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 박학봉
박학봉 - 연꽃
꽃보다 잎이 향기로운 계절에 잊지 못할 사람과 더불어 산사를 찾았다.
이른 아침 안개가 자욱한 산사는 엄숙한 염불소리와 예향(禮香)에 젖어 하루의 문을 열고 있었다. 뜰 가운데 연못에는 어제 밤에 오므렸던 연꽃들이 이른 새벽부터 마음을 다독이며 연분홍 색 불을 밝히고 환하게 피려는 찰나였다. 봄이 싣고 온 미풍(微風)이 간지럽게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연꽃이 미풍을 만나면 분홍꽃잎이 벌어진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개화의 풍광이다. 어찌 그냥 볼 수만 있으랴. 흥에 겨워 슬며시 술 생각이 절로 났다. 술을 마실 때는 모름지기 운치 있는 주붕(酒朋)과 어울려야 하고, 꽃을 감상할 때에는 모름지기 꽃을 알고 호걸스러운 벗과 어울려야 한다고 했다.
"연(蓮)은 언제나 진흙 속에 뿌리를 담고 서 있다. 더러운 늪에 뿌리내리고 있으면서도 올곧고 청정한 자세로 핀 연꽃을 보면 감히 다른 꽃처럼 대하기가 어려워진다"고 했다.
화엄경 탐현기에 보면 "연꽃은 첫째 '향(香)' 이요, 둘째 '결(潔)' 이요, 셋째 '청( )' 이요, 넷째 '정(淨)' 이다. 이러한 모든 품성을 다 갖추고 있어서 4가지 덕(德)을 지녔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다섯째로 "열(熱)"을 더하고 싶다. 연꽃은 다른 꽃과 달라서 저녁에는 꽃잎을 닫아 충매(蟲媒) 작용하는 손님 벌에게 따듯한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기온 차가 심한 새벽엔 연꽃 스스로 열을 발하여 향을 멀리 발산하고, 추위에 떨고 있는 곤충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게 연꽃의 자비(慈悲)다. 또 여섯째로 '연속(連續)'을 보태야 한다. 대부분의 꽃들은 같은 시기에 핀다. 그러나 연꽃은 연달아 핀다. 그래서 이집트에서는 연꽃을 탄생과 거듭 태어나는 생명 즉 재생이라는 뜻의 불사조를 상징하기도 한다.
해뜰 때 피었다가 해질 때 지는 연꽃의 속성 때문에, 태양 숭배의 내세와 무량한 생명을 상징해 제행무상, 인연 등의 깨달음을 담고 있다. 끝으로 '윤회(輪廻)'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 연꽃의 생김새는 축을 중심으로 방사되는 바퀴 살에 비켜 윤회의 가르침을 암시하는 까닭이다.
대개 절에 가면 연화대를 비롯해서 천장과 벽화, 문살과 돌계단까지 모두가 연꽃으로 장식이 되어있다. 이처럼 사찰 어디서나 연꽃 문양을 볼 수 있는 것은 연꽃이 불가의 상징적 꽃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불교와 같이 전래된 연꽃은 '하화(荷花)'라고 부르는데, 荷(하, 연꽃)는 和(화, 화합)와 合(합, 합할)을 뜻한다. 사찰마다 연못에서 재배한 연꽃의 역사 또한 유구하다.
중국의 소주 호산궁 안에는 연못이 있고, 그 위에 돌다리가 있다. "오 나라 왕 부차가 총애하던 왕비 서시와 함께 연못에 피어있는 연꽃을 땄다"고 해서 '채련교'라 부르며, 강남 지방에서는 육조시대 양 나라의 원제가 지은 '채련부'가 지금까지도 전해온다. 우리나라도 경북 상주지방에서는 연밥 따는 아이들이 '채련요'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또 미인의 걸음걸이를 일컫는 연보(蓮步)도 있다. 연꽃과 잉어로서 여성과 남성을 상징하는 민화도 있는데 그것은 사랑과 풍요의 상징으로서 오랜 세월 우리 생활과 친밀하게 사귀어왔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백합꽃에서는 외국 여인의 발랄함과 세련됨을 느낄 수 있지만, 연꽃은 우리네 시골의 숫처녀와 같은 질박함과 순수성을 느낄 수 있다.
연꽃도 홍련보다 백련이 희귀종이며 향기도 짙다. 산 안개가 물러가고 소나기가 한 줄금 퍼붓는 날, 빗방울이 쏟아져서 백련 잎새 위로 또르르 구를 때 그 아롱거리는 옥구슬 같은 모습을 이름하여 옥련이라 부른다. 맑은 향이 멀리까지 유혹하는 연꽃바다에 백학 한 마리가 날아든다.
배고픈 백학이 연못에 앉으니
백련은 곱고 맑은 매무새로 맞는다
백학이 한 발 옮길 때마다
백련은 반기듯 너울너울 춤을 춘다
백학의 날개 한번 파닥거릴 때마다
둥근 방패 잎은 그윽한 백련 향을 풍긴다
청아한 백학 울음 한번에
백련 꽃은 함초롬이 피어 웃는다
백학이 맑은 물에 마음 씻으니
염원하는 마음씨로 탐스러운 옥련 얼굴이
연못 가득히 비춘다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요모조모 연꽃을 훑어보며 문명의 옷을 벗어 던지고 자연으로 돌아가 연꽃 앞에 서 있으니 금전, 명예, 경제 등의 온갖 인간의 허영이 사라지는 듯했다. 쫓기며 부딪히고 헝클어진 모든 것들을 모아 천천히 거두어 가는 것 같다. 석양을 향한 마음 속에는 인생의 정감, 기쁨, 슬픔 등 갖가지 환상이 사라지고 연화의 세계에서 얻은 보리심(菩提心)으로 충만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