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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모음

장대명화 2013. 1. 7. 06:12

 

 

                           2013년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모음

 

신문사는 아직도 수필을 문학 장르에서 도외시 하고 있는 듯하다. 전국 신춘문예에 수필을 당선 시킨 신문사는 6곳 밖에는 없다. 수필 창작인구는 폭발적으로 늘고있는데 비해 너무 적은 작가를 배출시키고 있다. 시대를 만들어가는 것은 사람이다.

수필이 현대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장르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수필을 공부하는 작가님들의 몫이 아닐까 생각된다. 2013년 신춘문예 당선작을 묶어 올립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 멀구슬 나무 / 이명길

 

늦가을 호수는 푼푼하다. 물오리들의 행렬이 물 위로 미끄러지고, 둥치만 남은 물 버들은 잠잠히 하늘을 읽는다. 물속을 거꾸로 인 채 말라버린 연 대궁은 삶을 회상하듯 묵묵하다. 호수가 생의 지론이라도 강의 중인지 물이랑 사이로 바람을 일깨운다.

오랜만에 친구와 근교의 호수공원을 둘러본다. 활짝 열린 하늘은 새털구름마저 지웠다. 낱낱이 떨어지는 햇볕을 이고,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하다. 호수 에움길을 벗어나 언덕 위로 발길을 옮기니 이름표를 목에 건 나무들의 표정이 각양각색이다. 간간이 하늬바람이 스쳐갈 때면 신록의 수다가 들리는 듯하다.

언덕 위로 특별한 나무가 있어 눈길이 간다. 멀구슬나무 줄기에 왕벚나무가 업혀 있다. 뻐꾸기나무라 한다. 나무 아래 표지판에는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 뻐꾸기의 습성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설명해 두었다. 바람을 타고 온 왕벚나무 씨앗이 멀구슬나무의 둥치에 앉아 발아를 하여 싹을 틔운 것이다.

아버지는 바람 같았다. 하루를 집에 계시면 열흘을 밖에서 지내셨다. 바람처럼 매인 곳 없이 당신 마음이 이끄는 대로 흘러다니셨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은 안중에 없었다. 어쩌다 집에 오실 때도 가족보다는 손님 같아서 아버지 품에 안겨 응석 한 번 부려보지 못했다. 우리 남매는 아버지의 따뜻한 정을 몰라 늘 대하기가 낯설고 어려웠다. 그런 아버지를 떠올리면 늘 가슴 속에 모래바람이 일었다.

추운 밤이었다. 집으로 젊은 여자가 와서 아버지를 찾았다. 그녀는 털이 길게 누운 잿빛 코트를 걸치고 당당하게 우리 식구들을 훑어보았다. 그 앞에서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던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희미한 삼십 촉 전구 아래 두 여인 사이로 시간은 더디 흘렀다. 삽짝 밖 산 아래 공장 불빛이 밤새도록 시리게 반짝였다.

여자는 그날 이후로 방 한 칸을 차지한 채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어머니나 우리 남매의 눈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의 옆자리를 차지하려 애를 썼다. 화려한 꽃을 피우는 왕벚나무처럼 아버지를 맞는 여자의 표정은 화사하기 그지없었다. 어머니는 날마다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추스르기에도 버거워 보였다. 며칠 뒤 무슨 생각이었는지 아버지는 여자와 함께 집을 나갔다. 나는 그날 마음속으로 아버지의 행방에 밑줄을 그었다.

굽어 자라는 멀구슬나무에 온 마음이 잡혔다. 내 힘이 미쳐도 될 것 같으면 왕벚나무를 톱질해 버리고 싶다. 멋모르고 뿌려진 씨지만 단박에 패버려야 멀구슬나무가 온전히 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둘은 이미 한몸으로 잘 살고 있다. 덧니처럼 아무렇지 않게 뽑아질 것이 아니어서 억지로 떼어내면 상처를 남기게 될 것이다. 왕벚나무를 베어낸다는 것은 부질없는 사람의 생각일 뿐이다.

여자를 안 보고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집안 행사에 가면 어디서든 여자를 마주쳐야 했다. 반길 수도, 모른 체할 수도 없었다. 여자는 손바람이 좋아 내가 결혼할 때는 예단 음식까지 거들었다. 있듯 없듯 하면 좋으련만 그러지 못한 여자가 마뜩잖았다. 어머니는 그런 여자를 물끄러미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인들 오죽하겠느냐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낡아 허물어지는 등에서 억지로 여자를 내릴 생각도 않았다.

왕벚나무는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운다. 큼직한 꽃망울을 터트려 주변의 나무들 사이에서 으스대지만, 화려함은 잠시다. 여자에게도 왕벚나무의 무성한 잎처럼 단색의 시간이 길었다. 아버지는 함께하는 시간이 더해갈수록 화가 잦아지고 여자의 차림새에 까탈도 늘었다. 무엇 하나 반듯하지 않으면 보지 못하는 성정 탓에 곁의 사람을 불안하게 했다. 여자는 나날이 위태롭고 팽팽해지는 긴장 탓인지 나이보다 쉬이 늙어갔다.

어머니는 여자에게 모진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당신이 울타리를 제대로 못 지킨 탓인 양했다. 잠시 피었다 지는 꽃일지라도 제 구실을 마쳐야 후회가 없을 것인데 여자를 보면서 얼어 떨어진 꽃눈을 떠올리시는 듯했다. 미웠으나 미워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바람과 햇살에 생채기를 맡겼다. 입을 닫고 사는 일도 어머니 나름 세상을 견디는 방식이었다. 가슴에 고여 있는 것들을 한 치 곁에서 바라보았다. 물 흐르듯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했으니 궁색한 변명이 될까 겁이 났는지도 모른다. 외로움 속에 후덕함을 껴안은 충만의 삶은 뭉그러지지 않으려는 아우성이었다. 마음을 내린 어머니는 성숙한 영혼을 연습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야윈 손가락처럼 잔바람에도 파르르 떨리는 멀구슬 나뭇가지를 바라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옷장 속에서 이름자를 연습한 파란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아버지와 우리 남매에 매여 평생을 잊고 살았던 당신의 이름을 되찾고 싶었던 것일까. 애를 쓴 흔적만을 남겨두고 어머니는 그렇게 떠나셨다. 산수(傘壽)의 세월을 고이 접고 홀연히 떠나신 어머니의 위안일까. 멀구슬 나뭇가지의 떨림이 각다분했던 삶 자락을 들춰보는 어머니의 환한 웃음 같다.

멀구슬나무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왕벚나무에 자리를 내 주느라 등을 구부린 것인가 보다. 세상에 그냥 태어나는 것은 없다. 씨앗이 움을 트고 뿌리를 내리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또 연약한 움을 안아 제 몸을 열어주는 관계는 귀하다. 서로 다른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듯 멀구슬나무와 왕벚나무도 태생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멀구슬나무가 싱그럽다. 아름드리는 아니나 잎이 떨어진 늦가을 나무 사이에서 청정하다. 왕벚나무도 멀구슬나무의 등에서 꼿꼿하게 잘 자라 있다. 멀구슬나무에 화답하는지 왕벚나무의 붉은 잎이 여린 손짓을 한다. 비운 듯 꽉 찬 멀구슬나무의 편안함에 내 마음마저 환해진다. 멀구슬나무의 둥지에서 어머니의 아름드리 품이 보인다. 그 품으로 내가 고스란히 안긴다. <끝>

 

                       2013 전북도민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 간 맞추기 (최희명 작)

 

나긋나긋해진 노란 배추속이 음식이라기보다는 잘 찍은 사진이나 그림 같다. 붉은 양념으로 침범하기가 저어된다. 나이가 들수록 무엇이든 뻣뻣하게 구는 게 싫어져서 올해는 조금 오래 소금물에 담가 두었다. 얌전히 숨죽인 채 물기가 빠지고 있는 채반에서 여리고 노란 배추속잎 하나를 뜯어 양념과 함께 간을 본다. 나긋함 속에 고집을 드러낸 짠 맛이 혀를 제압한다. 나는 배추에 간을 맞췄는데 배추는 나긋한 몸으로 내 눈을 맞추었고 짠맛은 고스란히 내게로 돌아왔다. 충분히 조율하지 않고 강요하듯 맞춘 간은 그저 짜거나 싱거울 뿐 진정한 의미의 간은 아닌 모양이다.

누구나 첫걸음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 첫 아이가 그렇다. 최선의 선택이라 우기며 강요하거나 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개입한 부분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래서 그런가. 천성이 그런가. 성장을 완료했건만 세상으로 나가려하지 않는다. 말도 없다. 두문불출하는 우리 집 맏이 때문에 가슴이 늘 묵지근하다. 어쩌다 말을 섞으면 옹골차게 뱉어내는 짜디짠 반응이 소태 같다. 행여 내가 주입한 염기일지도 몰라서 소스라친다. 지금 저렇게 숨죽이고 있는 자식의 가슴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알지 못해 서성거린다.

어떠한 각진 맛도 만들지 않고 그저 세상에 존재하는 간을 조금씩만 받아들인 물질이나 사람은 조금 싱겁다. 자연과 가장 가까운 원형질이다. 본래의 자존심을 간직한, 동치미 국물처럼 슴슴한 맛은 허허실실 할 일 다 하는 둘째 아들이다. 엄마의 매운 맛도 형의 짠 맛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존재는 우뚝하다. 나의 톡 쏘는 말을 싱거운 대답으로 흡수해 버리면 덩달아 싱거워지고 만다. 쫓기지 않고 세상과 어우러져 사는 여유가 느껴진다.

드센 염기를 견디며 시집살이처럼 눌러 지낸 인고의 맛을 짠지를 통해 본다. 그러기에 석삼년을 묵묵하게 견딘 며느리처럼 얼마나 진득한가. 그러나 짜다고 투덜거릴 수 없는 이유는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독을 타 듯 물속에 다량의 소금을 집어넣은 건 우리가 아닌가. 투사처럼 튀어 오르지 못하도록 압재의 돌덩이를 얹은 것도 우리들이다. 제가 가진 모난 성질을, 물기를 소금물 속에서 완전히 탕진한 다음에야 비로소 해방된다. 그러나 빛을 보았다 하여 바로 세상과 만나지는 못한다. 어둠의 그림자를 희석시키는 과정이 남아 있다. 짠지는 시간이 만들어 낸 맛이다. 어머니의 손맛처럼 깊다. 그 인내의 향기로 언제 어디서나 수수한 중독성을 갖는다.

사랑, 일견 단맛 같지만 그것은 아마도 신맛일 듯하다. 처음에, 그리고 아주 가끔 벌꿀처럼 달콤하지만 뒤끝은 쓰기도 하고 떫기도 하다. 때론 예방주사처럼 따끔하게 매운 맛도 가르쳐준다. 그러나 늘 가슴 속에 침이 고이는, 그래서 사랑은 신맛이다. 삶에 있어 그만큼 당기는 유혹이 또 있을까. 유혹을 받아 들여 관계를 만들고 관계의 지속으로 열매를 만드는 과정이 얼마나 새큼한가. 기쁨과 아픔과 슬픔이 시간과 함께 간을 맞춰 버무려지면 드디어 숙성된 과일 효소처럼 깊어질 것이다.

요사이는 약방의 감초처럼 단맛이 모든 간을 맞추는데 끼어든다. 이제 사람들은 약간의 단맛과 친절과 칭찬은 예의라고 생각한다. 때로 단맛은 지나친 소금과 결탁해 미각을 호도하기도 하고 장부상으로는 절대 적법한 이윤을 남기기도 한다. 그리고 달콤함은 쓴 맛을 수반할 때 그 느낌이 상승한다. 참고 또 참은 시간 뒤에 있거나 돌이킬 수 없는 낭떠러지의 앞에 있다. 그래서 단 맛은 두 얼굴이다.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살면서 얼마나 수도 없이 매운 맛을 보았는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덤볐다가 얼마나 눈물이 쏙 빠지게 혼쭐이 났던가. 시간은 가고 기억도 흘러 상황이 재현되면 본능처럼 욕심 하나로 기어이 매운 맛을 다시 보고야 만다. 그래서 삶은 영원히 미완성이다. 알고 싶지 않은 자신의 한계를 어쩔 수 없이 알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꼬리를 감추는 톡톡한 맛이다. 어찌어찌 정신 차려 살다가도 는적거리는 현실에 비위 상할 때가 있다. 약이 바짝 오른 청양고추 몇 개 된장 듬뿍 찍어 먹고 나면 속이 개운해지는, 삶이란 그런 것인가. 늘 일깨워 가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 각지고 헛도는 톱니바퀴처럼 각각인 성질을 도와 한 곳으로 모이게 하는 마력이 있다. 조미의 힘이다. 예인이다. 자신의 존재가치가 미미하다고 생각될 때, 떨어진 갓끈이 못내 아쉬울 때,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데 주변이 너무 멀 때, 받은 것 없이 얼마나 관대한가. 준 것 없이 얼마나 고마운가. 인연을 존중하지 않거나 존중하는 방법을 모르는 관계를 얼버무려 돕는다.

바람이 되어 사라져 버린 옆지기는 사는 일에 늘 시들거렸다. 새파랗거나 샛노랗지 못하고 시무룩하게 빛이 바래 있었다. 간도 되지 않고 양념도 먹히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건 같이 사는 사람에게도 그 상태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매일 다른 래시피로 그에게 맛을 내 보려 했다. 그러나 ‘네 맛도 내 맛도’ 모르는 듯 그는 시종일관 간이 드는 걸 거부했다. 하나의 요리로 가시버시 섞이는 방법을 몰랐다. 그는 바람으로 떠돌고 나는 무말랭이처럼 비틀리고 메말라갔다. 시간에 의해 얼마쯤 생각이 숙성된 지금에 와서야 나의 양념이 너무 강했을 수도 있겠다 싶어진다. 간이 되지 않으면 한번쯤 익혀볼 수도 있었겠다. 기다림으로 맛을 내는 짠지에게처럼 보채지 않는 진득함도 필요했겠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지만 적용할 대상이 아직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기로 한다.

간은 시간이고 관계이며 관심이다. 어떤 요리가 완성 되었다 해도 보편성 원리의 으뜸은 간이 맞아야 한다. 소금이 빛과 비견되는 이유다. 상대를 너무 지치게 해도 내가 너무 지쳐도 사람 사이 간은 맞지 않을 것이다. 착한 인사만 주고받는 사이는 설탕으로만 간을 맞춘 호박죽 같다. 아픔도 나누고 미움도 삭힐 수 있는 사이는 소금으로 완성된 단맛 같은 것 아닐는지. 조금 짜게 간이 된 김치 사이에 박아 두는 넓죽한 무처럼 서로를 알맞게 이어주는 존재이기를 소망해본다.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 빨랫줄과 바지랑대 / 이두래

 

따사로운 봄볕이 청마루에 성큼 다가들 때쯤, 빨래를 끝낸 어머니는 청마루에 걸터앉아 나를 불렀다. 머리를 감고 옷도 말끔하게 갈아입은 나를 무릎에 뉘고 귀를 후벼주셨다. 어머니의 무릎을 베개 삼고 누운 내 동공으로 물기 걷혀가는 빨래들이 꽉 차게 들어왔다.

마당을 가로질러 빨랫줄이 길게 걸쳐져 있었다. 할머니의 흰 고의적삼, 아버지의 푸르죽죽한 바지, 어머니의 얼룩덜룩 일 바지, 우리들의 푸르뎅뎅한 옷들과 발꿈치를 기운 양말, 그리고 가슴이 볼록해진 언니들의 속옷을 감춘 옷들 위에 봄볕이 걸렸다. 봄볕은 색고운 꽃들을 피워내고서도 우리 집 빨랫줄에 걸린 옷들의 때깔만은 어쩌지 못하는지 그저 그런 색 바랜 옷들뿐이었다.

옆으로 드러누운 놈, 철봉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린 놈, 무릎이 꺾여 널린 아버지의 바지, 허수아비처럼 헤벌쭉 걸린 놈, 마악 철봉이라도 넘을 듯 짧게 걸린 동생들의 바지 등 하여튼 제 깜냥대로 빨랫줄이 축 늘어지게 걸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마당가 나뭇가리 위에 세상은 나 몰라라 번듯이 드러누운 빨래도 있었다.

우리 집 빨랫줄은 다른 집들보다 길었다. 식구가 많은 탓도 있었을 게다. 여름엔 마른빨래와 젖은 빨래가 시나브로 걷히고 내걸렸으며 겨울이면 옷들마다 고드름을 매단 채 굽힐 줄 모르는 뻣뻣한 자존심처럼 며칠이고 걸려 있었다. 비오는 날을 빼고는 빈 빨랫줄을 보는 날이 드물었다. 비가 오면 빨랫줄에 앉아 놀던 제비들이 처마 밑 제집을 찾아들 듯 빨래들도 처마 밑에 걸린 간이 빨랫줄에 빼곡하게 피신을 했다. 하지만 마당의 빨랫줄은 바람 비 눈서리를 일 년 내내 맞으며 마당을 지키고 있었다.

빨랫줄은 아버지를 닮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들은 아버지의 빨랫줄에 걸려 나부끼는 옷들이었다. 아버지의 어깨와 팔에 매달려 그네를 뛰고 철봉을 넘고 드러누워 뒹굴며 놀았다. 옷들의 무게에 빨랫줄이 자꾸 늘어져 가면 어머니는 바지랑대를 다시 높이 곧추세우셨다. 지게 위에 얹힌 짐이 무거워올수록 다시 고의춤을 추스르고 지게 끈을 고쳐 메고 지게 작대기를 바투 거머쥐듯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안간힘에도 바지랑대는 번번이 휘청거렸다.

아버지는 고만고만한 조무래기들이 어깨와 팔에 오종종 매달려 놀 때는 흐뭇한 얼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빨랫줄에 걸린 옷들이 많아지고 바지 길이가 길어질수록 위태위태한 바지랑대는 쉬이 휘청거리고 어머니는 고임돌까지 받쳐 바지랑대의 힘을 덜어보려 애썼다. 그래도 바지랑대가 바들바들 떨리면 힘겨운 짐을 나누어 짊어지듯 어머니는 바지랑대 하나를 더 세웠다. 아버지의 어깨가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처럼 안타까워 보였을까. 또 하나의 바지랑대는 어머니가 이룩하는 다릿발, 손을 맞잡고 험한 바다를 건너기 위한 다리 하나가 놓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어머니는 난생처음 나에게 새 옷을 사주셨다. 빨간 스웨터에 초록색 나팔바지였던 새 옷의 그 환상적인(?) 색상의 조화가 나를 마냥 들뜨게 했다. 영락없는 한 송이 꽃이 아닌가. 나는 언제나 그 새 옷 한 벌만 입고 다녔고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겨우 옷을 갈아입었다. 어머니가 깨끗하게 빨래를 해서 빨랫줄에 널어놓으면 마루에 걸터앉아 다리를 달랑거리며 봄바람에 나붓나붓 흔들리는 옷을 흐뭇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새 옷이 마르면 빨리 갈아입을 요량으로. 그 이후로 어머니가 새 옷을 사주었던 기억이 내겐 없다. 언니들에게 물려 입어 언제나 색 바랜 옷들 사이에 눈부시게 환한 한 벌의 새 옷은 지금도 잊히지 않고 강렬한 색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나는 어려서 빨랫줄에 빨강, 파랑, 노랑의 새 옷들이 화려하게 내걸릴수록 아버지의 바지랑대는 더 힘들게 휘청댄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철들 무렵의 어느 날, 세찬 바람이 불고 바지랑대는 심하게 흔들렸다. 아버지는 몹시 취해 집으로 돌아와서는 핏줄 도두라진 붉은 얼굴로 온몸의 기운을 가슴에 모아 토악질을 하셨다. 무엇이 아버지의 가슴을 저리 쥐어짜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우리들의 지주였고 지축이었던 아버지가 ‘쿨렁쿨렁’ 토악질을 할 때는 우주의 지각변동이 시작된 듯 세상이 요동쳤다. 그 반동은 우리들을 어지럽게 흔들어댔고 천방지축이던 우리들에게 물기 걷혀가는 빨래들처럼 철이 들게 했다. 아버지의 처진 어깨, 휜 등을 바라보며 스스로 가벼워져야 함을 깨달아 갔다. 흙에 패대기쳐지지 않고 스스로 사뿐히 내려서는 날까지 아버지의 어깨는 간간이 전해지던 흔들림조차 유희에 지나지 않는 무풍지대였다.

어머니의 무릎에 누워 꽃같이 빨갛고 푸른빛, 색을 잃어버린 무채색 영상들이 섞여들며 내 머리통은 봄볕 아래 졸고 있는 노란 병아리처럼 자꾸 봄 속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봄볕에 가랑가랑 말라가는 빨래들처럼 나는 나른한 꿈길에서 나부끼고 마당엔 빨랫줄이, 속이 텅 비어 버린 대나무 바지랑대가 십자가처럼 서 있었다.

남편이 평소보다 술을 과하게 마시고 현관을 들어서면 가슴에 한 줄기 찬바람이 싸하고 지나간다. ‘아버지의 술잔은 반이 눈물’ 이라는 말을 알고부터다.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남편의 대취(大醉)에 잦아드는 가슴은 그를 붙들어 세운다. 안색을 살피며 바라본 그의 어깨에도 여지없이 삶의 무게가 빼곡하게 걸려 있다. 말없는 토로(吐露), 그의 휘청거림을 바라보면서 선뜻 짐을 나누어 짊어지기에 나는 많은 주저와 입술을 깨무는 용기가 필요했다.

몇 년 전, 십오 년 전업주부를 탈출했다. 유년의 외적 허기를 채워주기에 안성맞춤인 현대인의 소비 천국이라 할 수 있는 백화점이 나의 일터가 되었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날렵하고 맵시 있는 옷들, 물감을 어떻게 버무리면 저렇게 곱디고운 색채가 나올까 싶은 옷이며 온갖 명품과 보석들이 눈만 돌리면 유혹의 눈길을 보낸다.

그뿐이랴. 여자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면 명품 가방 하나쯤은 있어야 하고 모피코트를 떨쳐입고 연말 모임에 참석해야 격이 산다는 둥 카드 할부로 장만하라는 둥 유혹의 말들도 난무한다. 장만이란 내 집 마련이나 가전제품을 들일 때나 쓰는 말인 줄 알았는데 몸치장에 장만씩이나 해야 한다니 난 여자가 아닐까. 그 어느 것 하나도 갖지 않았다. 갖지 못한 겐가. 어느 쪽이든 내가 그들의 유혹에 초연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을 가진다고 행복할까 싶은 내 마음이다. 그것은 잠깐의 만족일 뿐 행복이 아님을 나는 안다.

유년의 나의 집 빨랫줄을 떠올린다. 남편의 가뿐한 모습이 좋다. 어머니가 그랬듯 난 남편 곁에 나란히 선 바지랑대가 되고 싶다. 우리의 빨랫줄에 명품이 내걸리고 비싼 옷이 나부낀다면 우리 집 경제의 축이 기우뚱할 것은 예나 지금이나 자명한 사실이다. 남편의 등이 휘지나 않았는지 가만히 쓸어볼 일이다.

 

                     2013 창조문학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민 들 레 / 송 종 태

 

등황빛 초롱이 불을 밝혔나. 배꽃 흐드러진 과수원 고랑으로, 청량한 바람이 대야에 담아 놓은 치자 물빛을 순식간 풀어놓는다. 하얀 하늘과 노란 바다가 손을 맞쥘 때면 갓 깨난 연노랑 형광 나비가 하르르 날아오른다. 민들레는 아무래도 홀로 핀 모습보다는 어우러진 꽃차례를 서로 움 쥐고 얼굴 비벼대는 앙증스런 모습이 장관이다.

농막 바람벽 아래 민들레 한 송이가 노랑나비처럼 조심스레 앉아있다. 마치 산모롱이 외딴집 사립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촌로처럼, 애처롭고 적막하다.

몇 해 전, 인적이 드문 철로 옆길을 걸었다. 철로 분기선이 엿가락처럼 휘어진 광장으로 등황빛 물결이 휘감듯 흐르고 있었다. 너무 뜻밖의 모습에 당황했다. 민들레가 철로 밑 자갈밭을 점령하고 길게 늘어진 철길을 따라 화원처럼 군영을 이루고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풍경에 황홀하다는 생각보다는 두려움 같은 공포가 느껴졌다. 무슨 연유로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한(恨) 깃든 꽃대를 곧추세운 채, 날 선 기세로 저토록 총포를 하늘로 향하고 있는지, 발밑을 파고들어 금방이라도 온몸으로 노랑 물감을 풀어놓을 것만 같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여린 새싹이 저리도 무지막지한 힘을 지녔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봄에 피어나는 초화(草花)는 그저 안쓰럽고 귀엽고 곰살맞은 모습에 행여 다칠세라 발걸음마저 조심스레 떼는데 민들레의 기세는 예상 밖이었다. 잔뜩 긴장된 마음이 평심을 찾고 나서야 민들레가 귀화 식물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토종식물이 양반집 규수라면 귀화식물은 여염집 아낙이다. 생존력이 강하고 흥부네 가족처럼 많은 식솔을 거느리며 살아가는 특성이 있다. 그 연유는 타향에서 낯선 환경을 견뎌내며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귀소본능의 발로가 아닐는지. 객지에서 한평생을 살아가는 내 처지와 엇비슷한 민들레가 왠지 측은하여 연민마저 살포시 고개를 든다.

새 직장에서다. 중국과 동남아 각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젊은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철길에 섬뜩하게 핀 민들레 형상이 스쳐 갈 때다. 시야로 들어오는 한 사람을 보았다. 섬돌아래 기대어 고즈넉하게 피어난 민들레처럼 한적한 농촌의 쓸쓸함이 묻어나듯, 어디선가 봄직한 모습이다. 굽은 허리와 왜소한 체구가 졸들어 보이지만, 해맑은 미소 속으로 비치는 주름진 얼굴은 지난한 세월이 담겨 있다. 안경 너머로 커다란 눈은 서그러워 보이나, 앞니가 빠진 탓인지 제 나이보다 대여섯은 위로 보이는 오십 대 중반의 수더분한 사내다.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객지에서 옛 친구를 조우하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친근하게 당기는 서근서근한 성격 때문인지 곧 친숙해갔다.

한중수교를 맺은 이후 돈벌이를 찾아 고국으로 나왔다는 그는 한국 생활이 지쳐 보이고 고독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내게 정신적 의지를 많이 하는 듯 출퇴근 시에는 꼭 들러 가곤 했다. 그런 그가 늦어지면 궁금증이 생기기도 하고, 몇 날을 못 보면 감치도록 야젓한 그가 불연 듯 떠오르기도 하였다.

그 친구는 귀화 수습 중이라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불안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여생을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닌 듯싶다. 귀화에 관한 소견을 피력하기가 조심스럽고, 신중히 고심하여 내린 결정인지 걱정이 앞선다. 반세기를 지내온 긴 세월인데 인연을 모두 내려놓고 새로이 삶을 시작함은 결코 용단 내리기가 쉽지는 않았으리라. 미련 없는 여정일지라도 풋풋한 정은 남아있을 터, 과거를 묻어버리고 새로운 사람들과 새 문화와 타협하며 산다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 듯했다.

생장점이 멈춘 늦가을 뜰에 한 송이 민들레가 설핏하게 피어있다. 엄동설한을 앞두고 뉘엿한 햇뉘를 쪼이며 슬픈 몸짓으로 왜 그리도 시리게 웃고 있는지. 그 자태가 흡사, 흑룡강 성 조선족 마을을 떠나온 그 친구를 보듯 가슴으로 시린 바람이 불어온다.

일제 강점기, 그들은 고국을 등에 메고 드넓은 초원과 강이 흐르는 곳에 민들레처럼 뿌리를 내렸다. 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며 서로 의지하면서 귀화인이 되었을 게다. 그들은 한국이 고국이면서도 이방인이 되어 다시 귀화인으로 살기 위해 일터를 잡고 한글 공부를 하면서 새로운 문화와 친숙해지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사회는 귀화인을 고운 눈으로 보지를 않는 듯하다. 조선족 동포를 방랑벽 있는 길손쯤으로 치부하고는 한다. 민들레 경우도 그렇다. 무슨 연유인지 사람들은 민들레를 화초라 부르지 않는다. 노랑 저고리를 곱게 입고 자태를 뽐낼라치면 천한 주제에 건방지게 안방 규수나 된 양 앉아 있느냐며 핀잔하기 일쑤다. 그뿐이 아니다. 화단을 가꾸는 정원사는 웬 잡초가 끼어드느냐며 뽑아내어 내동댕이치고 만다. 타국에서 야생초로 살아온 은근과 끈기로 버려진 황폐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한(恨)을 쏟아내듯 총포를 활짝 벌린 채 속절없는 헛웃음으로 살아가는 민들레가 곧 그들이다. 따지고 보면 고향을 등지고 객지 타향에서 살아가는 우리 또한 이방인이 아니던가.

말수 없는 그는 속내를 보이는 법이 없다. 힘들어도 아파도 혼자서 삭이고 홀로 풀어가는 것 같다. 오랜 세월을 자립하며 견뎌온 습성이지 않나 싶다. 교대시간보다 30분은 먼저 출근하여 주변 정리 정돈을 하고, 퇴근 또한 남들보다 항상 뒤늦게 한다. 그는 일머리를 도스를 줄을 알고 있었다.

며칠 후 샤워장에서 그를 만났다. 항상 구석에서 몸을 씻던 그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넨다. 물에 젖은 왜소한 체구에 비해 유난히 큰 눈은 그렁하게 눈물이 맺혀있었다. 몸이 불편한가 싶어 가리고 있는 손을 바라보니 군데군데 붉게 상처가 나 있었다. 제품이 무너져 내려 다쳤다면서 옆구리 통증을 호소한다. 작업반장에게 보고했느냐는 질문에 아무런 대꾸가 없다. 직장을 잃을까 걱정이 앞서 숨기고 있는 듯했다. 겁먹고 있는 그에게, 보고하고 치료를 받도록 권유하였다. 그제야 고개를 끄떡이며 눈물을 애써 감추려는 모습을 훔쳐보던 나는, 불에 덴 듯 눈시울이 달아오름을 숨길 수가 없었다.

둑길이나 빈들에 하얗게 띠를 두르듯 피어나는 망초는 이미 토종 식물처럼 우리 곁에 자리하고 태고의 설움을 토해 놓듯 달빛 따라 개울물처럼 흐른다. 귀한 화초 취급은 못 받지만, 봄 들녘을 수놓은 민들레 역시 약초로 뭍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오래다. 어린이 동요 속으로, 한약방 탕제로, 늙수그레한 아낙네 봄나물 바구니로, 연인의 카메라 필름 속으로 용해되어갔다. 문득 그에게, 민들레처럼 사랑받고 인정받는 귀화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민들레 가득 담은 꽃바구니를 선물하고 싶다.

다행히 그 친구는 귀화 열망이 강렬했다. 한글 습작 수준은 내국인 못지않은 수준이었다. 단,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귀화 시험에는 애국가를 4절까지 불러야 하는 과정이 있는데, 그는 애국가를 부르지 못한다고 한다. 가사를 모르는 게 아니고 노래를 전혀 부르지 못한다고 한숨을 내쉰다. 노래가 좋아 한국노래를 많이 듣는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는 내지를 줄을 몰랐다. 받아드리기는 하지만 내뱉지를 못하는 것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마음이 아리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와락 손을 잡았다. 그도 나도, 참아내던 응어리진 설움을 터트렸다.

세상살이를 어찌 순응만 하며 살아왔단 말인가, 내지르지 못하고 가슴으로 삭이고 안으로 접으며 긴 세월을 견뎌온 타성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었다. 웃을 줄은 알지만 화낼 줄을 몰랐다. 들을 수는 있지만 인지한 사실을 전할 줄을 몰랐고, 입이 있어도 입은 받아 삼키는 역할 뿐이다. 터질 듯 벅찬 가슴을 전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표현하는 행위를 포기하고 살아왔다는 방증이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아남기 방편일 테고, 조국 없는 민족의 설움이 그를 함구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반문하고 싶다.

알에서 올챙이로 변이되고 올챙이는 개구리로 변이되는 것이 성장이다. 그런데 그는 올챙이에서 개구리로 변이되는 과정에 우는 방법을 외부적 충격으로 잃어버린 것이 아닐지 싶다. 그런 그를 보면 마치 나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중학을 졸업하고 미지의 세계인 서울로 올라와 시행착오로 몸부림친 40년이 아니던가. 낯선 골목 담벼락에 기대어 가로등 불빛 바라보며 터벅이며 걸어온 나날들. 목마른 갈증으로 길손처럼, 때론 집시로 이곳저곳 기웃대며 흘러 흘러서 다시 머문 땅. 고향이 지척인데 돌아가기엔 세월이 그은 철조망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다. 사위어간 육신과 망울진 기억들이 타인의 회고록처럼 낯설기만 하다. 한 줄금 비를 맞으며 무지개 뜬 하늘을 고대하던 이루지 못한 꿈은 뉘엿한 저녁노을 품으로 서서히 잠기고 있다.

오늘 아침은 된서리가 서설처럼 내렸다. 풀잎 바스러진 마른 들판에 철 잃은 민들레가 속절없이 피어나 꽃대를 웅크리고 바르르 떨고 있다. 꽃차례는 제 살던 고향이 그리운 건지 방울방울 눈물을 머금고 있다. 무슨 말을 전하고 싶은 걸까, 시린 꽃잎은 총포를 반쯤 벌린 채 하늘을 향해 토해 낼 듯 애절하다.

세상은 이방인이 만들어 가는 민들레 영토다.

 

                       2013 영주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 이명 (耳鳴) /이상렬

 

남겨진 풍경마다 어둠이 내렸다. 또 밤이다. 부산하게 오가던 골목에 인기척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흐릿한 형체로 남겨질 무렵에서야 서재로 돌아왔다. 나의 지문을 화석처럼 안고 있는 빼곡한 책장의 책들, 수많은 생각과 번뇌를 기억의 저편으로 잠재우게 했던 책상, 가장 가까이에서 체온을 나누며 몸을 의지한 의자, 모든 풍경이 오랫동안 묵혀 두어 익숙함에도 오늘따라 낯설어 보인다.

의자에 앉아 두 손을 책상 위에 모은다. 하루가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오늘과 내일이 교차된다. 생각의 덩어리가 커지고 한없이 깊어지는 시간이다. 때론 마음의 향방이 거미줄처럼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혼돈스러워질 때면 조용히 눈을 감는다.

현실과 멀어져 가는 이상들은 꿈결인지 생각인지도 모를 무아無我의 세상으로 나를 몰고 간다. 빛과 파장, 소리와 형태, 느낌과 흐름이 함께 공존하는 곳.

윙-, 윙-, 윙-, 삐---, 한 줄 소리가 바늘처럼 뇌리를 뚫고 지나간다. 누군가가 라디오 주파수를 돌려대며 이 밤을 지새울 작정인가 보다. 쉽게 사라지지 않는 소리를 피해 더 깊은 곳으로 몸을 옮긴다.

숲이다. 생명이 움트기 위해 잠시 웅크리고 있는 시간은 사방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둡다. 고요하다. 먼지 하나 일어나지 않는 숲의 적막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길 위로 천천히 발을 옮겨 놓는다. 풀들이 몸에 부딪힌다. 조용하면 더 뚜렷해지는 것이 소리일까. 스윽-, 신경을 곤두세운 소리들이 나를 올려다본다. 지금 나는 불청객처럼 흘러들어 숲의 고요를 깨뜨리고 있다. 찌르르-, 찌르레기가 울고, 매앰 맴-, 끼르끼르-, 매미, 귀뚜라미가 사방에서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둘러보아도 그들의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

땅이 울렁이고 사방이 흔들린다. 온 숲을 밀어붙이는 굴착기 소리, 찌익찌익- 쇠를 갈아내는 잔인한 소리들이 나를 공격한다. 주저앉아 귀를 틀어막아도 소용이 없다. 그들은 나를 용서하질 않는다. 모두가 나를 향해 원망하고 있는 듯하다.

시간을 따라 얼마나 몸부림을 쳤던 걸까. 숨통을 죄어오던 숲이 멀리 있음을 직감으로 알았다. 여전히 사방은 실루엣으로만 형체를 내보이고 있다. 어디선가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난다. 뻗으면 손에 닿을 것 같은 거리에 물결이 서 있는 듯하다. 차르르-, 수면은 잔잔했다. 바다의 놀음에 심취되어 몇 발자국 옮겨 놓는다. 차르르르-, 자갈을 밟는 발자국 소리에 파도가 나의 침입을 눈치 챈 듯했다. 쏴아-, 나를 집어삼킬 듯 고개를 쳐들고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높이 일어선 파도는 위협이라도 하듯 달려와 바위에 장쾌히 부서지며 제 형체를 드러낸다.

자리에 누웠지만 소리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루 중 마지막 고비다. 깊은 밤이면 더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지쳐 몸은 바닥으로 스르르 녹아든다. 소리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든다.

첫 소리의 여행이 시작된 것은 스무 해 전이었다. 어느 날 귓가에 생면부지의 수상한 객이 찾아왔다. 처음엔 그저 조금 거슬릴 뿐 고통은 아니었다. 시간이 가면 잠잠해지리라 믿었지만 서서히 마수를 뻗어 온갖 소리로 제 본색을 드러냈다. 잠시 잠잠하다 싶다가도 몸뚱이가 지치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정신을 교란시킨다. 그럴 때마다 현기증이 일어 바닥에 주저앉곤 했다. 불면의 날이 지속되면 될수록 내 영혼은 소리로부터 유린당하고 있었다.

얼마를 더 견디면 오늘이 지난단 말인가. 오늘만 참으면 내일이 올까. 동 트기가 얼마나 힘에 겨운가를 이명을 지독하게 앓아본 사람은 알리라. 새벽을 깨우며 일어날 때, 이제 제발 멈추길 바라는 그 희미한 기대가 깨어지는 순간, 오죽했으면 연명延命의 꿈마저 풀어버리고 싶은 생각도 해보았으랴.

세상의 소리들은 물속에서 들려오는 바깥의 소리처럼 웅웅 거렸다. 바닥까지 가라앉은 마음은 혼탁해져서 표정마저 일그러뜨렸다. 진저리를 치며 돌아서도 메아리치는 건 매한가지였다.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소리들은 삶의 흐름을 건드리며 나를 조롱하기까지 했다. 세상의 소리가 자유자재로 나부대는 낮에는 그나마 잊을 수 있다지만, 밤은 쇠사슬에 묶인 듯 고통의 세계로 끌려가고 있었다. 칭칭 감고 있는 지긋지긋한 소리의 사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산 능선 위에 낮달이 희멀겋게 걸려 있던 어느 가을, 밤새 소리에 난타 당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초점 없는 눈, 맛을 잃은 입, 세상 어디에서도 대접 받지 못할 야윈 몸으로 버스에 올랐다. 창문으로 내려다보이는 아양교의 물결은 단정했다. 잠시 고요에 빠져있을 때 다시금 집채만 한 파도가 밀려오는 듯 요란했다.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목으로 넘어가는 뜨거운 눈물을 머금고 힘없이 무너지는 한 남자가 차창 속에 있었다. 결핵을 앓아 핏기 없고, 퀭한 두 눈과 광대뼈만이 덩그러니 자리 잡아 얼굴임을 말해주던 남자, 깡마른 체구에 폐 구석구석까지 균들에게 내어준 그 남자는 어쩌면 물결의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가고 싶었을는지도 모른다.

시간은 고통도 잠재우는 묘약이었을까. 소리와 동거하는 스무 해 동안 고목이 되어가고 있는 듯했다. 나는 아직도 건재하다. 그러고 보니 군데군데 옹이 여럿 품고서 중년의 고개를 넘어가고 있음이 참 다행스럽다.

소리는 단지 소리일 뿐이다. 마치 실체 없이 평생을 따라다니는 그림자와 같은 것, 그것은 허상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 숱하게 나를 위협했다지만, 따지고 보면 단 한 번도 나를 문밖으로 내몰지 못했다. 내 안에서 만든 소리는 그럴 힘이 없다. 안에서는 소리의 폭군이라지만 바깥에서는 맥을 못 춘다. 그래서 소리는 무형의 포효다. 나를 찢고 파괴할 발톱도 가지지 않았었다. 어쩌면 그간 내 스스로 자신을 얽어매며, 가두며 더 크게 고통의 소굴로 내몬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도 오랜 세월 같이 살다 보면 벗이 되는 것인가. 이제 나는 이명에 대한 익숙하고도, 자연스러운 생존법을 터득했다. 처음엔 금은방의 저울처럼 미세한 소리의 무게에도 휘청거렸으나, 이제는 넉살좋고 인심 후덕한 재래시장의 방앗간 저울처럼 큰 보릿자루 서너 개쯤 올려놓아도 거뜬히 소화해내는 여유가 생겼다. 이명은 나를 산 채로 굴복시키기 위한 덫이 아니라, 어쩌면 긴 생의 여정을 함께 걸으며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 동반자였는지도 모른다.

요즘 이명을 대하는 내 뱃심이 제법 두둑해졌다. 소리를 삼 시 세 끼로 먹고, 내 걸음의 디딤돌로 여기며 인생의 강물을 저벅저벅 걸어 여기까지 살아서 다다랐다. 우리네 삶이 언제 고통이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노력하여 바꾸지 못한다면 받아들이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 옳으리라. 뼈에 사무치는 아픔보다 더 위대한 것은 그것에 대한 건강한 해석이 아닐까.

그랬다. 이명은 세상과 나를 단절시키는 장벽이 아니었다. 이명耳鳴은 이명異鳴을 듣게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내 귀의 소음이 커질수록 상대의 세밀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리라. 온갖 고민을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의 소리가 이윽고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얼마나 아픔이 서려있는지, 무거운 인생의 짐이 얹혀 욱신거리는지 이명耳鳴을 앓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사르륵 사륵, 소리가 먼저 일어나 여명을 밝힌다. 오늘도 긴 소리의 여행길에 오른다. 이젠 제법 여행을 즐길 배낭 하나쯤 거뜬히 꾸려 나선다. 숲을 걸으며 만나게 될 바람, 물, 새, 매미, 귀뚜라미들, 바다가 들려주는 파도의 속삭임,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귀 기울이고 들어볼 참이다. 때로는 나의 이야기도 그들에게 들려 줘 볼까 한다. 모든 것이 허상이어도 좋다. 남들과 공유할 수 없는 소리들이 내 안에 기거하는 동안 나는 더 넓어지고, 더 여물어지는 여행을 떠날 것이다. 아프지만 깊은, 쓸쓸하지만 아직도 가야 할 여행을.

 

                         2013 동양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걱정인형 -윤승원

 

큰 고민 덩어리를 손톱만큼 작게 만드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작은 인형이 정말 아이의 걱정을 해결해줄 수 있을까? 자투리 천으로 팔다리를 만들고 몸통과 머리에 솜을 넣으니 드디어 인형이 완성되었다. 손톱만한 크기라 쉬울 줄 알았는데 바느질이 생각보단 더디고 어려웠다. 나는 정성이 모자랄까봐 한 땀 한 땀 마음을 쏟았다. 웃는 표정이어선 안 된다는 속설이 있어 마지막으로 무표정한 얼굴을 그려 넣고 나니 어깨와 손가락이 결리고 아파왔다.

친구와 다투고 난 뒤 이대로 영영 멀어지면 어떻하냐며 걱정이 태산 같은 아이를 위해 시작한 작업이었다.

“에게! 이렇게 조그마한 인형이 어떻게 걱정을 덜어주지? 내 고민을 해결해주려면 인형이 백 개는 더 있어야겠다.” 지켜보던 아이는 지루한지 하품을 물었다.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시작한 작업이 어느새 밤이 깊었다. 걱정인형이 손톱만큼 작은 이유는 아무리 큰 걱정과 많은 걱정도 고만큼 작게 만들어서 내다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걱정인형아, 우리 막내 걱정을 말끔히 덜어주렴”

기도를 하며 잠든 아이의 베게 밑에 가만히 인형을 넣어주었다.

과테말라 고산지대에 살고 있는 인디언들에게는 옛날부터 ‘걱정인형(Worry Doll)’의 풍습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할머니가 1.5센티미터 정도의 손톱만한 인형을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잠들기 전에 어려운 문제나 속상한 일을 인형에게 말한 뒤 베개 밑에 넣고 자면 잠든 사이에 인형이 아이의 걱정을 멀리 내다버린다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난 아이는 자신의 걱정거리가 없어진 걸 알고 얼마나 기뻐했을까. 아이에게 친밀한 인형을 사용하여 꿈과 희망을 심어준 인디언의 지혜가 엿보인다.

결혼생활은 결코 평탄치가 않았다. 막내를 막 낳고 남편의 사업이 부도가 났다. 집달리가 들이닥쳤고 셋방을 전전했다.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죽기보다 힘들었다. 오늘이 저물면 내일이 걱정이었다. 막내가 중학생이 되기까지 집안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내가 산 삶은 걱정의 연속이었다. 하나의 걱정이 해결되면 또 다른 걱정이 얼굴을 내밀었다. 남편은 그 후로 몇 개의 사업을 더 시도 했지만 빚은 산더미처럼 늘어났고 남편은 폐인처럼 변해갔다. 빚쟁이들이 셋방을 차지하고 눕기가 일쑤였다. 나는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걱정의 늪에 빠져 익사직전이었다.

어느 날 이대로 삶을 포기 해야겠다 생각하고 유서를 적어놓고 아이들이 잠든 방으로 들어갔다. 두 자매는 세상의 걱정 같은 건 아랑곳없다는 듯 얼굴에 미소까지 띠며 자고 있었다. 막내는 고단했는지 다리 하나를 제 언니의 배에 걸쳐놓고 있었다. 큰 애가 무거운지 떠밀어내면 막내는 잠시 뒤 다시 다리를 올려놓았다. 자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얼마나 천진스러운지 나는 방문을 닫고 돌아와 유서를 찢어버렸다.

우리나라 전통베갯잇에는 꽃과 나비며 새가 수놓아져 있다. 부귀와 장수를 바라는 기원에서 비롯된 장식은 어쩌면 그것들로 마음의 근심을 덜어 보려한 것은 아닐까. 기복(祈福)의 성향이 강한 베갯잇의 자수는 근심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그 바탕을 이루었을 것이다. 걱정인형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인디언의 지혜와 우리 선조들의 베갯잇의 자수는 궁극적으로 같은 의미에 닿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세기의 거장 나폴레옹은 평생 자신의 키가 왜소한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한다. 천하를 차지한 진시황은 죽음이 두려워 불로장생의 처방을 구했고 중국의 절세미녀 양귀비도 평소 자신의 늙음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걱정 하나 없이 사는 삶은 없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든 크고 작은 걱정은 가지고 산다. 어떻게 보면 걱정은 즐거움과 함께 삶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인지도 모르겠다.

미국의 정어리 운반차량들은 이동하는 동안 수족관에 상어를 넣어둔다고 한다.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가야 하는 수족관 안에서 정어리들은 쉽게 지쳐서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대다수가 죽어버린다고 한다. 그러나 상어를 함께 넣으면 정어리들이 긴장을 하게 되어 장거리 이동에도 싱싱한 활어상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어라는 걱정이 있음으로 해서 정어리들은 오히려 자신의 삶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절망을 희망의 가치로 바꾼다는 것이다.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온 막내는 엄마가 만들어준 걱정인형이 효과대박이라며 유쾌한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다행히 친구와 화해를 한 모양이었다. 내심 걱정했는데 하루 사이에 얼굴이 환해진 아이는 더욱 예뻐 보였다. 요즘은 조금씩 남편의 상황이 좋아지고 있다. 방황을 끝내고 험한 노동일도 마다하지 않고 새벽이면 일을 나갔다. 조금씩 가세가 회복되어지고 산더미 같았던 걱정거리도 그 수가 차츰 줄어들었다.

잠든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이다. 아이들은 나를 지탱해온 힘이었다. 내가 절망하고 넘어지려할 때마다 아이들을 보며 희망을 가졌고 아이들이 있어 다시 용기를 얻었다. 어쩌면 아이들이 내 걱정인형이 아니었을까. 내가 잠든 사이 아이들은 손톱만큼 작아져서 내 머리맡에 있는 걱정거리를 멀리 산 너머 내다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느라 고단했는지 막내가 코를 곤다. 여전히 다리 하나는 제 언니의 배에 걸친 채. 베개를 고쳐 베어주곤 아이들에게 입맞춤을 했다.

“고마워! 내 걱정인형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