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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 권준우

장대명화 2012. 7. 4. 22:49

                                                                                  선물 / 권 준 우

 

  담임 선생님께서는 몸이 편찮으셨다. 위가 안 좋아 수술을 받으셨다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초기위암으로 인한 위부분절제술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작아진 위 때문에 한 끼 식사를 다 소화 시킬 수가 없어서 하루 세 끼를 여섯 번에 나누어 드셔야 했다. 선생님은 2교시 쉬는 시간에 도시락의 반을 드시고 나머지는 점심시간에 드셨다. 쉬는 시간만 되면 아이들이 정신없이 뛰어 다녀 먼지가 풀풀나는 교실에서,오십여명이 쳐다보는데 밥을 먹은 것이 얼마나 겸연쩍은 일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저 옆에서 알짱거리면 한 입 주시려나 하던 철없는 초등학생 시절일 뿐이었다.

  선생님은 다른 분들과 조금 달랐다. 급식으로 나온 우유를 마시면 빈 껍대기는 쓰레기통에 버리기 마련인데, 선생님께서는 그대로 모아두라고 하셨다. 빈 우윳갑은 바닥에 칼로 열 십자(+)를 그은 후 흙을 담아 나뭇잎을 꽂으면 훌륭한 화분이 되었다. 마술 같은 일이었다. 그저 쓰레기일 뿐인 우윳갑이 이렇게 변신하다니, 교과서에서 보든 잎꽂이를 눈앞에서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잎이 뿌리를 내리면 우윳갑 화분을 하나 받았는데, 그해 겨울 추위가 너무 매워서 그만 동사시켜버린 것은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우윳갑 화분이 창가를 빼곡히 점령해 더이상 놓을 게가 없자, 선생님은 교실 뒤편의 커다란 사물함 하나를 비우시더니 우윳갑을 착착 접어 던져 넣으라고 하셨다. 몇 달이 지나자 꽤 많은 우윳갑이 쌓였다. 이거 뭐에 쓰실 거예요? 아이들의 물음에 선생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다 쓸데가 있다 하셨다. 자못 궁금했지만 빈 우윳갑으로 화분을 만들어 낸 마술처럼, 언젠가 신기한 것을 보여주실 거란 기대에 우리는 잠자코 선생님의 뜻을 따를 뿐이었다. 쌓여가는 우윳갑만큼 시간이 흘러갔다.

  안타깝게도 선생님은 우리와의 인연을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 날씨가 쌀쌀해지는 가을 즈음, 선생님께서는 건강이 악화되어 휴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위를 괴롭히던 병이 재발하신 것 같았다. 잘 지내라며 미소를 지으시던 당신을 그 후론 뵐 수 없었다.

  젊은 여선생님이 담임선생으로 부임하셨다. 그 후로도 우리는 버릇처럼 우윳갑을 접어 사물함에 던져 넣곤 하였다. 선생님이 우윳갑으로 가득 찬 사물함을 열어보시고는 물었다.

  "저 우윳갑들 언제부터 모은 거니?"

  "초여름부터요."

  선생님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실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 후로도 우리들 우윳갑 모으기는 계속 이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우리와 옛 선생님 사이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그만 하라는 말씀을 하지 않고 떠나셨기에 우리는 그 약속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간은 흘러 낙엽이 떨어지고 찬바람이 불더니 흰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교실마다 난로가 놓였고, 하루에 한 바구니씩 석탄이 나누어졌다. 다같이 못살던 시절이라 석탄이 넉넉히 지급되지 못했다. 오전에는 후끈후끈했지만 빠듯한 양의 석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오후만 되면 냉냉해진 공기 때문에 저절로 몸이 웅크려졌고 시린 발을 비빌 수밖에 없었다. 석탄 한 바구니만 더 있으면 너무나 행복할 것 같은데, 현실은 텅 빈 바구니에 부지깽이만 걸쳐 있을 뿐이었다. 오들오들 떨던 아이들이 불쌍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너무 추워요. 석탄 좀 더 받아오면 안 되요?"

  당연히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투정을 부렸다. 칠판에 글씨를 쓰던 선생님께서 뒤를 돌아보셨다. 추위에 떨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으셨다. 분필을 내려 놓은 선생님은 양철통을 들고 교실 뒷쪽으로 걸어가셨다. 수업하다말고 뭘 하시려는 걸까? 어디 숨겨둔 석탄이라도 있으신걸까? 우리들의 시선을 한껏 받으며 선생님께서는 드르륵 사물함을 열더니 우윳갑을 한 가득 담아오셨다.

  "이제는 춥지 않을 게다."

  선생님께서 우윳갑을 집어넣자 꺼져가던 불이 확 살아났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따뜻함이 온 교실에 퍼져나가자 추위에 웅크린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옛 담임선생님의 마술이 시작되었다. 선생님께서는 겨울 찬바람에 우리들이 추워할까 봐 그 더운 여름날부터 우윳갑을 차곡차곡 모아두셨던 것이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당신께서는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면서도, 먼지를 뒤집어 쓰며 두 시간마다 밥을 먹어야 하는 힘겨운 삶 속에서도 코흘리개 우리들을 먼저 걱정하셨다는 것을. 아무 말없이 우리들을 떠나가시면서도 마지막 선물을 남겨주셨다는 것을.

  그 따스함을 같이하지눈 못했지만 우리는 선생님의 깊은 배려와 마음 씀씀이를 느낄 수 있었다.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 우리의 교실은 머무나도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