어렵게 잡은 고기 가운데 작은 물고기는 다시 놓아주는 어부, 이들의 마음이 곧 만석꾼의 마음이었으리라.
최씨고택에 머무는 동안, 더불어 사는 것이 삶의 부요에 이르는 법임을 배웠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했던가. 고택을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조차도 저 홀로 서지 못해 듬성듬성이라도 군락을 이루고 있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솔가지를 스치는 바람과 햇살, 만물을 소생케 하는 흙과 물, 유유히 밤하늘의 세월을 엮는 달과 별, 모든 것이 긴밀히 연결되어 저의 실재를 이루고 있다.
어느 시인이 말했던가.
‘벌거벗은 육체가 아름다운 건 주머니가 없어서 일 것이다.’
그렇다. ‘나’ 의 존재가 누군가의 ‘너’ 가 되는 순간, 부요의 극치를 이룬다. 이것은 비움과 나눔의 신기한 능력을 아는 자만이 누를 수 있는 삶의 참맛이다. 나를 텅 비우므로 다른 무엇으로 풍성해지는 맛 말이다. 진정한 풍요는 넉넉한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넉넉한 품에 있게 된다는 것, 이것이 만석꾼이 진정 부자인 이유다.
여운이 남아서 일까. 온갖 잡다한 상념을 풀어놓고 대문을 나서려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대문 좌측에 걸려있는 가문의 마지막 부자, 최준의 현판이었다. 그는 노스님의 금언 ‘재물은 분뇨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지만,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를 받은 후, 전 재산을 독립자원으로 쓴다. 지금의 이 고택도 후손들 소유가 아니다. 만석 재산은 이렇게 이슬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의 남긴 숭고한 정신은 오늘에 이어갈 하나의 인생 사표師表가 아닐까 싶다.
고택, 도심 한복판에 자리했지만 마치 군중 속의 고독함이 서린 듯 고요하기만 하다. 바깥세상의 소란스러움을 물리치고 찾는 이의 들볶음을 스스로 가라앉힌 후, 성스러운 고요 속에 수도자처럼 앉아있다. 고택의 기와지붕 위로 넘어가는 저녁놀이 아쉬움에 발길을 떼지 못하는 나그네를, 팔을 벌려 포근히 안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