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롱 할머니 / 정선모
아리롱 할머니 / 정선모
몸이 불편하신 어머니를 모셔다 드리느라 경로당 출입이 잦아졌다. 날마다 경로당 출입을 하니 자연 그곳 할머니들과도 가까워지고, 사과 한쪽이라도 먹고 가라며 붙잡는 바람에 가끔씩 주저앉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일도 있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나를 반가워하는 할머니가 한 분 계셨다. 숱이 없어 쪽을 쪄도 비녀가 노상 달아나는 머리가 하얀 그 할머니는 별명이 ‘아리롱 할머니’다. 거의 말을 하지 않아 평소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왔다 가지만 노래듣고 싶다고 청하면 “잘 하지도 못하는데…….” 하면서도 손으로 토닥토닥 무릎을 두드린다. 그 신호를 시작으로 ‘아리롱 아리롱’ 하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노랫말은 어릴 적 고향에서 부르던 것이기도 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즉석에서 만들어 붙이기도 하여 들어보면 재미있는 것이 많다. 주름진 얼굴이지만 여전히 고우신 할머니가 눈을 지그시 감고 조용조용 ‘아리롱’을 부르면 시끌벅적하던 경로당이 어느새 아리롱 가락에 잠겨든다. 가끔씩 추임새도 넣고, 무릎장단으로 할머니의 노래가 계속 이어지도록 흥을 돋우기도 하며, 후렴으로 함께 ‘아리롱 아리롱’ 하는 어르신들 모습이 여간 보기 좋은 게 아니다.
체구도 자그마하신 분이 어찌나 조그맣게 부르는지 노랫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을 때도 있어 좀 크게 부르라고 조르면,
“아녀자의 목소리가 울타리를 넘으면 안 된다는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으며 자라서 그래.”
하신다. 그래서 그런지 힘주어 부르지 않는데도 할머니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괜시리 서러운 마음이 든다. 아리롱을 발음하면 아리랑과는 좀 다른 느낌이다. 아리랑의 ‘ㅏ’는 음이 확산되는 느낌을 주는데 아리롱의 ‘ㅗ’는 안으로 잦아들며 길게 여운을 남긴다. 마음껏 기를 펴지 못하고, 조신함을 최고의 덕목으로 강요받고 살아온 이 땅의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할머니의 일생을 구구절절 풀어놓지 않아도 신산했을 삶이 느릿한 아리롱 가락이나 노랫말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지난봄부터 아리롱 할머니가 경로당의 주요 화제로 떠올랐다. 아파트 울타리 밖에 손바닥 만한 텃밭을 가꾸는 아리롱 할머니 밭에 한 할아버지의 발길이 잦아진 것이다. 아침나절 할머니가 나오기 전에 먼저 와서 풀을 뽑고, 물을 주는 모습을 나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다. 그냥 거드는 것이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란다.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 할아버지도 경로당에 나오시는데 말없기는 할머니 못지않은 분이셨다.
자신의 이야기가 자꾸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자 할머니의 경로당 출입이 뜸해졌다. 어쩌다 밭에서 할아버지라도 만나면 발길을 돌려 얼른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등이 굽어 빨리 걷지도 못하면서 허둥대며 걸어가려니 애꿎은 팔 동작만 커지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를 부르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눈길은 할머니가 문을 닫을 때까지 거두어지지 않았다. 그런 두 분의 모습을 보고 온 날은 알 수 없는 조바심에 목이 탔다.
부지런한 할머니가 전처럼 밭에 나오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그런데도 할머니 텃밭은 여전히 정갈하게 가꾸어져 있었다. 상추도 알맞게 솎아져 있고, 고추나 가지엔 버팀목이 알뜰히 세워져 있었다. 잡초 하나 없이 말끔한 텃밭 가에서 담배를 태우는 할아버지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밭가에 할아버지가 백일홍을 심었단다.”
“분꽃도 몇 포기 구해다 심었다지, 아마?”
어머니를 통해 간간이 두 분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심하다 싶게 내외를 하는 할머니의 마음이 언제쯤 열릴까 궁금하였다. 유난히 더운 날, 함께[ 사는 딸의 손에 미숫가루를 들려 밭으로 내보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얼마 뒤, 느닷없이 할머니의 부음소식이 전해졌다.
한동안 할머니의 텃밭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장마가 져서 밭고랑이 허물어지고, 땡볕이 내리 쬐어 호박잎이 축 늘어져도 아무도 돌보지 않아 그대로 묵정밭이 되는 듯 했다.
어느 날, 시장가는 길에 습관처럼 밭으로 눈을 돌리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호미를 든 할아버지가 쓰러진 버팀목을 다시 세우고 고추를 묶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밭은 어느 결에 방금 이발한 아이처럼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윤기 흐르는 푸른 밭을 둘러싸고 백일홍과 분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수필시대] 2011. 5/6)
작법 해설∣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대답의 하나는 ‘문학은 이야기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창작이란 ‘문학적 이야기 만들기’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라는 개념은 광범위하다. 아침 뉴스에서 들은 이야기도 있고, 회사 안에 떠도는 소문도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들과 문학작품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는 같은 것인가? 물론 아니다. 문학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는 ‘문학적으로 만든 이야기’만을 의미한다. 즉 문학적 이야기란 문학예술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작품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소재를 선택하는 일에서부터 ‘문학적 이야기’가 될 만한 소재를 선택해야 될 것이다.
무엇이든지 문학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모든 소재가 다 모든 작가에게 문학적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마다 그가 잘 만들어 낼 수 있는 소재가 있고 그렇지 못한 소재가 있는 법이다. 문학적 이야기가 될 만한 소재 중에서도 자신이 잘 만들어 낼 수 있는 소재를 선택하였다면 작품창작에 반은 성공한 셈이 될 것이다.
필자는 이 작품 「아리롱 할머니」를 소재를 잘 선택한 작품이라고 본다. 아리롱 할머니 이야기는 소재에서 이미 문학적 이야기가 될 만한 요소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중심 사건(이야기)은 아리롱 할머니와 같은 경로당에 나오는 동네 할아버지 사이의 연정이다.
작가는 작품 전반부에서 ‘아리롱 할머니’라는 주인공 인물상을 보여준 후 후반부에서 할아버지를 등장 시키는 구성을 하고 있다. 즉 수필화자 ‘나’가 할머니를 알게 된 데서부터 시간적 순서대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적 순서 구성법도 구성법의 한 가지인 것은 사실이다. 시간적 순서에 의한 구성법을 통해서 이만큼 작품을 아름답게 형상화 할 수 있다는 것은 문학적 이야기가 될 만한 소재 선택 능력과 함께 이 작가의 작가적 능력을 보여주는 점이라고 지적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적 순서에 의한 서술법을 선택 할 경우 그것이 지난 1세기 동안 수필문학이 사회적 혹평을 들어온 본질적 이유가 되어 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어떤 장르의 문학이 작가들마다 천편일률적으로 시간적 순서대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면 그 장르의 문학에 문학 이론적인 문제가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필자의 작법 해설 비평의 목적은 우리 수필문학이 현대문학 초창기부터 ‘여기의 문학’ 등 사회적 혹평을 들어오게 된 본질적 이유가 창작이론부재에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이제부터라도 시, 소설, 희곡 등 창작문학처럼 수필도 현대문학 이론의 창작론을 작품제작에 적용하자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만약에 이 작품의 경우처럼 지금 상태대로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고 있지만 수필계의 천편일률적인 시간적 순서에 의한 구성법이라는 협의를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 생각해 보는 일이야말로 금일의 수필문학의 관심사일 것이다.
문학창작이 창조적 구성법을 요구하는 이유의 하나는 독자들의 지적 만족감을 충족시켜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빼어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남감이 아무리 아이들은 좋아하는 것일지라도 어른들에게는 재미없는 법이다. 왜 그런가? 아이들의 지적 능력과 어른의 지적 능력의 현격한 차이 때문인 것이다. 문학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아니다. 문학은 어른들 중에서도 최고의 지성을 갖춘 사람들, 또 그 중에서도 문학적 소양까지 갖춘 사람들의 지적 감상 대상이다.
E.M 포스터는 동굴 속에서 ‘옛날이야기’를 듣던 원시인은 입을 헤 벌리고 말 잘하는 이야기꾼의 입을 바라보며 ‘그래서, 그래서?’ 하며 이야기를 듣기만 하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문학작품 독자들은 앞서 읽은 내용을 기억하면서 그것을 현재 읽고 있는 장면에 결부, 조합 시키는 또 다른 구성작업을 하면서 작품을 읽는다고 하였다. 독자는 그 같은 고도의 구성작업을 통해서 만들어진 작품을 해독하는 지적 즐거움을 즐기면서 작품을 감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이 현재 상태만으로도 아름답게 형상화 된 작품임에도 시간적 순서에 의한 서술법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천편일률적인 수필문단의 작품 중 하나라고 여겨질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다음의 문장을 서두에다 끌어다 놓는 방법으로 시간적 순서를 깨트리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봄부터 아리롱 할머니가 경로당의 주요 화제로 떠올랐다. 아파트 울타리 밖에 손바닥만한 텃밭을 가꾸는 아리롱 할머니 밭에 한 할아버지의 발길이 잦아진 것이다. 아침나절 할머니가 나오기 전에 먼저 와서 풀을 뽑고, 물을 주는 모습을 나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다. 그냥 거드는 것이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란다.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 할아버지도 경로당에 나오시는데 말없기는 할머니 못지않은 분이셨다.
위 문장을 서두에 배치한 후 현재의 서두가 되는 ‘아리롱 할머니’를 알게 된 내력을 서술한 후 다시 위 문장 다음의 이야기 즉, “자신의 이야기가 자꾸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자 할머니의 경로당 출입이 뜸해졌다.” 이후를 작품 후반에 배치해 본다면 천편일률적 시간적 서술법의 작품이라는 협의를 받을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 중에는 현재와 같은 구성법만으로도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고 있는데 굳이 구성을 바꿀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구성법’은 ‘시간적 순서에 의한 서술법’을 의미하고, ‘시간적 순서에 의한 서술법’은 자칫 위에서 지적한 대로 지난 1세기 동안 수필이라는 문학이 사회적 혹평을 들어 온 본질적 문제인 ‘구성이 안 된, 사실의 소재 자체의 나열’이라는 협의를 받을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이다. 사실의 소재 자체는 아무리 기상천외한 이야기라도 창작한 것이 아닌 사실의 이야기를 의미한다. 독자의 말대로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단지 시간적 순서에 의해서 서술된 작품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문학적 이야기’가 아닌 천편일률적인 기존의 수필 중 한 편으로 여겨진다면 수필문학의 큰 손실이 아닌가.
비록 사실의 이야기보다 못한 재미없는 이야기가 될지라도 <창작ㆍ창작적>인 작품이 되어야 ‘사실의 소재 자체의 나열’이라는 협의로부터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이란 ‘문학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학적 이야기 만들기’의 본령은 구성작업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