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적 불교 읽기 ㅡ 삼독(화)
삼독 ㅡ 화1
'유식30송' 에 의하면 화는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미워하고 성내는 것으로 불안과 악행을 일으키는 바탕이 된다. 또 화의 관련된 이차적 감정으로는 분노와 원한이 있는데 분노는 이롭지 않은 대상을 향해 일어나는 거칠고 악한 감정이고, 원한은 분노로 인해 악을 품고 버리지 않아서 맺어진 감정으로 아주 괴로운 것이 특징이다.
화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냥 우리의 마음이 화나는 대상을 향해 흥분하고 부글부글끓고, 마음과 분노를 드러내거나 억압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다. 뿐만 아니라 화냄으로 인한 재앙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엄청난 불행과 고통을 유발한다. 앙굿따라니까야는 화내는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화내는 사람은 못생기고 수면장애가 있다. 그가 얻은 이익은 잃어버리게 되고 말과 행동으로 명성에 손상을 입는다. 화에 압도되는 사람은 자신이 노력해 얻은 부와 지위를 파괴한다. 친척, 친구, 동료들이 피한다. 화는 상실을 가져온다. 화는 마음을 불태운다. 화내는 사람은 그를 위태롭게하는 위험이 화냄에서 태어나는 줄을 알지 못한다. 화내는 사람은 부처님의 법을 보지 못한다. 화에 의해서 지배받는 사람은 어둠속에 있다. 그는 나쁜 행위를 마치 선한 행위인 것처럼 행하고 나서는 뒤에 화가 없어지고 나면 불길속에 타는 것 같아 괴로워한다. 그는 연기에 휩싸인 불꽃처럼 가려져 있고 망가져 간다. 화는 순식간에 퍼져나가는데도 그는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악에 대한 공포가 없고, 말에 존중함이 없다. 화에 지배받는 사람은 어떤 밝음도 줄 수 없다. 화는 신. 구 .의. 삼업을 잘못 행하게 하므로서 결국 악도에 떨어지게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왜 화가 날까? 화는 우리 자신이 공격받았다고 느끼거나 무시나 모욕 등 부당하게 취급받거나 또는 거부당했다고 생각될 때 일어나는 감정이고 그에 대해 보복하려는 경향성과 관련된 에너지다. 그러므로 자아에 대한 집착이 강할수록 화의 에너지도 그만큼 강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화가 났을 때 그 화나는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은 '나', '나의 것' 이 손상되었다는 무의식적 판단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유식의 제7 마나식인 자아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즉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나'에 위배되거나(아만, 아견에 위배), 나에 대한 사랑이 상처를 입었다고 느낄 때(아애의 손상), 그 사실에 대한 성냄이고 또 그것과 연관된 대상을 향한 공격성이다.
성냄과 공격성은 불안, 긴장, 두려움 등 이차적인 심리적 상태를 유발한다. 또 그로 인해 다양한 반응적 행동양식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는 화를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서 달라진다. 흔히 화를 표현하는데는 적극적인 방식과 수동적인 방식, 두 종류로 나누어서 이야기 한다. 전자는 성냄과 공격성을 대상에게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고, 후자는 간접적 방식으로 화나는 대상을 향해서 화를 직접적으로드러내지 못하고 억압하거나 보다 안전한 다른 방식으로 전환해서 표현하는 방식이다.
전자는 약자를 괴롭히거나, 파괴적이고 과장된 행동, 흥분하고 이기적인 행동, 위협적인 행위, 예측불허의 감정 표출, 앙갚픔 등의 특징적 행동을 드러낸다. 후자는 냉정함, 회피, 무기력, 강박적 행동, 심리적 조작, 비밀스런 행동, 자책, 자기희생 등의 특징적 행동을 보인다.
부처님 말씀에 화내는 자를 향해서 화를 내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다. 왜인가? 화내는 자는 마치 화를 품은 압력밥솥과도 같기 때문이다. 화내는 자를 향해 화로써 맞대응하는 것은 활활 타는 불길에 기름을 붙는 격이다. 스스로 타는 자를 향해서 자아의식을 발동하는 것은 어리석고 어리석은 일이다. 화내는 자를 향한 최선의 무기는 무아다. 왜냐하면 화는 아집의 불길이기 때문이다.
삼독 ㅡ 화 2
화의 근본 뿌리는 유식의 제7마나식인 자아의식과 관련돼 있다고 했다. 즉 화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나'의 프라이드를 건드리거나(아만), 나의 이미지, 생각에 위배되거나(아견), 또는 나에 대한 사랑이 상처를 입었다고 느낄 때(아애), 그 사실에 대한 성냄이고 그와 연관된 대상을 향한 공격성이다.
화의 에너지를 정화하고 해독하는 과정은 자아의식의 작용을 완화시키고 멈추게 할 수 있는 무아에 대한 깨달음은 화에 국한되지 않고 탐욕, 어리석음, 거만함, 질투, 아첨, 등 일체의 부정적 심리상테를 멈추게 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길은 너무 멀고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우리는 매순간 뭔가 우리의 기대와 뜻에 어긋나는 일로 너무나 자주 화를 내고 짜증을 낸다. 그러므로 화에 초점을 실천 수행법이 당장 필요하다.
불교는 수행하는 이의 특성과 목표,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명상방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들 방식은 궁극적으로 무상, 무아, 공 등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가깝게는 상식과 교양수준을 벗어난 사회적 행동과 심리적 증상들을 정화하고 해독한다. 이를테면 탐욕이 많은 이들은 오온 또는 부정관(不淨觀)이 좋고, 화가 많은 이들은 자비명상이 효과적이다.
자비심은 화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적극적인 표현형은 물론이고 간접적이고 억압적인 간접적 표현형을 위해서도 매우 효과적이다. 대개 화를 많이 내는 사람의 일차적 피해자는 그 주변 사람들,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화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형은 그 주변 인물들로 하여금 늘 불안하고 긴장하게 만든다. 그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느끼는 불안이나 긴장감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를 쉽게 드러내는 사람은 자비수행의 대상으로 제일먼저 자기와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사람들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그런 다음 사랑하는 그들이 행복하고 편안하고, 건강하기를 기원한다. 그러한 자비명상의 과정들은 상대방을 향한 자신의 애정과 주의를 환기 시키고 자기중심적인 에너지를 타자 중심적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한편 화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억압하고 냉소적, 회피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자비명상의 대상으로 너무 가깝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오히려 비효율적일 수 있다. 개인적인 경험이긴 하지만 그들은 가까운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억압하는 경향성이 있기 때문이다. 즉 화내기 보다는 주로 참고 인내해 온 대상을 향해서 자비명상을 하는 것은 당장은 좀 무리가 따를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들은 특별하게 개인적 관련이 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명상하고 그들의 행복, 평화, 안전을 기원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갈수록 우리 사회는 화로인한 공격적 행위에 대해서 무신경해지는 경향이 있다. 특히 청소년 폭력과 아동, 여성들에 대한 성폴력, 학대에 대해 놀라울 만치 너그럽다. 그러나 그것은 너그러운 것이 아니라 무지하고 저급한 문화, 사회임을 입증하는 징표다 왜냐하면 동에서 뺨맞고 서에서 화풀이 한다는 속담도 있듯 화는 주로 강자가 아닌 약자를 향해서 표출되고, 항상 희생양을 찾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수준이 높고 건강한 사회일수록 화의 공격적 행위에대한 처벌은 엄격하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사회라기보다 약자가 보호받을 수 없는 약육강식의 동물사회가 되기 때문이다. 성숙한 개인, 사회일수록 화를 다스리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와 책임으로 인식한다. 화는 우리의 평화, 사랑, 안전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무서운 바이러스이기 때문이다.
ㅡ 서광 스님 동국대 겸임 교수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