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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앞에서 / 김홍은

장대명화 2011. 5. 15. 12:14

                           난 앞에서

                                                         김 홍 은

 

 난 잎에 묻은 먼지를 오랫만에 대충 닦아 주었다. 분무기로 물을 뿌려주니 잎이 금방 생기가 도는 듯하다. 물기가 묻어서 그런지 불빛에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전깃불을 끄고 희미한 달빛으로 바라보는 잎의 곡선미가 더욱 그윽하게 가슴으로 젖어든다. 살포시 늘어진 난 잎이 깊은 산 속에서 바라보는 실낱같은 초승달 같다. 불빛에 어리는 난 잎의 그림자는, 어쩌면 초저녁 나그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가냘픈 새색시의 간드러진 눈썹 같다고나 할까. 난을 마주하고 있으니 오늘은 공연히 쓸쓸함이 스며들어 하얀 눈으로 덮어버린 깊은 산속의 외딴집에 와서 홀로 머무는 듯도 하다. 마냥 고요함에 젖어드는 슬픔 같은 것들이 가득히 밀려드는 느낌이다. 겨울을 맞는 난의 마음이 어러한 걸까.

 지난 가을이었다. 참으로 몇 년 만에 난 꽃이 처음으로 피었다. 너무도 신기해서 어쩔줄을 몰랐다. 마디마디 자라 올라가며 꽃눈이 터지면서 쏟아놓는 은은한 향기는 고고하였다. 공자는 난의 화품을 두고 왕자향(王者香) 이라고 표현하였음을 조금은 알 듯 했다. 아름다운 꽃은 한 달이 넘도록 피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혼자서 보았다. 아침 저녁으로 혼자 보기는 아까웠어도 집이 누추해서 누구를 초대할 수가 없었다.

 비록 가난하게 살지만 난 꽃이 피어 있는 동안은 내내 마음을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 난 꽃은 화려하게 피지는 않았으나 없는 듯, 고결한 향기를 담아냄에 더 정겨웠다.

 달빛 속에 바라보는 난 꽃은 멀리 떠났다 돌아온 연인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어찌 보면 그리운 이가 수줍어 하듯 화사하게 미소 짓는 모습이었다. 달밤에 난 꽃의 감상은 황홀하다 소박하면서도 도도하지만 안으로는 보드랍고 고요한 여인을 대하는 느낌이다. 겉으로 크게 화사함으로 드러내지는 않으나 마음속에 숨겨둔 청아함의 기품을 은근히 담아내는 것 같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밤도, 허욕에 물들어 괴롭게 살아온 세월도, 인생의 바람에 펄럭이던 문풍지 소리도 조용히 잠들고 고희를 지나는 마루턱에서 외로운 눈물이 흐르는가 가만가만 들린다. 달빛이 젖어드는 늦은 밤이면 연구실의 창문을 닫고 가난한 발자국 소리로 어둠속을 뚜벅뚜벅 걸어가던 젊은 날의 회상들도 난 앞으로 조용히 밀려왔다.

 이런 밤이면허전하고 슬픔 같은 쓸쓸함이 가슴으로 자꾸만 차오르면 자신도 모르게 난 옆에 자주 앉게 된다. 가만히 달빛을 바라보면 지난 날의추억들 난 꽃으로 피어난다. 잎의 먼지를 닦으며 바라보는 난 잎의 아름다운 곡선미는 향기만큼이나 흐믓하다. 여유로운 듯 하면서도, 곱고 가냘프게 뻗어나간 유연미에서는 삶에서 묻어나는 정을 배운다. 난향천리(蘭香千里)를 바라보던 나는 향기만 좋아할 줄 알았지 언제나 변함없는 난의 푸른 정은 모르고 살았다.

 평소에 물도 한번 제때에 맞춰서 주어본 적이 없다. 선물로 보내준 사람의 성의에 반도 미치지 못하는 마음으로 겨우 생명을 유지시켜 주었을 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보내준 고마음도 잊었고, 난에게도 무심하게 살아왔음을 오늘 밤에서야 미안함을 갖는다. 물주는 정성을 다하지 못하고도 꽃이 피기만을 기다리는 욕심을 부렸던 마음이 새삼 부끄럽다.

 어머님이 생존해 계실 적에는 보잘 것 없는 화분이라도 소중하게 식물을 기르셨지만 이제는 하나 둘 다 죽고 몇 개 안 되는 난분이 베란다를 지킬뿐이다. 난 꽃이 피면 그리도 향기를 좋아 하시던 어머니, 달이 뜨는 밤이면 주무시다 말고도 살며시 난 앞에 와서 계셨다. 고향에서 사실 적에도 장독 옆에 작은 화단을 만들어 난초를 심고는 꽃처럼 환하게 웃으시었다. 어머니는 늘 난향 같은 정이 있으셨다.

 이 난은 다시 자라다 어찌하여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오늘밤은 지난날의 살아온 고향을 그리며 시름에 잠겨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달빛이 쏟아지는 날은 난도 지난날의 살아오던 고향을 그리워 하고 있겠지. 이런 밤이면 아내는 조용히 화선지를 펴놓고 난을 쳤다. 이순간은 아내도 한송이의 난 꽃으로 피어있었고 묵향도 난향만큼이나 은은했다.

 나는 많은 난분을 갖고 싶은 욕심은 없다. 많은 친구도 갖고 싶지 않다. 향기를 안으로 담고 정을 주며 살아가는 난 같은 친구가 한 두 사람만 있으면 된다. 사람을 향기롭게 해 줄줄 아는 난향 같은 사람, 난 꽃이 피면 마음 놓고 서로 부르고 싶은 사람이면 된다. 나는 난향 같은 깊은 향을 피우지는 못하나 난처럼 푸르게 살고 싶다.

 난에게는 꽃피울 욕심을 내며 물을 주지만, 정작 부모님이 말씀하시던 덕을 쌓으며 살라는 인덕만리(人德萬里)의 깊은 뜻을 왜 자꾸만 잊고 살아가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