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순스님의 명추회요 강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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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에 차별 없지만 삶에 따라 차별 생긴다.
허망하게 이름과 형상을 세우면 범부 이름과 형상이 다 공인 줄 알면 성자.
그릇들의 크기와 부피가 다르더라도 허공은 평등하게 담겨 차별이 없다.
* '종경'이란 바람을 만나지 못한 배는
문 ; 온갖 개념이 끊어진 참마음은 본디 이름과 모순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부처님이 되고 또 중생이 됩니까? 만약 세상의 법을 수순하여 임시로 이런 이름을 내세운 것이라면 무슨 법으로 성립됩니까?
답 ; 실제의 이치에 본디 범부라거나 성스런 사람이라고 할 게 없는데, 이런 분별이 나온 것은 모든 중생이 '결정된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의 이치에 미혹하기 때문이다. '결정된 성품이 없는 무성'이므로 망념을 일으킨 것을 깨닫지 못하고 진공(眞空)에서 허망하게 이름과 형상을 세우므로 범부라하고, 이름과 형상이 공(空)인줄 아는 것을 성스런 사람이라 한다.
범부라거나 성스런 사람이란 호칭은 다섯 가지 법으로 성립하지만 이는 허깨비처럼 이름과 형상이 진실한 게 아니다. 환술로 만든 허깨비처럼 중생의 형태도 업으로 있다. 환술과 업이 모두 거짓이라면 중생의 형태와 헛깨비도 똑같이 공이다. 다만 미혹했느냐 깨달았느냐에 따라 이름만 달리 있을 뿐 본디 범부라거나 성스런 사람이라는 바탕은 없다. 다섯 가지 법은 '유가론'에서 '드러난 모습에 붙인 이름이나 형상, 망상, 올바른 지혜, 진여'라고 한다.
예전부터 이를 풀이하여 "드러난 모습에 붙인 이름이나 형상, 망상 세 가지 법은 범부를 만들고, 올바른 지혜와 진여는 성스러운 사람을 만든다."라고 하였다.
드러난 모습에 붙인 이름이나 형상은 범부의 경계이고 망상은 범부의 육식(六識)이다. 현상에 미혹하여 그 경계를 반연해서 분별이 일어나므로 이를 망상이라고 한다. 이를 경의 게송에서는 "마음과 그 인연을 알지 못한다면 경계와 육식(六識)이라는 두 가지 망상이 생긴다."고 하였다.
'올바른 지혜'와 '진여'는 성스런 사람의 법이다. '올바른 지혜'는 성스런 사람이 삿됨을 다스리는 금강의 인연으로 무루법(無漏法)을 닦아 미혹을 끊는 지혜이니 '깨달을 수 있는 지혜인 능각지(能覺智)'라고도 한다. '진여'는 성스러운 사람의 마음에서 증득한 이치이다. '진여'는 바탕이요 '올바른 지혜'는 작용이다. 달라도 다른 것이 아니요 같아도 같은 것이 아니니, 같다는 것은 '진여'요 다르다는 것은 '올바른 지혜'이다. '올바른 지혜'로 늘 작용하니 생멸을 막고 '진여'로 늘 그 바탕이니 생멸이 없다. 바탕과 그 작용에 걸림이 없는 것이 '생각할 수 없는 법계의 진실한 뜻'이다.
또 범부는 마음이 미혹하여 '드러난 모습에 붙인 이름'과 '형상'이 '공(空)'인줄 모르므로 허망하게 이들을 '있다'고 한다. 어리석게 '있다' 하여 '공(空)'이 아닌 것 이를 일러 '망(忘)'에서 일으키는 마음 '상(想)'이라 한다.
'올바른 지혜'는 이름과 모습이 본래 '공적(空寂)'인줄 안다. '공(空)'인줄 알기에 망상이 절로 쉬어지고, 망상이 쉬어저 진여로 돌아가니, 이치가 분명히 드러나 '올바른 지혜'가나타난다. 이름과 모습을 내세우지 않으므로 이를 일러 '올바른 지혜'라 한다. 경의 게송에서 이를 "마음과 경계를 분명히 아니 망상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진여란 올바른 지혜이니, 이 마음의 성품이 참하고 여여하므로 이를 진여라고 한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다만 한 법도 없는 속에서 '있다'고 집착하면 범부가 되고, '있다'는 것이 본디 '공'임을 통달하면 성스런 사람이 된다.
다섯 가지 법만 아니라 갠지스 강 모래알 만큼 많은 이치가 끝없이 나와도 이치는 언제나 하나의 도이다. '오직 마음'이라는 이 도가 곧 여래가 가는 곳이니 한 걸음 한 걸음에 온갖 경계가 사라진 '법공(法空)을 밟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싸안고 하나가 되는 '대승(大承)'이 있는 곳이니 한 생각 한 생각에 얻을 바가 없기 때문이다.
문 : 무엇 때문에 '종경'에 들어가 금방 도를 보고 영겁의 세월을 뛰어 넘는다'고 설하십니까?
답 : 실로 이런 이치가 있지만 세간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겠느냐. 있는 자리에서 바로 자신의 마음을 깨친 공덕이 오롯하지 않다면 마음 밖에서 허망하게 도를 구하는데 부질없이 영겁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바람 만난 돗단배처럼 자신의 마음을 관조하여 한 생각이 오롯하면 하는 바 온갖 일에 걸림이 없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종경'이란 바람을 만나지 못한 배는 끝내 생사의 파도를 건너 열반의 언덕에 도달할 수 없다. '종경'에 커다란 이익이 있으므로 달리 많은 자료를 모으려 힘쓸 게 없으니, 오직 현명한 사람에게 뒷날 이 법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부탁할 뿐이다.
(강설)
참 마음에 본디 어떤 이름과 형상이 없다. 미혹한 중생을 위하여 온갖 이름을 잠시 억지로 갖다 붙여 혹 '범부'라 하고 '성스런 사람'이라 하며 '부처님'이라 하니, 이런 허상에 얽매여 알음알이를 내지 말고 '결정된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의 이치를 보아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지혜요 진여로서 종경이다. 이 종경에 들어가야 생사에 묻힌 영겁의 세월을 뛰어넘어 열반의 언덕에 들어간다.
* 중생의 삶에 따라 차별이 있다.
문 : 이 '한마음'에서 부처님이 되는 도는 방편으로 몇 단계 지위를 닦아 증득해야 합니까?
답 : 이 '집착이 없는 참마음'은 실로 닦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증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어떤 법에 집착하는 아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어떤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닦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디 맑고 맑기에 옥처럼 깍고 다듬어야 투명한 것이 아니니 법이 그러하며 원래 그런 것이다. 수행의 위치를 논하여 세간의 이치가 펼쳐지는 곳에 있더라도 참다운 이치를 잃지 않으니, 이는 지위가 없는 자리에서 그 지위를 논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있다거나 없다거나 집착을 일으킬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를 비유하여 '화엄경'에서는 "보살십지(十地)로 나누어진 차별은 허공을 나는 새의 자취와 같다"라고 밝히고 있다.
오롯한 길에서 시비와 분별이 사라진 진여(眞如)라면 여기에 무슨 순서가 있겠느냐만은, 수행하는 길목에서 나쁜 버릇을 고쳐나가는 곳이라면 수행의 위치가 올라가는 것이 없지는 않다. 또 '오염되다' '청정하다' 는 차별을 모두 세속의 개념으로 분별하면 높고 낮은 단게로 나눈듯 하지만 '한마음'을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중생은 질그릇에 비유하고 보살은 은그릇에 비유하며 부처님은 금그릇에 비유하여 그 그릇들의 크기와 부피가 다르더라도, 하나 하나의 그릇 속에는 허공이 평등하기에 두루 가득하여 차별이 없는 것과 같다. 여기서 허공은 '한마음 법신'의 평등한 이치에 비유한 것이고, 모든 그릇은 중생의 근기와 수행의 위치가 다른 것을 비유한 것이다. 도에 본디 차별이 없건만 중생의 삶에 따라 차별이 있다.
(강설)
십지(十地)는 환희지(歡喜地) 이구지(離垢地) 발광지(發光地) 염혜지(焰慧地) 난승지(難勝地) 현전지(現前地) 원행지(遠行地) 부동지(不動地) 선혜지(善慧地) 법운지(法雲地)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