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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에 가두어진 섬, 진골목 ㅡ 장호병

장대명화 2012. 3. 25. 01:32

 

                       세월에 가두어진 섬, 진골목 ㅡ 장호병

 

 내 집 마련의 기쁨을 문패 거는 것으로 시작했던 때가 엊그제 같다. 옻칠 위에 새겨진 이름의 빛나는 호마이카 글씨만으로도 행인들은 집주인의 지체를 알 수 있었고, 그 집 담장 위의 쇠창살이나, 철조망, 병조각만으로도 충분히 방범효과를 보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름 석 자 걸 데가 없는 아파트 생활자는 물론 대저택을 가진 이들도 요즘은 아예 문패를 걸지 않는다. 드러내지 않으려는 겸손에서라기보다는 번잡한 세상과 담을 쌓으려는 의도가 오늘의 사생활보호라는 미명의 핑계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리라.

 외지에서 찾아오는 이들이 있으면 난 자주 그들을 진골목으로 안내한다. 우리가 일상으로 사용하는 사투리에서 유래한 이 이름이 ‘긴 골목’이라는 표준어보다 훨씬 정감이 나서 좋다. 약전골목에서 종로로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난 사잇길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경상감영 공원까지 이어지는 길이 진골목이다. 구한말 또는 50년대의 골목풍경인 돌담이나 붉은 벽돌담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아직도 집안과 바깥을 소통시켜 주는 노란 나무 대문이 버티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어느 새 마음은 고향에 온 듯 푸근해진다. 대문채 정중앙에 까만 페인트칠을 뒤집어 쓴 문패가 그 집의 문양처럼 버티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電話 二七六番’이란 글씨가 선명하다. 이름 석 자보다 더 자랑스럽게 걸었던 전화번호다. 처음 이 문패를 보았을 때 웃음이 절로 나왔다. 최근에서야 난 역시 속물이구나 싶어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전화번호부가 없었던 시절 남을 위한 집주인의 배려란 사실을 왜 나는 진작 읽지 못했을까.

 돌담길을 돌아서면 진골목식당이란 간판이 우리의 식욕을 부추긴다. 이 식당은 코오롱을 창업한 이원만 회장이 서병원으로부터 1933년 매입하여 살았던 집의 본채이다. 육개장과 육국수, 호박전으로 이름이 난 이 집은 대구에서 ‘한때는 내로라’하는 유지들로 언제나 북적인다. 내가 이 집을 즐겨 찾는 연유는 음식 맛도 맛이지만, 식사 전후에 담소하며 골목길을 걷는 동안의 깨소금 같은 시간이 좋아서이다. 외지인들을 위한 식사대접은 핑계이고, 이 길을 걷는 동안 난 적어도 칠팔십년은 거슬러 올라가보는 시간여행을 즐긴다.

 식당 초입에서는 1937년 지어진 대구 최초의 2층 양옥인 정소아과 간판이 보인다. 1947년 이 건물을 매입하여 소아과를 개원한 정필수 원장은 구십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이 건물의 원형을 유지한 채 60년 동안 이곳에서 아직도 진료를 계속하고 있는 진골목의 인간문화재로 불리는 분이다.

 종로2가에 자리한 미도다방은 대구사회를 움직여왔던 지식인들이 즐겨 찾는,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이다. 어르신들로부터 ‘정 여사’로 불리는 마담 정인숙 씨는 처음에는 중앙파출소 옆 화방골목에서 다방을 개업했다. 노인들에게는 커피 값을 할인해 줄 뿐만 아니라 부모처럼 살갑게 시중을 든다. 노인들이 육교를 건너오는 것을 마음 아파했던 그녀는 다방을 진골목 입구로 옮김으로써 종로2가를 명실상부한 실버의 거리로 만들었다.

 대구문인협회장을 지내기도 한 목인 전상렬 시인은 타계 직전 신문에 ‘미도다방’이란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시 구절처럼 ‘가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아도 추억은 가슴에 훈장을 달아준다. 가슴에 훈장을 단 노인들이 저마다의 보따리를 풀어놓고 차 한잔 값의 추억을 팔며 …… 한 시대의 시간벌이를 하고 있’는 곳이 미도다방이다.

 진골목에 오면 누구나 말수가 늘어난다.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발기하였으며, 진골목 서씨집안의 부녀자들도 이에 뒤질 세라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함으로써 종로의 기생들까지 나서서 은가락지 은장도 은비녀 등의 패물을 내놓게 만들었다. 이 일은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의 발족으로 이어졌으며 전국적으로 여성들도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진골목은 몰락한 왕도의 흔적이 아니면서도 높은 빌딩과 화려한 조명을 외면한 채 역사와 세월에 갇혀 외로운 섬으로 남아 있다. 발에 밟히는 블록 한 장, 골목길 구비마다 우리의 아픈 근대사가 현재와 묘하게 공존하고 있다. 체스터턴은 ‘세상에는 섬처럼 완전히 시적인 것도 없다’고 갈파했다. 인걸은 갔지만 그들을 반추하는 은발의 인텔리들은 스스로 섬이 되어 망망대해를 지키고 있다.

 추억의 훈장이 녹슬지 않도록 이야기의 꽃을 피워내는 그들의 거리는 언제나 신선하다.

<한국수필, 2007,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