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를 형상적으로 발견하기 / 성해숙
소재를 형상적으로 발견하기 / 성해숙
'수필이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 이라는 말이 내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문학의 문을 두르릴 때 내 생각은 이미 수필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수필(隨筆)이라는 한자어 그대로 붓만 들면 글이 쉽게 써질 거라는 어리석은 생각이 겁도 없이 수필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한 것이다.
습작기의 첫 걸음은 보무당당했다. 하루 만에 쓴 글을 완성작이라고 내 놓고 만족의 미소를 흘렸다. 그 수필은 대부분 내 과거의 진열대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식이 용기가 되었던 시절이엇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 글 뿐 아니라 많은 수필 작품에서 발견되는 신변잡기적 이야기들이 지루하게 들려오게 되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누구나 다 겪는 똑같은 일들이 아닌가.'
절제는 물론 긴장감과 문장의 호흡도 없이 꽉 들어차 있는 하얀 지면 위의 검은 글씨들이 더이상 내 마음을 적셔주지 못하였다.
그 뒤로 식상한 이야기는 더 이상 내놓지 않겠다는 것인지 갑자기 머리와 마음이 문을 닫고 열어주질 않았다. 단 한 줄도 떠오르지 않는 글 앞에서 수필 쓰기의 어려움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쉽게 드나들던 수필이 갑자기 높은 산으로 다가오면서 우두커니 바라만 보았다.
어느 날 집 근처 산에 오르다가 태풍에 쓰러진 소나무를 발견하였다. 오를 때마다 바라보며 친구처럼 정이 든 나무였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가까이 다가가 물기에 젖은 수피를 만져보았다. 그 때 쓰러져 꺽인 소나무의 모습이 문득 인고의 세월을 살아오신 엄마처럼 느껴졌다.
그 느낌이 한동안 놓았던 펜을 들게 하였다. 내 글속으로 들어온 소나무는 '모송(母松)'이라는 제목을 달고 다시 탄생하게 되었다. 신변잡기의 틀을 벗어나려는 수년간의 고뇌가 이 글을 내놓게 한 것이다. 퇴고가 되지 않은 미숙한 글이었지만 이 작품 앞에서 처음으로 문학창작에 대한 희열이 밀려왔다. '모송'은 불씨가 되어 어느덧 식어가는 내 문학에 불을 댕겼다.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하는 열정이 아직 들어보지 못한 낮선 '창작문에수필'이라는 것을 만나게 하였다.
인터넷에서 만난 창작문예수필의 방에는 주옥같은 글들이 저마다 은은한 멋과 향기를 풍기며 진열되어 있었다. 그동안 보았던 수필과는 전혀 다른 문학에 울림이 있었다. 그 들의 경이로움에 반한 나는 주저함 없이 창작문예수필의 세게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창작교실에서 뵙게 된 선생님의 강의는 전에 알고 있던 수필 이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썼던 수필은 창작문학이 아닌 본래 에세이문학 이라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창작문에수필의 개념은 '붓가는 대로'하고는 관계가 없는 소재에 대한 구성적 비유의 형상화라는 개념의 시, 소설 같은 창작문학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에세이와 창작의 구분을 개념적이냐, 형상적이냐로 분명하게 구분하여 주었다. 그리고 창작 작가가 되려면 먼저 소재를 개념이 아닌 형상으로 발견하고 인식하는 훈련부터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머리로는 끄덕여 지는데 막상 글을 쓰려고 하면 사실적인 것, 개념적인 생각만 떠올랐다. 오랫동안 개념화된 머리는 쉽게 형상적으로 바뀌어지지 않았다. 또한 소재를 형상적 세계로 발견하는 일이 첫 순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학의 본령인 상상의 세게로 들어가야만 되었다. 그동안 현실에서 안분자족하던 머리가 갑자기 상상의 나라에서 숨은 형상을 찾아내야 하는 일은 산고였다.
화창한 봄 날, 문학기행에 올랐다. 모처럼 도시를 벗어나 두물머리로 향하는 발길에 리듬이 붙는다. 환한 봄빛이 우리를 쫒아오고, 앞에 보이는 강물이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하게 했다.
두물머리를 향해 길게 이어진 산책로가 눈앞에 다가왔다. 들어가기에 앞서 선생님의 강의가 이어진다. 예전 부터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한강이 시작되는 이곳을 양수리라고 불러온 그 이름이 곧 이 곳 두물머리라는 곳의 개념이라고 하셨다. 두물머리를 양수리라는 이름, 즉 개념으로 인식하고 글을 쓰면 에세이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물머리를 소재로 삼아 창작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양수리라는 이름도 두물머리라는 이름도 다 잊어버려야 된다. 그리고 두물머리라는 대상의 모양만 머릿속에 그려 넣으라고 하였다. 그런 후에 두물머리의 모양과 같은 제3의 대상을 찾아 보라고 하였다. 두물머리의 모양과 같은 제3의 대상을 찾아냈을 때 거기서 부터 창작이 시작될 수 있다고 하였다.
창작의 비밀을 찾기 위해 둑길로 들어섰다. 다양한 사람들이 밝은 봄 햇살을 즐기려고 강변 둑길을 오고가고 있었다. 젊은 연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두물의 만남이 이루어진 곳에서 연인들의 만남이 의미 있게 보였다.
문득 앞에서 걸어오고 있는 두 손을 꼭 잡은 연인이 내 시야로 들어왔다. 그들이 꼭 잡고 있는 두 손에서 방금 머릿속에 그려 넣었던 두물머리의 모양을 발견하게 되었다. 막연히 그려봤을 때는 잘 안잡히던 영상이 현장에서 직접 보는 순간, '두물머리의 만남'을 다른 창조적 대상의 만남으로 형상화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저것'이라는 창작물을 만드는 일이 문학창작이라는 말의 뜻이 개념이 아닌 형상으로 비로소 눈앞에 펼치지고 있었다.
창작문예수필의 세계에 들어 온지 육 개월, 이제야 창작문예수필의 초입을 겨우 넘어서게 된 것 같다. 아직도 정상까지는 아득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한 발 한 발 올라 갈 것이다.
개념들로 둘러 쌓인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훌쩍 숲으로 향한다. 나는 이곳에서 나를 애워 싼 나무들을 형상으로 만나기 위해서 개념의 눈을 감는다. 어디선가 지저귀는 새소리들도 개념이 아닌 형상으로 들으려고 상상력의 눈을 크게 뜬다.
산문으로 쓴 수필 / 성해숙(창작문에수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