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좋은수필 2012년 봄호, 신인상수상작] 행복한 사람 - 이상분
『좋은수필』 봄호에 신인상을 수상하신 이상분님의 수필을 소개합니다.
항상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 행복을 느끼는 것은 어렵지요. 그 행복을 이상분님은 느끼셨답니다.
행복한 사람
찬바람이 분다. 뜰 앞에 감나무가 나뭇잎을 떨어내고 있다. 고운
빛이 채 가시지 않은 감잎이 바람을 따라 저만치 달아나고 있다. 나
도 따라서 뜀박질을 한다. 그 모양새가 남편의 눈에 꽤나 철없어 보
였나 보다.
“당신이 소녀야! 어둡기 전에 빨리 끝냅시다.”
낙엽을 쓸면서 남편은 다 절여진 총각무를 가리키며 지청구를 해
댄다.
날씨가 영하권으로 떨어진다는 예보 때문에 마음이 바빠져서 종일
종종걸음을 쳤다. 배추와 무가 얼지 않도록 비닐로 단단히 덮고, 일
부는 구덩이를 파 땅속 깊이 묻었다. 밭 단속을 하면서 허둥지둥 뛰
어 다니다 보니 오후에 소금을 친 총각무가 그새 다 절여진 것이다.
총각무를 씻는 것은 남편에게 미루고 나는 서둘러 양념준비를 한
다. 식혀 놓은 찹쌀죽에다 고춧가루를 넣어 불리고 쪽파와 멸치 액젓
을 섞는다. 김치의 맛은 뭐니뭐니해도 고춧가루가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올 김장철에는 예전처럼 좋은 고춧가루
를 흔케 쓸 수 있는 집이 드물 것 같다. 잦은 비와 일조량 부족 때문에
작황이 좋지 않아서 고추 값이 마냥 오르다 보니 김장하는 것마저도
무척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들이다. 다행히 우리는 방앗간을 운영하는
큰형님이 올해도 어김없이 빛깔 고운 태양초를 보내주었기 때문에
어느 해보다도 감사한 마음으로 쓰고 있다.
우리 집은 총각김치를 남보다 많이 담는 편이다. 형제들도 많거니
와 어떤 김치보다도 이 총각김치를 유난히도 좋아하는 형제들이다
보니 양에 욕심을 낼 수밖에.
총각김치 하나만으로도 밥그릇을 금세 비워내고 또 신김치에다 고
등어를 넣고 조리는 고등어조림도 모두가 즐겨 먹는다. 또 늦은 밤
아삭아삭 소리를 내며 라면과 함께 먹는 그 야참 맛까지도 어쩜 그렇
게 잘 알고들 있는지. 그러니 형제 사랑이 유별나고 나눔을 생활의
미덕쯤으로 여기는 남편은 이때가 되면 으레 내 눈치를 살피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도 나눔을 실천하면서 행복
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임에도 나는 피붙이인 내 형제들에게조차
도 조금의 수고마저 생색을 내곤 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관계라는 것을 안 후부터
는 남편보다 내가 먼저 두 형제들을 챙긴다.
‘Give and take’라는 말도 있지만, 받는 기쁨을 어찌 나누는 기쁨
에 비교하랴. 주는 순간에는 나도 행복할 수 있어서 좋다. 내 작은 수
고가 형제애를 더 돈독하게 할 수만 있다면 이 수고쯤이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조만간 배추김치도 담글 것이다. 김장은 여럿이 해야만 제맛이 난
다고 하였다. 동서들과 함께 양념을 준비하고, 또 양념소를 넣으며
동병상련으로 술꾼인 남편들 흉을 보면서 한바탕 정을 나눌 것을 생
각하니 지금부터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마님! 저리 비키시지요. 소인이 버무리겠습니다.”
소인배가 된 남편은 고무장갑을 소매 위로 추어올리며 날 밀쳐낸
다. 물 빠진 총각무를 커다란 고무 통에 쏟고 불려 놓은 고춧가루를
붓는다. 그리고 갓과 다진 마늘, 생강, 설탕 등 모든 양념을 다 넣고
버무리기 시작하였다. 해마다 이렇게 함께하다 보니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척척 알아서 잘하고 있다.
“살살 해요. 살살…….”
그 큰 손으로 조심스럽게 몇 번 뒤적이니 김치가 쉽게 다 어우러졌
다. 빛깔이 곱고 먹음직스럽다. 입안 가득 침이 고인다. 여러 가지 재
료가 한데 섞이고 어우러져야만 제맛을 낼 수 있는 김치를 보며 우리
네 인생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결코 섞이지 않을 듯
빳빳하던 푸른 잎대가 소금물에서 숨이 죽어, 시간이 지나면 적당히
나긋해져서 모든 양념과 어우러지는, 그래서 맛깔진 음식으로 거듭
나는 김치. 의무만 앞섰던 새댁 시절의 모난 마음도, 이십여 년의 시
간과 함께 모서리가 닳고 닳아서 둥글어진 걸까. 이제는 김치 담그는
날은 몸놀림이 더 가볍다.
남편의 얼굴과 옷은 영광의 상처처럼 온통 고춧가루 범벅이다. 모
처럼 내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는다. 남편도 따라 웃고 있다.
여섯 개의 통이 채워졌다. 채워진 통만큼이나 내 가슴도 꽉 차 오른
다. 뿌듯하다.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다. 김치 통을 바라보면서 이미
난 감동하는 동서들의 밝은 목소리를 듣고 있다.
남편은 어느새 고춧가루가 범벅인 고무통과 양념단지들까지도 깨
끗이 씻어서 엎어놓았다. 언제 김치를 담갔는가 싶게 우물가가 말끔
하게 정리가 되었다.
“알고 보면 당신 행복한 사람이야. 어디서 이런 신랑을 만나?”
“당신이야말로 어디서 이런 각시를 만나게요.”
그래 행복이라는 게 뭐 별것인가. 상대방이 즐겁고 또 내 마음이 즐
거우면 그것이 다 행복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