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우수 수필

아니무스 / 정여송

장대명화 2012. 5. 15. 01:51

                             아니무스 / 정여송

 

 

 내 안에 한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이병헌처럼 멋있지도 않고 전유성같은 유머와 위트를 지니지도 못했다. 타이거우즈처럼 신의 기술을 훔친 남자는 더더욱 못된다. 약간 화통한 것 같은데 좁쌀뱅이 남자다.

 

 그래도 나는 그 남자가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무구한 마음으로 물어볼 줄 아는 남자였으면 했다. 희끄무레하고 누리끼리하며 푸르뎅뎅하고 불그스름한 세상을 볼 줄 아는 남자라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름과 차이가 만들어 가는 다양성이 내는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남자이기를 소원했다. 사소한 일상이나 자연의 삼라만상에서 자신의 고민을 해결해 줄 아이디어를 찾는 남자라면 대길이었다. 하지만 그 모두는 허황된 바람이었다.

 

 그 남자는 스스로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면서 융통성 없이 따지기만 했다. 그런가 하면 과거로만 문을 열고 닫으려고만 할 뿐이었다. 그러니 나중에는 뒷전도 못되고 먼전이 되어 전전긍긍하였다. 다행스러운 것은 까다롭지만 통제가 가능해 끌어안고 살 수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 남자는 늘 기가 살아 있었다.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점점 나의 기세에 눌려 존재감마저 확인하기 어려운 처지로 내몰렸다. 그러나 그렇게 무시한다고 해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리아리 멀기에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곳에서, 영원히 헤쳐 나올 수 없는 무저갱 같은 곳에서 본능을 괄호 하여 숨기며 사십년을 아롱졌다. 그 남자와 더불어 살던 과거는 이미 오래된 미래였다.

 

 언제부터였는가는 확실치 않다. 그 남자의 움직임이 보였다. 도대체 먼지 같이 눈에 띄지 않던 그 남자가,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기까지 했던 그 남자가 아주 가끔 언뜻언뜻 비치는 듯하더니 행보를 시작했다.

 

 한 그루의 나무처럼 푸른 그늘을 만들고, 나무의 곳곳에 부담 없는 깃을 드리울 수 있도록 가지를 펼쳤다. 때로는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김수영의 ‘풀’처럼, 더러는 무서운 기색도 없이 쏟아지는 폭포와도 같이, 가끔은 스스로 도는 팽이라도 된 듯 과감하게 본색을 드러내었다. 어쩌면 서로 간에 이해관계를 조율하려는 심사였는지도 모른다. 신뢰를 높여 상호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의도였지 않을까. 나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힘을 쏟아 보려는 속셈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쩌자고 나는 ‘하이고 가소로워라’ 하며 비아냥대고 싶은 유치한 욕망이 생기는 것일까.

 

 그 남자는 아니무스다. 내 안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남성성, 위기의 순간에 강인한 결단력을 분출하는 남성적 요소, 내 남은 삶에 힘이 되어 줄 남자, 그 남자가 세월을 뛰어넘어서 내게로 되돌아왔다. 내가 나를 버려도 나를 포기하지 않을 태세다.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이다. 그 남자 덕분에 나는 많이 대범해졌다. 정의감이 생기고 올곧고 당당해졌다. 활발한 사회활동 면에나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에서 젊었을 적에 남편이 보여 주던 남자다움을 따라 하고 있다. 처음에는 같이 살아서 닮은 줄 알았다. 나중에는 배워서 습득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천만의 말씀이다. 아니무스가 장성하여 내 안에서 게이머처럼 키를 쥐고 조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남자는 일부러 숨죽여 살아온 것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과 할 수밖에 없는 일을 참고 또 참았다. 숨이 긴 힘을 누르며 기다리고 기다렸다. 건장해진 그 남자는 혜성처럼 나타나 지천명이 넘은 아줌마가 아직도 영화 속의 여주인공을 꿈꾸며 사느냐고 코웃음을 쳤다. 무엇을 더 찾겠다고 여자이길 포기하지 않느냐며 거들먹거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겪은 일이 주는 지혜가 백만 광주리도 넘을 터인데 순리를 따돌릴 거냐며 비웃었다.

 

 그렇다.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약해지고 작아진다. 용케도 알아본 그 남자는 용감하게 나타나 나의 흑기사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내 안의 또 다른 화끈하고 남자다운 나, 무언가가 못마땅해도 같은 맘이 되어 주고, 말이 싫고 미워도 정으로 갈무리해 주며, 무기력하고 나태해지는 생각에 힘을 부어준다.

 

 어렵고 힘들어도 같이 걸어가야 할 관계임을 보여주듯 내 안의 그 남자가 내 어깨를 툭 친다. 나도 눈을 찡긋거린다. 그렇게 우리는 너와 나 구분 않고 어우렁더우렁 살아가야만 하는 관계다. 마치 ‘두 사람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처럼.

 

                                                                                ([수필세계] 2011 가을호)

 

<작법 해설>

  형상화라는 문학 용어의 뜻을 흔히 잘 쓴 문장으로 오해하는 일이 있는 것 같다. 형상화란 문장법에 맞는 잘 쓴 문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매끄러운 문장이라도 대상을 존재론적 대상으로 형상화하고 있지 않다면 형상화가 된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은 서두문장, “내 안에 한 남자가 있다.”의 ‘내 안에 있는 한 남자’를 형상화하고 있다. ‘내 안에 있는 한 남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 실체가 아닌 개념이며 관념이다. 문학이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개념이나 정서도 구체적인 형상적 대상으로 들어나게 해야 된다. 개념이나 정서를 구체적인 형상적 대상으로 들어나게 하는 작업을 가리켜 형상화라고 한다.

  이 작품의 제목 「아니무스 animus」는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의 심리학 이론에 나오는 여성의 잠재의식 속의 남성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작품의 작법 여하에 관한 관심보다 먼저 소재 선택에 관한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기존의 수필 개념 중에 ‘수필은 작가가 경험한 사실을 쓰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광의적 의미에서는 인생의 만사 중에 인간의 경험이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우주여행까지도 직접 여행에 참여하지 않았어도 전해들은 말만 가지고도 간접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1세기 기존의 수필이 선택한 절대다수의 소재는 우주여행 같은 최첨단 과학 지식이 필요한 소재가 아닌 신변잡사들이었다. 이는 무엇을 말 해 주는가? 기존의 수필의 문학 이론 아닌 잡문론 중 하나인 ‘경험한 것을 그대로 쓰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수필제작 현장에서는 ‘신변잡사’ 이상으로 그 광역을 넓혀가지 못하였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작품 「아니무스」의 창작발상은 그 같은 신변잡사적인 것이 아니다. 신변잡사적인 소재밖에 눈에 띄지 않는 작가적 안목으로는 접근조차 불가능한 의학심리학에 나오는 용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에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기존의 수필의 잡문론적 이론 아닌 이론 가운데에 ‘수필은 다른 장르보다 소재가 풍부하고 다양해서 무엇이든지 쓸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실로 숨이 콱 막히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세상의 어느 문학예술이 그 소재의 선택에 제한을 받는 예술이 있단 말인가? ‘무엇이든지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본질상 모든 문학예술에 동등한 개념이다. 수필만이 다른 문학예술보다 그 소재가 풍부하고 다양하다‘는 발상이 어떤 생각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인지 참으로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런 기상천외한 이론(?)을 말하고 있는 기존의 수필이 실제로 선택하고 있는 소재가 ’신변잡사‘ 일색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저들은 무슨 말로 변명을 할 것인가?

  ‘무엇이든지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모든 작가에게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작가에게 문학적으로 발견된 소재만이 그 작가의 작품 소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문학창작, 곧 ‘문학적 이야기 만들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소재의 형상적 발견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니무스」의 일차적 성공 요인은 새로운 소재의 발견에 있다.

  두 번째로 이 작품을 통해서 확인해야 할 점은 문학에서 말하는 형상화라는 용어의 구체적인 실체가 무엇을 의미 하느냐는 점이다. 그 본질적 의미는 사물적 존재로서의 형상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아니무스’라는 내 안의 남자를 사물적 구체적 대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가? 아니다. 사물적 대상이 아닌 성격적 대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융통성 없이 따지기만”하는 남자, “과거로만 문을 열고 닫으려고만”하는 남자 등이 그 예다. 즉 이 작품의 아니무스는 외적 형체를 가지고 있는 사물적 대상에 대한 형상화가 아닌 내면적 대상에 대한 형상화인 것이다.

  그럼에도 독자는 아니무스를 마치 외적 형체를 가지고 있는 사물적 대상으로 감상하게 되는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그 원인은 서두문장에서부터 밑그림으로 깔아 놓고 있는 “그 남자는 이병헌처럼 멋있지도 않고 전유성같은 유머와 위트를 지니지도 못했다. 타이거우즈처럼 신의 기술을 훔친 남자는 더더욱 못된다.”는 비교(비유)법적 작법에 있는 것이다. 매우 뛰어난 수법의 작법이다.

  수필작법이 이 정도 수준에까지 와 있다면 시, 소설에 못지않은 창작문학이 되었다는 증거다. 수필의 날에 ‘까닭 없이’ 수필을 폄하 한다고 ‘까닭’에 대한 물증은 내어 놓지 못한 채 아이들 떼쓰듯 화만 낼 게 아니라 이 작품 같은 수준 높은 작법의 작품을 가지고 가서 ‘보라. 읽어보라! 이래도 수필이 신변잡기냐?’고 논증하는 학문적 태도를 가져야 될 것이다.

                                                  <창작문예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