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통을 열며 / 강태국
필통을 열며 / 강태국
몸을 놔두었다.
한 2년 동안인가. 멍하니 시름없이.
처음 한두 달은 고전 따위의 서적을 뒤적거렸다. 머리에 낀 때와 녹슨 걸 닦아 씻어낼 양이었다.
문득 고전은 선인들 배설물이 아닌가. 그런 것들이 뇌에 쌓이면 뇌경색에 걸릴 수 있지 않으냐, 아서라 접었다.
지금 필요한 건 정신의 질서보다 감각의 질서, 따스함이다. 철저한 인노센트한 기분이 삶의 근원이고 기쁨의 증거가 아닌가.
모든 능력을 정지시켰다, 반성, 성찰, 판단, 사유, 고찰, 음미 따위다.
그럭저럭, 빈둥빈둥,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심드렁하게 지냈다.
때때로 서로 대립하는 개념들 공격도 매서웠다. 시달렸으나 힘껏 버티었다.
그것들 중간에 서서,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 없이 가담하지 안 했다.
흑과 백, 생과 사, 빛과 어두움, 이런 정반대의 개념들, 그 사이에서 버티고 있노라니, 자연히 흑백 경계가 점점 허물어져 애매해졌다. 마침내 백은 거무스름해지고, 흑은 하얘갔다. 양망(兩忘)이란 화두가 있다. 생사, 선악, 고락, 시비하듯이, 상대적으로 인식하는 게 보통이다.
양망은 상대적 인식으로 취사선택하여 그 한쪽에만 집착하지 말고, 양쪽 모두 잊어버리는 일이다.
‘스케프시스(skepsis)' 희랍어이다. 모든 단정, 판단을 보류한다는 속뜻이다.
인생의 어떤 변환에서도 흔들림 없이, 마음 단단히 먹은 정지(靜止)상태에 있는 태도다. 큰 도움이 되었다.
“무엇을 바라고 기다리는 일 없이, 그냥 꼼짝 말고 가만히 있어”하고, 내 영혼에 외치며 부추겼다.
하는 일이란, 세끼 꼬박꼬박 챙겨먹고, 변 잘 보고, 단잠 잘 자고, 커피와 파이프, 그리고…, 낮잠 즐기기일까.
심신탈락, 누진(漏盡), 허무와 허공 속으로 녹아들어가곤 했다.
ㄹㄹㄹㄹ…, 침묵의 세계, 긴 고요를 깨는 전화벨, 글 쓰느냐 마느냐, 이 대립에서 판단보류는 해제되었다.
필통 뚜껑을 열었다.
*작법 해설*
문학이론은 작품에서 탄생한다. 즉 문학이론은 작품의 자식이다. 그런데 작품을 어미로 하여 태어난 문학이론이 어미인 작품을 해석한다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흔히 ‘그 어미에 그 딸’이라는 말이나 ‘제 아비 욕 먹이는 놈’이라는 말에 들어나고 있는 부모자식간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의 얼굴이 자식으로 말미암아 설 수 있듯 이론이 없으면 문학이 안 되는 작품과 비평의 관계도 그런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비평이 바른 비평이 못되면 그 문학이 욕을 먹게 된다. ‘수필도 문학이냐’는 조롱이 바로 그것이다. ‘수필도 문학이냐’는 조롱에 이론적 대답을 내어 놓지 못한 것이 지난 1백년간의 기존의 수필의 현주소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두 말 할 것도 없이 수필문학에 관한 창작론적 이론 부재에 있는 것이다.
문학비평이 바른 비평이 되려면 반드시 창작론에 근거한 비평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난 1백년간 수필문학에는 창작론이라는 것 자체가 아예 없었다. 지난 1백년 간의 수필문학의 개념은 현대문학 이론에 있지 않고 홍매의 ‘붓 가는 대로’에 있었기 때문이다. 홍매의 ‘붓 가는 대로’는 문학 이론이 아니다. 그렇다면 현재 수필계에서 하고 있는 수필비평의 이론적 근거는 무엇인가?
수필 비평을 하려면 ‘붓 가는 대로’부터 부정하고, 학문적 근거가 있는 비평 이론을 밝히고 평필을 들어야 할 것이다. 지난 1세기 동안 ‘붓 가는 대로’라는 문학적 수렁에 빠져 그 목숨이 경각에 달한 수필문학을 건져내서 현대문학 이론화에 앞장서고 있는 사람이 윤재천 선생과 ?현대수필?의 가족들이다. 그리고 필자의 ?창작문예수필?이 저들의 뒤를 이어 수필의 ‘현대문학 이론화’를 외치고 있다.
수필비평이 창작론에 근거한 비평이 되려면 이제라도 윤재천 선생과 ?현대수필? 가족들처럼 홍매를 공개 부정하고 현대문학 이론에 근거한 문학을 할 것을 천명하여야 한다. 왜 그 같은 일을 공개적으로 해야만 하는가? 세상모두가 무려 1백 년 동안이나 수필이라는 것은 ‘붓 가는 대로’ 쓰는 잡문으로 알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라. ‘수필’과 ‘잡문’의 뜻이 같은 것으로 되어 있다.
창작문예수필의 문학 이론적 해석을 필자는 ‘산문의 시’라고 말하고 있다. ‘산문의 시’라니? ‘산문시’면 산문시지 ‘산문의 시’란 무엇인가? 그 같은 의문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엇이든지 처음 등장 할 때는 낯이 설기 마련이다. 그 같은 낯섦이 익숙해 질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산문의 시’의 실체, 즉 ‘산문의 시’라는 개념을 낳고 있는 작품 자체를 감상하는 것 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강태국의 「필통을 열며」의 서두 문장, “몸을 놔두었다.”는 한 행의 시어다. 그리고 그 이하는 이 한 행의 시어를 풀어 쓴 산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달리 말 한다면 “몸을 놔두었다.” 이하는 그 한 행의 시어를 성립시키고 있는 산문적 형상화법이다 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편으로 이해하든 산문의 시란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라는 뜻에 이르기는 마찬가지다.
“몸을 놔두었다.”는 일상어가 아니다. 남편(아내)에게 ‘나 오늘 몸을 놔두었어요.’라고 할 수 있는가? 대통령이 ‘나 오늘 몸을 놔두었다.’라고 한다면 대통령이 미쳤나보다 할 것이다.
시어는 일상어를 가져다가 일상어가 아닌 문학적 창조 어법의 말로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시문학의 ‘문학적 이야기 만들기’는 창조적 시어 만들어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운문의 시 작품이 아닌 산문작품이다. 그럼에도 일반산문문학 작품이 아닌 분명한 시 작품인 것이다. 산문형식의 작품이면서 분명한 시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는 이 같은 작품을 문학 이론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필자는 이를 산문의 시문학이라고 해석한다.
이 작품의 종결문장, “필통 뚜껑을 열었다.”는 “몸을 놔두었다.”라는 시의 종지부(.)이다.
“필통 뚜껑을 열었다.”라는 종지부(.)는 “몸을 놔두었다.”라는 운문(시)의 세계에서 산문의 세계로 나서게 되었다는 뜻이다.
운문(시)의 시세계를 산문으로 형상화하여 보여주는 것이 ‘산문의 시’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