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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낙서하다 / 유병근

장대명화 2012. 7. 12. 10:55

 

                                물에 낙서하다 / 유병근

 

 1

 도시 가운데서 도랑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대연동에 위치한 유엔묘지를 끼고 있는 평화공원에서 도란도란 흐르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물은 흘러가는 시간이다. 흐르는 물을 따라 시간이 가고 시간이 오고 있다. 평화공원의 시간은 도란도란 귀엣말 같은 소리를 한다. 그 소리의 안쪽을 찾아 귀를 기울인다. 그러면 저쪽 유엔묘지에 잠든 이국병사들의 침묵의 소리도 들릴 것 같다. 이역만리 남의 나라에서 자유를 위하여 젊은 나이에 생명을 바친 영령들이다. 물소리는 그들이 나직하게 입에 올리는 향수에 젖은 가락 같기도 하다.

 주말을 즐기려는 시민들이 모이는 평화공원이다. 세계평화를 위해 전투에 참가한 이국병사들의 영혼도 늦은 가을 햇볕을 찾아 물소리처럼 도란도란 모여드는 것 같다. 산 자만의 공원은 아니다. 공원을 질러가는 물소리는 영혼과 함께 이야기하는 영혼의 소리다.

 

 2

 물줄기를 따라가는 마음은 어느새 어릴 적 고향마을에 가 있다. 종이배를 띄우던 때가 도랑물 속에 잠잠하게 떠오른다. 여름엔 얕은 물속에서 멱을 감았다. 작은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기도 했다.

아버지를 따라 농사일을 하게 되자 도랑물은 놀이만의 물은 아니었다. 벼논으로 들어가서 나락을 살찌게 하는 농업용수였다. 물도 나이를 먹고 큰다는 생각을 그때 한 것 같다. 갈증은 사람만의 몫이 아닌 모든 동식물이 겪는 증세다. 그것을 치유하는 물은 절실한 보약이다.

 도시 가운데로 흐르는 도랑물은 도시를 아름답고 건강하게 가꾸는 보약이다.

 

3

 지난여름 시들시들 며칠 몸살을 앓았다. 그 전날은 상쾌한 몸으로 산을 타고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와 차디찬 얼음물을 벌컥벌컥 시원하게 들이켰다. 땀이 흐르는 몸에 갑작스런 얼음찜질을 한 셈이다.

 욕탕에는 냉탕과 열탕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 냉온욕은 혈액순환에 도움이 된다며 한번은 냉탕에 한번은 열탕에 들앉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 짓도 하지 않는다. 냉탕에 들앉고 열탕에 들앉는 움직임이 굼뜨게 되자 혈액순환도 덩달아 굼뜰 것이다. 굼뜬 혈액순환에 폐달을 밟아 굳이 가속도를 내어 무리할 일은 아니지 싶다.

 등산에서 돌아와 얼음물을 몇 컵이나 한꺼번에 들이킨 것이 냉탕에 들앉은 갑작스런 속도변화를 저지른 셈이다. 몸이 미처 받아들이지 못한 그 짓이 몸살을 앓게 된 이유였다. 한 포기 풀이 시들시들 하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이유에 대해서 보다 더 곰곰이 생각하기로 한다.

 

  4

 물을 다스릴 줄 아는 자가 세상을 다스린다고 했다. 물의 길은 강이다. 함으로 강을 다스려야 물이 살고 세상이 산다.

서울의 청계천이 살아나고 부산의 동천(東川)이 푸르게 살아났다. 동천은 코를 찌르는 악취로 똥천이라는 별명이 붙었었다. 그 강이 살아나서 이제는 고기떼가 노는 강이 되어 동천(東天)으로 간다. 이 완벽한 상전벽해(桑田碧海), 어느 날은 낚싯대가 꽂혀 있었다.

 세상을 푸르게 하는 힘은 싱싱하게 살아 있는 강에 있다.

 

 5

 물속에 내가 있고 물속에 구름이 있다. 나는 구름에게로 가서 구름이 된다. 물속에 내가 있고 물속에 산이 있다. 나는 산으로 가서 산이 된다. 산새가 우는 물속에서 바람이 불고 있다.

 

 *작법 해설*

 창작이란 본래 시작(詩作 · poet)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시작이란 무엇을 어떻게 만드는 것인가? 시작의 대표적인 형태가 대상에 대한 은유와 상징 창작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가 그 한 예이다. 즉 시문학의 ‘문학적 이야기 만들기’는 은유와 상징법이 주된 방법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감상하고 있는 시작품의 거의 모든 창작형태가 각종 은유법과 상징법으로 된 시어들의 세계다. 시어는 일상생활의 지시어가 아닌 비유적 혹은 상징적 상상력의 세계를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은 「물에 낙서하다」이다. 현실적으로는 물에 낙서를 할 수 없다. 시(문학)적 상상력 세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시적 창작, 즉 시문학적 이야기 만들기를 하고 있는 작품인 것이다.

 본문에 들어가 보면 “(물 흐르는) 소리의 안쪽을 찾아 귀를 기울인다”는 문장이 나온다. 그 문장에 이어서 “그러면 저쪽 유엔묘지에 잠든 이국병사들의 침묵의 소리도 들릴 것 같다.”는 문장이 뒤를 따라 나온다.

 “(물 흐르는) 소리의 안쪽을 찾아 귀를 기울인다”는 것도 현실적 일상생활이 아니고, 더구나 “유엔묘지에 잠든 이국병사들의 침묵의 소리도 들릴 것 같다.”는 것은 더욱 현실적 사실에 대한 서술이 아니다. 물 흐르는 소리 속에서 죽은 사람의 소리가 들려 올 수 없고, 더구나 ‘침묵의 소리’라니? 현실에서는 침묵은 그냥 침묵일 뿐이지 ‘침묵의 소리’라는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시적 상상력 속에서는 ‘있을 법한 이야기’(아리스토텔레스)들인 것이다.

 창작이란 무엇인가? 현실의 것을 소재로 취해다가 ‘있을 법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 같은 창작의 본령이 시 창작에 있다. 모든 문학의 장르들은 시에서 분화(진화)되어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도 그 본질은 시에 있고, 창작문예수필도 그 본질은 시에 있는 것이다. 특별히 창작문예수필은 시문학과 외사촌 간도 아닌 친사촌간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 양식의 문학이다. ‘시적발상의 산문적 형상화’ 양식의 문학이 어떤 것인가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가 중 대표적인 작가가 유병근이다.

                                                                               작품해설 창작문예수필 ㅡ 이 관 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