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대생과의 대화 / 김남석(金南石)
어느 여대생과의 대화 / 김남석(金南石)
4교시를 마치고 울타리 위 숲 속 벤치에 앉는 시간이었다. 한 여학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시락 대신 빵과 콜라 두 병이 놓여 있다. 아마 내가 이 시간이면 으레 여기 와 쉰다는 습성을 알았다는 듯이.
초가을 코스모스가 미풍에 흔들리며 하늘은 구름 한 조각도 용납하지 않았다. 끝없이 맑고 푸르고 높은 하늘. 그녀의 시선은 오래 동안 그 아득한 신비의 나라에 머물고 있었다. 이윽고 콜라병에서 시원한 거품들이 두 컵에 부어졌다. 몇 마디 오고간 후다.
“선생님! 응전과 도전, 어느 쪽이 인간에게 먼저 필요하다고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뜻밖의 급습이 네 시간을 내려 이어진 피로의 순간을 휴식에서 뺏어간다.
“왜 갑자기 그런 걸 묻지?”
“절실한 문제예요. 요즘 저한테 있어예요!”
절실한 것은 바로 나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바로 그 어느 쪽을 먼저 발휘하느냐(?)의 문제에 극한 되기에. 나는 <아놀드 토인비>의 주장을 언제나 긍정하며 그 깊은 신화시대의 고요한 원시의 호수 속에 비친 서정의 대화를 또한 그리워한다. <도전과 응전>은 국한된 어느 시대의 산물이 아니다. 삶이 땅 위에 뿌려진 날에 이미 싹 텃고, 평화와 전쟁과, 질투와 사랑과, 희생과 살육과― 이 이질적 동시성은 마치 손등과 손바닥이다. 바로 삶은 ‘모순의 연루(連累)’라고 하는 깨어진 질서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어디서 벌레가 운다. 가냘픈 생명체의 초로(草露)가 또 나의 감정을 건드리고 있다. 여대생은 머리를 푹 숙인 채 말이 없다. 귀만이 소라껍질이 되어 있다. 파도소리 아닌 내 음성에 도취 되듯이. 도전과 응전! 그것은 <파우스트>의 천상서곡에서 천사장들이 신의 창조의 거창한 찬송 속에서 시작됐다는 사실. 그러나 그 창조의 빛은 온 누리 모든 생명에게 한결같은 은총의 파장은 아니었다. 완전에 깃든 불완성, 이 모순 때문에 생명은 이율배반의 숨결을 마신다. 울음과 웃음, 기쁨과 슬픔, 노여움과 반가움, 사랑과 미움, 음악은 바로 이 진리의 대위법을 연주하고 있다. 합창은 바로 이 이질적 동화를 실현한다. 소프라노가 메조 소프라노를, 테너가 바리톤을 절실히 요구하는 이 대위법의 작곡 법칙은 바로 언어학 음성의 조음으로도 나타난다. 만나면 이별이요, 사랑하다가 싫어지는 인간의 이 무서운 법칙은 바로 우주정신이다. 천상서곡에서 찬송을 거부하던 사나이― 메피스토펠레스. 그는 신에게 신이 가장 사랑하는 인간의 누구 하나를 시험하겠다고 맞섰다. 신이 그 도전을 수락했다. 이 기회는 신의 창조가 아직 불완전함을 증명한다. 이것으로서 신은 그 창조의 벅찬 직능을 영원히 계속해야 하는 시련의 밧줄에 묶이게 됐다.
토인비의 착안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도전과 응전의 형태란 두 개의 인간 사이에 나타난 조우(遭遇)의 전투다. 그는 그 상호 충격으로서 창조의 불꽃이 점화된 한 개의 인석(燐石)과 한 개의 강철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문명의 형태, 모든 인간의 발전, 아니 역사의 진폭은 바로 그것이다. 문명과 역사와 인생의 좌절과 붕괴, 허탈과 방황, 파우스트의 고뇌와 잠 못 이루는 한밤의 젊은이.
인간의 삶은 꽃피는 요람에서가 아니요, 곧 질풍의 언덕, 가혹한 환경의 소산이라는 철학적 명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체념― 여대생은 그의 환경에 응전을 선포하라는 신호를 나는 주었을 뿐이다.
겨레가 살기 위해서 역사적 여건과 응전해야 한다. 사회생존을 위해서, 개인의 행복과 복지사회를 위해서 응전해야 한다는 진리를 떠나서 우리의 현재는 삶을 허용할 길이 없다. 역사악에의 응전, 인간악에의 응전, 아득한 옛적 문명의 눈이 트이던 날, 아프라시아 초원의 습윤지(濕潤地), 그 오랜 건조에 배수의 응전으로 이집트 문명을 꽃피운 고대설화 속으로 나는 그 학생의 젖은 동자를 이끌고 들어갔다. 흥건이 고이는 그 눈의 풍요는 호수. 그녀의 숨소리는 이해의 초원이 된 듯하다.
어디서 여치가 우는 듯 싶어진다. 가냘픈 생명률들은 이 시간에도 여전히 울부짖음을 멈출 수 없다. 산다고 하는 하나의 드높은 자랑은 다함없이 응전해야 한다는 숙명의 고난 속에 있기에.
도전자를 미워하라.― 이것은 평화의 서장이다. 그러나 응전하지 못하는 자를 믿지 말라. 이것은 생존의 신조다. 대체로 어느 쪽이냐? 도전자냐? 응전자냐? 나는 대체 누구냐? 어느 깃발을 날려야 하느냐 말이다. 가냘픈 가슴에 할딱거리는 여대생의 숨소리가 나비 날개처럼 하나의 애잔한 형태가 되어 내 눈앞에 펄럭인다. 떨고 있는 꽃잎파리다. 흐르는 물거품이다. 떨어져 가는 빗방울이다. 푸른 하늘에 점찍은 한 조각 지하철 차표 만큼한 흰구름 덩이다. 이 어설픈 존재의 깊숙한 숙제를 나는 그녀에게 몇 마디 까칠한 음성으로 납득시킬 수 있었을까? 아득한 고대의 저 아프라시아 초원의 갈잎소리가 들려온다. 원시의 미풍이 그녀의 눈물 젖은 수건에 고요히 날개를 접고 내린다.
이 기막히도록 절실한(?) 문제―.
그것은 너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것이요, 너와 나의 것이며, 뭇 생명의 그것이었다.
응전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들. 그것은 기어코 신의 이름을 부르며 신에게 도전해야 하는 우주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도전은 죄악이 아니다. 응전은 배신이 아니다.’― 이 현실의 진리 앞에서 나는 무엇을 지껄이며 한 여대생의 인생의 숙제를 풀어 줄 능력이 있었으랴!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풀잎들은 그대로 바람결에 흔들린다. 하늘같은 이념. 풀잎 같은 생명력. 이 바람결 속에, 이 고요한 벤치의 텅 비어진 두 개의 콜라병 앞에서, 나는 무엇으로 종장의 마무리를 지어야 하나? 그녀의 손길을 조용히 잡아 일으켜, 5교시를 부르는 벨의 강철소리를 들으며 일어섰다.
창작적인 수필 (작법 해설)
이 작품은 내용상으로는 응전과 도전이라는 철학적인 문제를 토의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대답의 무게는 응전 쪽으로 기울고 있는 듯 하지만 그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독자는 이 작품 속에서 그런 무거운 철학적 토의 보다는 가을, 인생의 어떤 서정적 감상을 느끼게 되지 않는가? 응전과 도전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고, 그 같은 주제에 대한 토의가 캠퍼스 한켠의 숲속, 쉬는 시간, 여대생, 콜라, 질문, 사변적 서술, 제5교시 종소리 등의 배경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품임에도 오히려 감상적(Sentimentalism)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만약에 이 작품이 「어느 여대생과의 대화」가 아닌 「어느 남대생과의 대화」였다면 같은 애잔한 감상이 느껴졌을까? 그럼에도 이 작품의 <鳥자 치킴>은 주제에 관한 대학 교수다운 작가의 전문적 수준의 사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