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배 / 류향
빈 배 / 류 향
강을 따라 걷는 것은 바람을 보기 위함이 아니다. 먼 길을 돌아서 온 물결의 고단함을 듣기 위해서이다. 고요와 침묵은 강물의 언어다. 강의 적막이 길어 올린 모래톱 위에 빈 배 한척이 버려져 있었다. 낡고 헤어진 몸체를 이기지 못해 모래 바닥에 비스듬히 기대 있었다. 고니 한 마리가 그 주위를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다. 가끔씩 뱃머리에 올라 항해사처럼 먼 물길을 관찰했다. 배는 이제 더 이상 강물 위를 떠돌지 못할 듯 했다. 강물 속을 힘차게 쏘다니는 물고기 떼와 힘줄이 툭툭 불거진 어부의 그물질도 이제 배의 것이 아니었다. 있어야 할 시간과 있어 온 시간은 다가오는 시간 앞에 길을 비켜야 했다. 주위를 맴도는 고니도 때가 되면 이별을 고할 것이다. 그 사실 앞에 배가 할 수 있는 일은 침묵이었다.
버려지는 것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슬프다. 허전한 눈빛에 슬프고 텅 빈 언어에 서글퍼진다.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초라해 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다.
햇살 밝은 창가에 그가 앉았다. 흰 머리카락이 가을 빛살 같이 창백했다. 창 밖 가로수를 보며 「저건 벚나무구나.」 하고 그가 말했다. 마치 처음 본 사람처럼 감탄했다. 이름을 불러 주지 않으면 나무가 강물에 떠내려 갈 것 같은 표정이었다. 눈 밑 주름이 깊은 수심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모래톱으로 보였다. 불안이 모래톱 위에 빈 배처럼 누워 있었다.
학창시절에 그와 같이 배를 탄 날이 있었다. 그 날도 해가 눈부신 날이었다. 그는 노를 저었다. 갓 배운 노 질 이었다. 나는 노래를 부르며 뱃전을 흔들었다. 술을 몇 잔 마신 후였다. 배가 흔들렸다. 파도가 작은 조각배를 덮쳤다. 노래 소리와 파도와 배가 바다 위를 혼란스럽게 떠돌았다. 물결이 소용돌이치며 깊은 속을 드러냈다. 그는 당황했다. 두려움이 목에서 터져 나왔다. 비명이었다.
차 숟가락으로 커피를 저으며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직장에서 명예퇴직 당했어.」라고 말한다. 애써서 담담하게 말하려는 마음의 아픔이 들렸다. 햇빛 한 조각이 냅킨에 강하게 내리쪼여 눈부셨다. 누구에게나 찾아 올 수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찾아와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이번 일도 그랬다. 그는 아직 가르쳐야 할 아이들이 있었다. 가진 재산도 없었다. 있는 것은 답답한 성실함뿐이었다. 주변의 풍경들이 낯설어질까 두려운 듯 그는 천천히 확실하게 커피를 마셨다. 일어서면서 벚꽃 필 때쯤 다시 연락 주겠노라고 했다.
벚나무가 서 있는 길을 따라 그가 멀어져 갈 때,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잎사귀가 꽃잎처럼 흩날렸다. 햇빛 좋은 봄날, 그를 만났을 때도 벚꽃이 떨어졌다. 애잔하며 화려했다. 젊은 날의 꿈결이었다. 나른한 봄날이 가듯 꽃은 졌다.
그가 걸어가는 길 뒤로 잎사귀가 떨어졌다. 잎은 나무를 외면하고, 나무는 미련을 보이지 않는 체 한다. 꽃과 잎이 떨어짐은 같아도, 나무가 견뎌야 할 날들은 다르다. 공연히 무심한 체하는 나무의 헐벗음이 애처롭다.
빈 배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그물도 싣지 않고 낚싯대도 없이 물결 따라 떠돌아다니고 싶었다. 물고기 떼들이야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무엇엔가 구속되는 삶은 비루하다고 여겼다. 바람으로 살고 싶었다. 달빛 따라 흐르다, 모래톱에서 작은 물고기 한두 마리 주워도 행복 할 것 같았다. 일상의 소소함에 사로잡히는 일은 삶을 낭비하는 일 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이야 말로 내가 추구할 가치라고 생각했다. 젊은 날 이었다
자유와 구속은 다른 말이 아니었음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 우리는 서로 얽혀 있었다. 나의 자유는 상대에겐 구속이었다. 양보하고 타협하는 것을 배웠다. 그러면서도 두려웠다. 물길을 잘못 찾은 배처럼 어느 날 소용돌이를 만나지나 않을지 조심스러웠다. 안개가 끼는 날이면 고동소리를 울렸다. 허세도 부려야 했다. 물고기 잡는 일엔 이름이 난 사람이라고 큰 소리쳤다. 사실은 나도 잘 모른다. 물고기가 어느 물살을 따라 흐르는지? 삶의 뱃길에서 밀려 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애쓴다고 해서 늘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없다. 나 역시 떠나야 할 순간은 올 것이다. 그 때는 어떻게 자리를 비워야 할지 걱정이다. 고요한 강물처럼 흘러 갈 수 있을까? 기억 되지는 않더라도 아픈 미련을 가지고 싶지는 않다.
그를 보내고 종일 기분이 우울했다. 집 근처 포장마차를 찾았다. 어둠속에 돛배처럼 포장마차가 떠 있었다. 펑퍼짐한 얼굴의 주인아주머니가 수건으로 머리를 두르고, 국자로 어묵 국물을 젓고 있었다. 11월의 갑작스런 추위를 불평하며 국물 한 컵을 권해 왔다. 아주머니는 며칠 뒤면 가로변 정비 사업으로 이 자리를 떠나야 한다고 걱정했다. 한 겨울이라도 지나야 할 텐데, 떠나야 하는 줄은 알지만 재촉이 너무 이르다.
다시 강을 따라 걷는다. 햇살 밝은 날이다. 모래톱 위에 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고니 역시 배 주위를 오가며 갈대 사이를 뒤적인다. 바람은 강을 지나고 강은 여전히 고요하다. 아무 일도 없다. 시리도록 투명한 가을날의 오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