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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고무신 / 김경민

장대명화 2011. 6. 29. 22:29

                                              월남 고무신 / 김 경 민 (수필문학 등단작품)

 

 우리는 선생님을 월남 고무신이라는 별명을 부르며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35년 전, 초등학교를 졸업학고 다른 친구들은 다 중학교를 입학을 했는데 나는 중학교를 못갔다. 무능력하고 술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6남매나 되는 우리를 상급학교를 보낼 엄두가 나지 않으셨을 것이다. 까만색 스커트에 흰 카라의 교복, 단정한 단발머리가 그토록 부러웠던 나는 수소문 끝에 비인가 중학교가 있다는 걸 알아내고, 그 학교라도 보내달라고 엄마를 밤새 졸랐다.

 그 당시, 교복 구입할 엄두도 못낸 엄마는, 동네 아주머니들을 통해 남이 입던 교복 한 벌을 얻어오셨는데, 3년을 입곤 난 교복이라서 다림질로 얼마나 닳았는지, 반들반들한 것도 문제였지만, 싸이즈가 너무 커서 깡말랐던 내가 입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이리저리 옷핀을 사용해 대충 꽂아 입고 입학을 하러 가니, 나와 비슷한 처지의 학생들이 남녀 20명 정도 되었다.

 학교라고는 하지만 번듯하고 정확한 장소는 없었고, 군청에서 마련한 허름한 창고를 시작으로 교회 강당이나, 공장을 하던 비어 있는 건물을 빌려 전전하며 같은 목적으로 모인 우리를 위해, 선생님들은 각 공공기관이나 교회 목사님을 비롯해 대학생들이 시간을 만들어 나와 과목별 봉사를 해주셨다.

 그 무렵, 교육대학을 갓 졸업하고, 발령을 기다리고 있던 예비 교육자 한 분이 영어를 담당하겠다고 들어오셨는데, 얼굴은 까무잡잡하고 손질되지 않은 헤어스타일에, 최불암 메리야쓰 같은 상의에, 바지는 모내기를 금방 끝내고 돌아온 영락없는 농부, 그 자체였다. 선한 얼굴에 눈가에는 눈웃음을 머금고 신발은 항상 하얀 고무신을 늘 신고다니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을 갓 졸업한 나이임에 불구하고 멋을 낼 줄 모르며 항상 촌스러운 모습으로 옆집 오빠처럼 편안한 자세로 영어를 가르쳐주셨고, 주말만 되면 우리반 전체를 이끌고 선생님 집으로 대려가서 솜방망이에 석유를 묻혀 햇불을 켜고 밤에 고기도 잡고 옥수수를 삶아 주셨다. 집 주변이 온통 뽕밭으로 둘러싸여 오디열매를 정신없이 따먹고 시커멓게 얼룩진 얼굴을 서로 쳐다보며 깔깔대고 웃었다. 작은 초가집에 살던 나로서는 선생님의 집이 대궐같이 좋아보였고, 토요일 마다 우린 선생님 집으로 몰려가 놀다가 다음 날 점심까지 얻어먹고, 그 먼 시골길을 놀면서 쉬면서 장난치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지금 생각하니 선생님 어머님께서 얼마나 귀찮으셨을까… 너무 철이 없었다.

 우리 읍내에는 남자 중학교와 여자 중학교가 따로 있었지만, 가난한 우리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학교는 재건중학교라는 곳이었는데, 아침 등교시간마다 정식 중학교 다니는 아이들과 마주치면, 그들은 우리에게 똥통학교 다닌다고 놀려 대는 게 죽도록 싫어서, 이 골목 저 골목 피해 다니며 등교를 하다가 도착 시간이 늦은 적도 많았다.

 비가 오는 날은 교회 강당 앞에서 비닐우산을 들고 우리를기다려 주시던 선생님, 얼굴이 까맣고 하얀 고무신을 신고 오셔서 우리들이 '월남 고무신'이라는 별명을 부르고 놀려도 늘 특유의 웃음으로 싱긋이 웃어주시기만 하셨던 선생님이 어느날 정식으로 발령을 받고 떠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가난에 못 먹고 지내서 허였게 버짐 핀 얼굴들 때묻지 않은 천방지축이었던 사춘기 시절의 우리와 첫 만남의 경험과 인연을 맺었던 선생님과 우리들은 첫 정을 떼지 못해 많이 울고 헤어졌는데 그 이후 그 학교도 우리를 끝으로 폐교가 되었고, 각자 제 살길을 찾으러 타향으로 떠났었다.

 가난하게 만나서 동고동락했던 친구들은 어른이 되어 연락이 닿으며 가끔 모임을 가졌지만, 궁금한 선생님 소식은 알 길이 없었고 옛 추억만 더듬다가 아쉬움만 남긴 채 헤어져 돌아오기를 반복하던 어느날 아침, 원주에 사는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재건 시절 영어 담당했던 선생님이 모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발령 받아 오셨다는 지역 신문을 접하고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드렸더니 놀랍게도 우리들 이름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다 기억을 하며, 너무 반갑고 보고 싶어 하신다며 원주에서 모이자고 했다.

 재건중학교 폐교로 인하여 2년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세상과 부딪치며 배우지 못한 설움에 중학교 졸업장을 따고 싶어서 검정고시에 도전할 때 그나마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영어라는 과목이 낯설지 않게다가와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그 짧았던 우리와의 시간을 무수히 많은 날이 흘렀음에 불구하고 보고싶다는 그 말씀을 전해 듣고 만사를 제쳐두고 선생님을 만나러 원주로 한 걸음에 달려가 모임 장소에 도착하였다. 35년 만에 마주 앉은 선생님은 중년이 훨씬 넘은 우리를 금방 알아보고 바쁠 것 없는 느긋한 자세로 변함없이 이름을 불러 주셨다. 비가 몹시도 퍼붓던 날, 비닐우산을 들고 우리를 기다려 주시던 그 웃음으로…

 그토록 어렵고 힘들고 가난했던 시절에 만났던 제자들이 반듯한 모습으로 자라서 제 각기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보람을 느낀다고하시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만은 반드시 할 수 있어"라며 힘을 주신 선생님… 방통대가 결코 호락호락 한 길이 아닌 것을 순간순간 느낄 때 힘들고 고독해서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우리에게 봉사해 주시던 그 모습을 추억하며 다시 일어서서 걸을 것이다.

 월남고무신 선생님… 힘들고 지칠 때마다 그시절 철부지 중학생으로 돌아가 투정을 해도 들어주실 수 있는 건강한 모습으로 오래오래 그 자리에 계셨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