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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에 관한 단상 / 김인기

장대명화 2012. 9. 16. 01:35

                                           중독에 관한 단상 / 김인기

 

 사람들이 암담한 현실에 직면하여 출구를 찾지 못하니, 골치도 아프고 가슴도 답답하다. 골치가 아프니 약국에 가서 두통약을 구하고, 가슴이 답답하니 주점(酒店)에 가서 술을 찾는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나을 병이 아니다. 그래서 급기야 중생(衆生)의 병고(病苦)를 치유해 준다는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한테 가서 머리를 조아린다.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명예도 좋고, 부귀도 좋고, 어느 방면에든 성공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게 남들과 별로 관련이 없이 추구되는 것이라면 더 언급할 바가 없겠지만, 그게 그렇지 않고 남들의 피눈물을 짜서 이루는 것이라면, 그건 그다지 반가운 일이 되지 못한다. 그런 것은 차라리 거부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도 현실은 상상보다 더 참혹하다.

 

 나는 너무나 많은 지식인들이 실망스럽다. 어디서나 늘 잘난 척은 해도 도대체 책임을 모른다. 언제쯤 이들이 그 노릇을 제대로 하려나. 나는 이들이 이 사회를 마지막까지 지키는 보루(堡壘)가 되길 기원한다. 한때의 형세에 따라 이렇게도 쏠리고 저렇게도 흔들리는 해바라기나 갈대가 아니라 만난(萬難)에도 끄떡없는 태산이었으면 한다. 이들이 더 이상 위선자나 기회주의자의 표본으로 여겨지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내가 이들한테 미련이 있나 보다.’

 

 내가 그저 순진하기만 했을 적에, 그래서 내가 해맑은 꿈에 부풀었을 때, 나는 모든 이들이 다 한결같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이건 원래 아이들의 꿈일 뿐이었다. 이제 나는 그 꿈에서 깨었다. 그래서 모든 이들을 탓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모든 이들이 다 지성인일 수는 없고, 또 그게 꼭 그럴 필요도 없는데, 내가 그렇게 애를 태울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바로 먹물들이다. 그 윤리성이 정말 의문스럽다. 진실이 아니라 이해(利害)에 따라 함부로 떠드는 먹물들을 누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저런 것들을 학자라고 섬기자니 더불어 발전하기는커녕 도리어 석삼년 동안 재수가 없다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기야 지식인들만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을 마치 짐승처럼 대하는 인간들의 야만성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불법체류자란 남의 약점을 잡고 온갖 학대와 착취를 다 하는 인간들을 두고도 감히 선진국 타령을 하다니. 이루 다 헤아리기에도 벅찬 온갖 부조리와 추태를 답습하면서도 하느님을 찬송하고 이 땅의 문화를 운위하는 무리들도 드물지 않다. 나는 이렇게 역사가 역류하고 상식이 막히는 논리의 구조와 그 귀결이 내내 궁금하다.

 

 내가 별안간 당황하기도 한다. 내가 바보가 아니듯 남들 또한 바보가 아니다. 만약에 어떤 시험을 쳐서 그 자질을 가린다고 하더라도 나는 결코 우수한 부류에 들지 못할 터이다. 그렇다고 눈치나 동작이라도 빠른가 하면, 그런 것과도 나는 거리가 멀다. 나는 밥 잘 먹고, 잠 잘 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런 일 외에는 달리 잘 하는 게 없다. 그러니까 더욱 현실은 걱정스럽다.

 

 이런 사태에 대해 나는 나름대로 설명을 구해 봤다. 나와 같이 둔한 사람도 문제로 느껴질 정도라면, 사태가 무척 심각할 테니까, 이런 노력이 꼭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결론은 바로 사람들의 중독(中毒)이 원인이라는 거였다. 그런데 이 중독이란 것도 그리 단순하지 않다.

 

 자체의 취향이나 논리에 함몰한 경우도 있고, 외부의 힘에 무너져 정체성을 잃은 경우도 있다. 어느 경우든 균형 있는 비판정신을 기르도록 하면 길이야 열릴 것이다. 그러나 그 질병의 뿌리가 조금은 다른 만큼 처방 또한 얼마쯤 달라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게 그리 만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먼저 스스로 황홀해지는 중독을 보자. 이를테면 주당이 술을 마시는 게 무슨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에게는 술 자체가 마냥 좋다. 그러니까 그는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서라거나 무엇을 기념하기 위한 수단으로 음주하는 게 아니다. 그 정도로 거리를 두는 분별이 있다면, 그가 아직은 중독에 이르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우선 술부터 몇 잔 마시고 시작하자. 이런 경우는 자신의 음주를 자성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런가 하면 건강을 위한다는 처음의 뜻과는 달리 산으로 강으로 가는 사람들을 본다. 이른바 등산광이니 낚시광이니 하는 이들이다. 이러다가 이들이 목숨을 잃는다거나 가정이 파탄이 나는 수도 없지 않다. 이들은 정말 미쳤다. 이런데도 이런 미치광이들이 내심으로는 정신을 차릴 뜻이 거의 없다. 그들은 심하게 중독이 되었으니까. 어떠한 방법도 그들에게는 통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심신을 단련한다고 믿는다.

 

 한편으로는 이 사회도 무척 흥미롭다. 더러는 이치에 닿지 않게 관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같이 일하는 사이’라거나 ‘우리는 같이 공부하는 사이’라는 말에는 일반인들이 지극히 심드렁하다. 그들이 도리어 ‘그게 어쨌다는 거냐?’ 하는 식이다. 그런 그들이 ‘우리는 같이 술 마시는 사이’라거나 ‘간밤에 나는 그 여자와 잤다.’ 하는 언명에는 아주 민감하다. 우습게도 그들은 전자보다 후자를 더 높이 평가한다.

 

 “아! 그래요?”

 

 아주 반색을 한다. 기가 막히는 현실이지만, 지금 이렇게 비판하는 나도 이 땅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내 비록 그런 정서를 칭찬할 정도로 그렇게나 몰지각하지는 않지만, 그 마음만은 능히 헤아린다. 그러나 내 이런 행태야말로 기실 얼마나 기괴한가!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서로 수긍한다. 어느 누구 하나 이에 대해 뭐라 하지 않는다.

 

 수십 년을 변함없이 어울려 일이나 공부를 함께 한 인연이라면 그게 보통 사이가 아니다. 그런데도 잠시 엉뚱한 자리에서 부어라 마셔라 하며 아주 나자빠진 것보다 못하다고 해서야 말이 되는가? 그런데도 반듯하지만 밋밋한 사이보다 황당해도 끈끈한 사이가 더 좋다니! 뜨거운 남녀들의 아득한 모순은 더 말하지 말자.

 

 술 한두 잔이야 너끈히 마시지만, 술 한 병을 마시면 속이 울렁거리고, 술 두 병을 마시면 토하고야 마는 주량을 가진 사나이가 바로 나다. 주량에 관한 한 이렇게 형편없는 내가 ‘함께 술 마시는 사이’를 ‘더불어 공부하는 사이’보다 더 친밀하게 느끼다니. 이런 식의 정서는 아마도 외부의 힘에 의해 판단력을 상실한 중독일 터이다. 결국은 누군가의 허파를 뒤집는 소행인데도 염문을 들으면 그저 웃으려 하는 이 정서 또한 아주 지독한 증상이다.

 

 내가 온전한 상태로 있으면서 심신이 안락하다면 그게 무슨 문제가 될 수 있으랴. 그러나 이미 중독이 된 상태에서 느끼는 행복이란 아무래도 수상할 수밖에 없다. 이건 질병이 아니겠는가? 이래서 누구든지 성욕(性慾)이나 폭력(暴力)이나 자살(自殺)을 부추길 위험이 있는 담론에는 무척 신중해야 할 것이다. 답답하고 급하다고 해서 몽환적인 구세주나 전제적인 독재자를 선망하는 풍조도 마땅히 경계할 일이다.

 

 개구리밥은 언제나 물을 따라 흐른다. 탐욕과 허영에 들떠 식화(飾華)에 여념이 없는 군상(群像)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알 수 없는 흐름에 몰려 마구 흘러가는 이들을 본다. 그들이 마침내 이르는 곳은 어디인가? 이런 어지러운 세상을 온전한 정신으로 살고, 이런 타락한 세상을 고치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얼까? 이러다가 내가 이렇게 자탄한다.

 

 ‘내가 결코 총명한 사람이 아니고, 내가 결코 꿋꿋한 사람이 아니구나.’

 

 어떤 이들은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고자 한다. 나는 그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그들이 있으므로 아직까지는 그나마 우리 공동체가 버티니, 그들이 얼마나 고마우며, 그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냐. 하지만 내 성품은 소금이 되고자 해도 짜지가 않고, 빛이 되고자 해도 밝지가 않다. 나는 늘 옥석(玉石)을 가리는 맑은 눈빛이 되고 싶으나, 이 또한 내 지나친 욕심이다.

 

 예전에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하라며 멀리까지 졸개들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 그도 끝내 죽었고, 이제는 거대한 무덤만 남겼다. 그에 대한 평가도 제각각이지만, 진시황은 분명 실수했다. 그가 자신이 오래 살겠다고 그런 터무니없는 짓이나 할 게 아니라 바로 그 정성으로 천하의 모순을 바로잡을 방도나 구하였으면 더 좋았을 것을. 어쩌면 그도 그 무언가에 중독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인근의 팔공산에만 가도 바위에 약사여래불이 그려져 있다. 이미 오래 전에 그려진 그 그림을 보노라면 우선 그 모습이 촌스럽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도 놓이는데, 역시 약사여래불인 만큼 약병을 들고 있다.

 

 ‘저 병에는 무슨 약이 들었을까? 이 시대 사람들한테는 각종 중독이 심하니까, 어쩌면 저 안에는 해독제가 들었지 않을까? 아니야, 놀랄 일이 많은 중생들을 위한 진정제나 놀라지도 못하는 이들을 위한 각성제가 들었을 거야.’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일종의 중독증이 아닐까?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이 다 생긴다. 바위에 거칠게 그려진 그림을 보고 새삼스럽게 깊은 의미를 찾으려는 내 태도가 혹시 엉뚱하게 전염이 된 일종의 질병이 아닐까? 만약에 이것조차 그렇다면, 나는 이런 병고를 다스릴 그 무엇을 다시 모셔야겠다. 그러나 이런 해결법 또한 이전과 뭐가 그리 다르랴. 구태의연한 이런 걸 전통이니 문화니 하며 애써 변명해 봐도 나는 언제나 마뜩치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