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우수 수필

간이역 / 김재희

장대명화 2011. 10. 8. 00:17

 

                                간이역 / 김재희

 

 

 기차를 타면 뒤로 밀려나는 풍경 보기를 즐겼다. 들녘 위로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기찻길과 점점 작아져 가는 산과 들. 돌아와 누우면 그것들의 뒷모습에 가슴 깊이 고적감이 흘렀다. 그런 날 밤은 왜 그리 허허롭던지. 기차여행을 피하리라 했건만 그래도 계절이 바뀌면 또 기차역을 찾는다.

 개찰구를 빠져나온 플랫폼의 공기는 마냥 달랐다. 지나는 기차마다 들녘에서 묻혀 온 가을 내음 때문인가. 몇 발짝 저쪽 역사 안으로 들어서니 가을 기운이 가득 차 있었다. 쏟아져 내리는 햇살은 조용한 곳만을 찾아 내리는 듯 역사 귀퉁이 초막에서 대롱거리는 조롱박에 더 많이 모여 있는 것 같다.

 굳이 완행열차를 고집하는 이유는 작은 간이역의 풍경을 더 자세히 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바쁘게 가는 기차의 요동엔 운치가 없었던가. 덜커덕거리는 소리와 몸 흔들림의 여운이 살짝 가시려는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이어지는 요동이 참으로 정겹게 온 몸에 퍼진다. 차창 밖으로 내다보는 들녘은 온통 가을빛이다. 다랭이마다 농도가 다양한 노란 벼이삭, 막 피어오르는 억새, 누런 몸뚱이만 덩그렇게 남아 있는 호박, 통통하게 여물어 가는 풀 이삭들, 정말 놓칠 수 없는 풍경은 냇가에서 서성대는 하얀 백로들의 여유로운 날갯짓이다.

 종착역이 가까워진 호남선 어느 간이역, 아담하고 시골 정취가 담뿍 배인 한적한 역이었다. 몇 사람을 내려놓고 다시 떠나는 기차의 꽁무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두어 시간 몸담았을 뿐 감정도 연유도 없는 물체에게 아릿한 허전함이 이는 건 왜일까.

넓지 않은 마당에 깔린 햇살이 유난히 산뜻해서 눈시울이 시큰하다. 그런 간이역에 쏟아지는 햇살은 도심에선 발붙일 힘이 모자라 뒤 밀린 햇살들이리라. 선하고 착하기만 해서 누구와 부딪쳐 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마냥 조용하게만 살아가는 햇살들.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내 어깨에 성큼 내려앉은 햇살은 내 모습 어느 구석에서 동질감을 느낀 것일까.

 기차가 떠나면서 남기고 간 소음이 간이역 바닥에 가라앉자 잠시 한편에 물러서 있던 고요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 들었다. 고요를 품고 스며드는 공기의 흐름이 귀청 속에 머물러 있는 기적의 여음마저 완전 소멸시켜 가는 동안 철로 끝에 맞닿은 듯 한 빈 하늘만 바라보았다. 하늘은 어찌 그리 맑던지.

 울컥해지려는 마음을 다스리려 시선을 접고 돌아서자 몇 사람만 들어서면 꽉 메워져 버릴 듯한 작은 건물이 눈길을 잡는다. 하얀 칼라를 달고 다녔던 시절에 보았던 그 건물이 지금은 몇 개나 남아 있을까.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친구들과 조잘대던 소녀시절의 맑은 웃음이 되살아날 것 같아 꾀죄죄하게 때가 묻은 의자에 걸터앉아 잠시 먼 그리움에 젖는다. 화분 몇 개에 심어진 노란 국화 송이 사이로 다리에 꽃가루가 잔뜩 묻은 벌들의 움직임이 발걸음을 더 붙잡는다.

 역 이름이 써 있는 간판 옆의 소나무 잎 사이로 잘게 부서져 내리는 햇살이 넋을 잃고 서 있는 나를 채근한다. 햇살의 채근에 마지못해 옮기는 발걸음 탓인지 마냥 터덜거리며 주춤거리는 내 행동이 좀 이상해 보였을까. 들고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다 아는 듯 스스럼없는 대화를 나누던 개표원이 내게는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정중히 인사를 건넨다.

"어디를 찾아 오셨습니까?"

"예? 아 예, 그냥 이역을……."

 말끝을 흘리며 어색해 하는 내 표정 때문인지 자꾸 이것저것을 물어 보았지만 뭔가 확실치 못한 대답을 남기고는 도망치듯 역사를 빠져나갔다. 다시 되돌아갈 기차시간을 맞추기 위해 역사 주변의 들길을 서서히 거닐었다. 익어 가는 벼이삭의 풍성함을 안고 있는 들길에는 초가을 오후의 햇살이 나른하게 퍼져있었다. 스산했던 내 감정 틈새로 나른한 기운이 슬며시 스며들었다.

 승용차 한대가 쌩하니 일으키고 간 바람에 길가 코스모스가 심하게 흔들리다 한참만에야 제 자리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