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이야기 / 허창옥
옛날이야기 / 허 창 옥
멀건 갱죽을 휘휘저어 풋나물 건더기를 내 그릇에 넣어주며 시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월산댁네 밭 매러 가자. 어제부터 환도 뼈가 시큰거리는 게 산기가 아닌가 싶은데 이 무슨 야속한 말씀인가. 뜨악해서 어머니를 바라보니 짐짓 모른 체 머릿수건을 두르며 문지방을 나서셨다.
만삭의 배를 감싸 안고 어기적어기적 어머니 뒤를 따라가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햇살은 금싸라기처러 눈부시지만 휘감겨오는 바람은 시린 봄날이었다. 눈두렁밭두렁을 위태롭게 걸어서 보리밭에 이르니 며칠 봄비에 어린보리가 한 뼘이나 자랐다. 야들야들한 보리 빛깔이 참으로 고왔다. 보릿고개가 아직도 가마득한데 나는 철부지 새색시여서 저게 언제 양식이 되나 하는 걱정보다 친정 오라버니가 만들어주던 보리피리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몇몇 아낙들이 도착하고 내 손에도 호미가 거머쥐어졌다. 너는 매는 시늉만 해라. 내가 두 몫을 할 테니. 밥 한 그릇은 실히 먹어야 해산을 하지. 이 집은 일꾼 밥 많이 주는 집이다.
그제야 그 마음 내게로 건너와서 눈앞에 자우룩하게 안개가 끼었다. 어머니는 재바르게 호미질을 시작하였다. 보리포기 사이의 지심을 뽑아주고 흙을 푸슬푸슬하게 일으켜 주어야 하건만 나는 배를 안고 앉기조차 힘들었다.
어찌어찌 한 이랑의 절반쯤까지 뭉그적거리며 갔지만 더는 참을 수 없어서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밭고랑에 털버덕 주저 앉아버렸다.
"옴매요. 옴매요."
누군가 부산하게 고함을 질러 어머니를 불렀다. 저만치 밭끄트머리에서 어머니가 호미를 던지고 달려오셨다. 금방 밥땐데. 어머니의 안타까움 섞인 지청구에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한 마디 대꾸를 하려는데 하늘이 노래지더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가, 정신 차리라!"
뺨을 얻어맞은 느낌에 깨어나니 땀에 젖은 어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멈추었던 진통이 다시 시작된 내 눈에, 천장의 빛바랜 꽃무늬 사이로 군대에 간 신랑의 얼굴이 어른 거렸다.
너를 그렇게 낳았다. 감자와 갱죽만 먹으면서 어디에 감추어 두었던지, 아니면 어떻게 구했던지 할머니는 내게 첫국밥을 끓여주셨다. 추석, 시어머니의 유택에 웃자란 잡풀을 손으로 뜯어내면서 일흔을 바라보는 맏동서가 마흔이 넘은 큰 조카에게 하는 이야기다.
동서에게는 눈물 그렁그렁 맺히는 어제 일이고 조카에게는 듣고 또 들어서 심드렁한 옛날 이야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