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
[스크랩] 법보신문 - 마음챙김 논쟁 <인경스님 vs 김재성 교수> 기사모음
장대명화
2011. 4. 27. 09:08
|
------------------------------------------------------------ 02. “마음챙김은 사띠의 적절한 번역어” |
|
특별기고-서울불교대학원대 김재성 교수
마음챙김에는 초기불교․선 정신 담겨 ‘챙김’은 대상에 대한 접근방식 의미 기사등록일 [2009년 12월 10일 12:08 목요일]
|
|
http://www.beopbo.com/article/view.php?Hid=64248&Hcate1=4&Hcate2=28&Hcmode=view |
|
--------------------------------------------------------------03.
“챙김은 불교 본질 왜곡하는 개념”
특별기고-인경 스님, 김재성 교수에 재반박
마인드풀니스는 사띠 아닌 위빠사나 번역어
챙김은 소유방식 내려놓는 명상수행에 역행
마인드풀니스는 사띠 아닌 위빠사나 번역어
챙김은 소유방식 내려놓는 명상수행에 역행
기사등록일 [2009년 12월 17일 11:49 목요일]
동방대학원대 교수이자 한국명상치료학회장 인경<사진> 스님이 “서구 불교심리치료의 핵심개념인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것은 불교명상과 심리치료의 근본정신에 명백하게 어긋난다”며 “마음챙김은 비불교적인 용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김재성 서울불교대학원대 교수는 “챙김은 대상에 대한 접근방식을 의미한다”며 “마음챙김은 초기불교와 선불교 정신이 담긴 개념으로 사띠의 적절한 번역어”라며 반박했다. 이에 인경 스님이 다시 김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 먼저 김 교수에 의하면 마음챙김이란 번역어의 출발점은 ‘고요한 소리사’를 설립한 활성스님이고, ‘화두챙김’과 마찬가지로 사띠(sati)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자는 제안을 김 교수가 수용함으로써 비롯되었고, 이런 노력이 결과적으로 심리학자인 김정호 교수와 장현갑 교수의 번역어 사용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챙김이란 번역어는 화두챙김에서 비롯된 차용한 용어인 셈이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의 씨앗이 아닌가 한다. 이런 번역어의 선택은 격의(格義)불교적 태도이다. 격의란 다른 문화의 용어를 수용할 때, 기존의 주류문화에서 사용하고 있는 유사한 용어를 채택하여 이해하고 번역하는 것을 말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불교사에서 초창기에 불교의 ‘슌야’(śūnya, 空)를 기존의 노장에서 말하는 무(無)를 차용하여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격의는 문화적인 편견의 일부로서 그 본래적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마음챙김은 김 교수에 의하면 초기불교의 ‘마음’과 간화선에서 화두‘챙김’을 결합한 신조어이다.(유사한 신조어는 마음집중, 마음지킴이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제행무상을 의미하기 때문에 챙겨서 가질 무엇도 없다. 더구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물건처럼 챙김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단지 그것을 알아차리고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반면에 간화선에서 말하는 화두는 자신의 본성에 대한 실존적 의심으로서 구체성과 지속성을 가진 질문(이뭣고)이 존재한 까닭에 적절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챙김이란 표현이 잘못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화두의 본질은 챙김이 아니라 ‘의심’이다. 간화선의 심리학적인 근거는 대승불교의 불성, 견성사상이고, 화두는 이것에 대한 의심을 통해서 자신의 본래적 성품, 불성을 깨달아 체험하는 것이다. 남방수행론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몸과 마음의 대상을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남방의 사띠와 북방의 화두는 근본적으로 그 토대가 다르다. 이런 심리학적 관점과 방법적 차이점을 고려하지 않는 채 오직 ‘챙김’이란 생뚱한 용어로 그 동질성을 꿰어 맞추는 것은 사실 너무나 억지 주장이다. 그래서 격의는 어설픔의 상징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간화선을 왜곡시키고 초기불교 수행의 본질을 손상시킨다. 만약에 사띠를 구태여 번역을 할 것이라면 간화선에서 차용할 것이 아니라 남방수행의 근간을 이루는 초기불교의 관점에 충실한 번역어를 선택했어야 했다. 초기불교에서 가장 강조한 교설 가운데 하나가 애욕으로부터의 ‘멀리 떠남[遠離]’이다. 사띠는 바로 이런 애욕으로부터의 떠남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수행의 방법이다. 애욕으로부터 떠나기 위해서는 먼저 애욕의 폭류에 휩쓸리거나 저항하지 않는 채로 ‘현재의 경험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차림’ 혹은 ‘깨어있음’이라고 하지 ‘마음챙김’이라고 결코 말하지는 않는다. 김 교수는 챙김이라는 말은 대상에 대한 ‘접근방식’을 의미하지 ‘챙겨서 가져지닌다’는 의미를 포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챙김이란 낱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물건’을 가져서 소유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올바른 국어의 사용법이다. 김 교수도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일상에서 좋은 의미로 건강, 재산, 자신감을 챙긴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여기서 챙김이란 의미는 건강 등을 분명하게 ‘챙겨서 갖는다’는 것이지, 그것들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애매한 뜻이 아니다. ‘숙제를 챙겨라’ ‘너의 물건을 잘 챙겨라’ ‘너는 바보처럼 자기 몫을 챙기지 못하니’ 이것들이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자주 들었던 말들이다. ‘챙기면 챙길수록 즐거운 해택이 있는 현금 영수증’이란 광고문구도 있지 않는가? 이 말 속에는 자신[我]과 자신의 소유물[我所]을 잘 관리하고 통제하라는 메시지가 들어있다. 이런 방식들이 자아실현이란 미명아래 이루어진 현대사회에서 성행하고 있는 기업의 운영방식이고 교육과 심리치료의 방식들이다. 이렇게 챙김이란 개념은 상업주의에 철저하게 물들어진 용어이다. 이런 용어로 불교명상을 기술하는 것은 애욕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불교의 무소유 정신을 훼손시킬 위험이 많다. 우리의 문화는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별하고, 나쁜 것은 배척하고 건강과 재산과 같은 좋은 것만을 챙기도록 조장한다. 존 카밧진은 『Full Catastrophe Living』에서 이것을 ‘행위모드(Doing mode)’라고 하고 반면에 명상은 행위 하지 않고 조작하지 않는 ‘존재모드(Being mode)’라고 말한다. 제목에서 Catastrophe는 재앙, 불행, 재난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 조건화된 학습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소유물을 챙긴다. 명상과 심리치료는 이런 소유양식의 자동조종(automatic pilot)을 멈추는 것(non-doing)이고, 재산과 건강의 상실에서 오는 고통을 삶의 일부로서 수용하도록 돕는 존재방식의 수련(practicing being)이다. 그런데 챙기라? 챙김은 명상과 심리치료적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현대 자본 사회의 병리적 현상이 아닌가? 이것은 소유방식을 ‘내려놓는’ 명상수행의 존재모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용어이다. 또한 김 교수는 마음챙김이 번뇌의 마음현상[心所]에 속하지 않다고 말한다. 물론 사띠라는 빠알리어는 탐착과 같은 번뇌에 속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챙김이란 한글의 의미는 변명의 여지가 없이 탐욕을 강화시키고 소유욕을 부추기는 근본 번뇌에 속한다. 일반 대중이 사용하는 챙김이란 용어에는 변하는 마음현상을 알아차리고 그것들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한다는 특별한 의미[別境心所]를 내포하지 않는다. 사띠나 위빠사나와 같은 명상실천을 표현하는 용어는 그 철학과 실천의 기본적인 정신을 반영하여주는 용어를 선택해야 한다. 이번에 내한한 크리스토퍼 K. 거머 교수의 경우처럼 서구의 연구자나 심리치료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란 용어는 사띠가 아닌 위빠사나의 번역어이다. 김 교수를 비롯하여 심리학계의 김정호 교수, 장현갑 교수는 사띠의 번역어뿐만 아니라 통찰수행을 의미하는 위빠사나까지도 동일하게 ‘마음챙김’으로 번역하고 있다. 과연 이것은 솔직한 태도인가 묻고 싶다. 집착된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decentering, 탈중심화] 객관적으로 바라봄[defusion, 탈융합]이라는 위빠사나의 심리치료적 의미를 과연 ‘챙김’이란 술어로 담아낼 수가 있는가? 명상에 기반한 수용전념치료(ACT)에서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가 ‘수용(acceptance)’인데 과연 수용의 의미를 챙김이란 용어로 이해가 가능한가? 분명하게 챙김이란 용어는 심리치료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전혀 타당한 번역어는 아니다. 최근에 불교명상법이 심리치료에 활용되고 대중적인 관심을 받다보니 명상이 급속하게 상품화되고 있고,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많다. 이러한 때에 불교명상의 중요한 개념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다시 요청되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사띠, 사마타(samatha)와 위빠사나의 차이점과 상호관계에 대해서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사띠(念)는 판단 없이 현재의 순간순간에 주시하는 자각이다. 사마타(止)는 특정한 대상에 대한 마음이 머무른 상태로서 집중을 의미하고, 위빠사나(觀)는 대상의 변화를 지켜봄으로써 그 사물을 본질을 통찰하는 수행을 의미한다. 이들의 관계는 사띠에 의해서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개발된다. 그래서 사띠는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기반이면서 이들 양 속성을 모두 가진다. 사띠의 이런 양면적 성격이 사띠의 이해를 어렵게 하고, 혼란스러울 만큼 다양한 번역어를 만들어낸 요소이다. 사띠를 ‘주의’나 ‘머물기’, 혹은 ‘지킴’으로 번역하면 집중이나 삼매에로 나아가는 사마타와 같은 선정계열로 파악한 것이다. 이렇게 번역한 대표적인 인물은 ‘마음집중’으로 번역한 남방불교를 처음에 국내에 소개한 거해스님이다. 김열권과 조준호와 임승택 교수의 경우도 여기에 해당된다. (특히 조준호 교수는 사띠를 ‘수동적 주의집중’으로 번역하면서 제3선정에서 실현된 것으로 본다.) 사실은 이 관점이야말로 가장 오래된 전통적인 관념이다. 반면에 사띠를 ‘알아차림’이나 ‘자각’ ‘깨어있음’으로 번역을 한다면 통찰과 지혜에 이르는 위빠사나의 관점을 중시하는 번역이다. 이것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남방불교에서 새롭게 조명된 부분이다. 이렇게 번역하는 불교학자나 심리학자와 수행 실천하는 이들은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대표적으로 우 실라난다의 『염처경』(보리수선원, 2004)을 국내에 소개한 심준보, 명상을 기반한 도식치료(schema therapy)인 『감정의 연금술emotional alchemy』(생각의 나무, 2005)을 소개한 윤규상과 이동우 교수 경우가 그렇다. 특히 명상을 기반으로 심리치료를 진행하는 서구 명상치료자들의 대다수가 여기에 속한다. 그러면 ‘마음챙김’이란 신조어는 어디에 분류할 것인가? 이것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정체불명의 명상술어이다. 남방의 위빠사나에도 속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북방의 간화선 화두도 아니다. 사마타에 해당하지 않고, 위빠사나의 의미도 아니다. 그렇다면 사띠에 속하는 개념인가? 이것도 제대로 설명하여 주지 못한다. 이것은 잘못된 용어선택, 격의(格義)이다. 1028호 [2009년 12월 17일 11:49] |
--------------------------------
04.
“챙김, 상업주의 용어 단정은 억지”
김재성 교수 인경 스님에 재반론
사띠 의미 다양…‘잊지 않고 지님’ 용례도 많아
‘알아차림’은 사띠 아닌 삼빠잔나 개념에 가까워
사띠 의미 다양…‘잊지 않고 지님’ 용례도 많아
‘알아차림’은 사띠 아닌 삼빠잔나 개념에 가까워
기사등록일 [2009년 12월 24일 13:03 목요일]
동방대학원대 교수이자 한국명상치료학회장 인경 스님이 “서구 불교심리치료의 핵심개념인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것은 불교명상과 심리치료의 근본정신에 명백하게 어긋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마음챙김’을 처음 사용한 김재성<사진> 서울불교대학원대 교수는 “챙김은 대상에 대한 접근방식을 의미한다”며 “마음챙김은 초기불교와 선불교 정신이 담긴 개념으로 사띠의 적절한 번역어”라며 반박했다. 이에 인경 스님이 다시 “불성론에 근거한 간화선의 챙김을 사띠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오류”라며 “마음챙김은 소유방식 내려놓는 명상수행에 역행하는 것으로 불교의 본질을 왜곡하는 개념”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가운데 김재성 교수가 다시 인경 스님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 먼저 ‘사띠’가 초기경전에 사용된 용례와 함께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자. sati라는 용어는 1)사띠, 2)사띠-삼빠잔나, 3)사띠빳타나, 4)까야가따사띠, 5)아나빠나사띠, 6)아누싸띠, 7)빠띠싸띠 등으로 사용된다. 이 가운데 1), 2), 3)과 6)의 용례를 중심으로 그 의미를 살펴본다. 1)사띠(sati)는 ‘기억하다(sarati)’의 명사형이다. 경전에서 ‘마음챙기며(sato)’, ‘항상 마음챙기며(sadā sato)’라는 말로 자주 사용되는 ‘사따(sata)’는 과거분사형이고, ‘사띠를 지닌’이라는 의미이다. ‘사띠만뜨(satimant)’도 같은 의미이다. 사띠가 ‘기억’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대표적인 예는 ‘아난이 사띠를 지닌 자 가운데 으뜸’(AN i, 24; 대림스님 역, 앙굿따라 니까야 1권, 126쪽)이라고 할 때이며,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가장 잘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숫타니파타』의 「자애경」에서 “서있거나 가거나 앉아있거나 누워있거나 깨어있는 한 (자애의) ‘이 사띠’를 굳게 지녀야 한다.(Sn 151게)”고 한다. ‘이(자애의) 마음챙김’은, 자애의 마음을 잊지 않고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항상 모든 존재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놓치고 있지 않고 지닌다는 의미이다. 위의 두 맥락에서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번역하는 것은 어색하며,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사또와 사띠만뜨로 제시된 다른 예에서는 ‘기억을 지닌’이라는 의미보다는, ‘놓치거나 잊지 않은’ ‘챙기고 있는’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항상 사띠를 지니고’라는 의미는 수행자가 자신의 감각기관을 잘 단속하면서 ‘현재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다’, ‘대상을 놓치지 않고 잘 챙기고 있다’는 의미이다. 2)사띠는 ‘사띠-삼빠잔나(sati-sampajañña)’라는 복합어로 자주 사용되며, 정념(正念)-정지(正知)로 번역된다. 이 복합어는 사띠와 삼빠잔나의 상호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사띠는 마음챙김(mindfulness)으로 삼빠잔나는 ‘분명한 앎’(clear comprehension) 또는 ‘완전한 알아차림’(full awareness)으로 번역된다. 엄밀하게 사띠와 삼빠잔나는 다른 용어이다. 이 때 ‘사띠’는 ‘대상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고 있는, 또는 챙기고 있는 마음상태’를, ‘삼빠잔나’는 ‘그 대상을 온전히 알거나,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상태’를 의미한다. 이 복합어에 대한 표현의 하나는 ‘마음챙기는 알아차림(mindful awareness)’이다. 이처럼 사띠 또는 마인드풀니스를 ‘알아차림’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삼빠잔나’의 의미를 포함하여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대상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야 그 대상을 완전하게 알 수 있고, 대상을 완전하게 알아야 그 대상을 놓치지 않고 포착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상보적인 관계이다. 이것이 마음챙김과 (완전한) 알아차림이 함께 설해진 이유이다. 3)사띠빳타나(satipatthāna)는 ‘사띠의 확립’이라는 의미이다. 『대념처경』 등에서 사띠빳타나가 사용되고 있다. 『대념처경』에서 제시된 사띠빳타나의 방법은 아누빠사나(anuppassanā, 隨觀) 즉 ‘반복적인 또는 지속적인 관찰’로 제시된다. 사띠를 확립시키는 방법이 지속적인 관찰이라는 말이다. 『염처경』 서문에서 사념처를 수행하는 방법을 ‘몸에서 몸을 거듭 관찰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지니고(또는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김을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로 제시하고 있다. ‘몸에서 몸을 거듭 관찰한다’는 말은 육체를 거듭 거듭 관찰한다는 말이다. ‘열심히’는 ‘정진하며’라는 말이다. ‘분명한 앎을 지니고’는 ‘관찰 대상에 대한 분명한 앎(알아차림)을 지니고’라는 의미이다. ‘마음챙김을 지니고’는 관찰의 대상을 놓치지 않고 있는 마음상태, 현재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일어나는 그 순간 포착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라는 말은 지금 관찰하고 있는 대상들에 대해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가치판단,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관찰 대상, 마음챙김의 대상에 대한 가치판단이 개입되지 않는 순수한 태도를 말한다. 이 구절은 ‘비판단적인’, ‘수용의 태도’를 의미하는데, 존 카밧진과 심리학자들은 사띠의 한 특징으로 이해하고 있다. 마음챙김(의 확립) 수행, 사띠빳타나 수행은 반복적인 관찰을 통해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라는 위빠사나 지혜를 얻는 수행이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있다. 이처럼 서양에서 마음챙김 명상(mindfulness meditation) 또는 마음챙김 수련(mindfulness practice)을 위빠사나와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통상 위빠사나는 통찰 명상(insight meditation)으로 번역한다. 4)몸에 대한 마음챙김(kāyagatā-sati)과 5)호흡에 대한 마음챙김(ānāpāna-sati)는 사띠빳타나의 일부로도 제시되기도 하고 독립되어 제시되기도 하면서, 4선정과 4념처와 연결되어 있다. 사띠가 선정과 지혜,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공통 기반이 된다는 인경스님의 지적에는 동의한다. 그 뿐 아니라 사띠는 계를 지키는 데에도 필수적이다. 팔정도의 바른 언어(正語), 바른 행위(正業)를 위해서는 바른 이해(正見),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노력(正精進)이 동반되기 때문이다.(냐나틸로카, 『붓다의 말씀』김재성 옮김, 고요한소리, 2008, 120쪽 이하 참조). 6)아누싸띠(anussati)는 수념(隨念)이며, 여기에 사용된 ‘사띠’는 사띠의 원래적인 의미인 기억 또는 상기(想起)를 의미한다. 초기경전에는 불(佛), 법(法), 승(僧), 계(戒), 사(捨), 천(天)에 대한 수념(隨念) 또는 반복적인 상기(想起)가 제시되어 있다. 삼보(三寶), 지계, 보시 또는 욕망을 멀리함(cāga), 천신의 덕을 반복적으로 상기하는 명상이 6수념(六隨念)이다. 이 때 아누싸띠의 사띠는 ‘반복적인 알아차림’이 아니라, ‘반복적인 마음챙김’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불법승 삼보는 ‘알아차림’의 대상이 아니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챙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한 예를 통해서 우리는 사띠라는 용어는 경전에서 기억, 상기(想起), 잊지 않음의 의미와 대상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는 의미의 ‘챙김’의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알아차림’이라는 용어는 주로 ‘삼빠잔나’를 의미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인경스님이 말하는 ‘챙김’이라는 개념이 상업주의의 의미를 담고 있다거나, 현대심리치료에서 말하는 ‘관리하고 통제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거나, ‘화두챙김’에서 빌려왔으니 격의(格義)라서 잘못이라느니 하는 판단에는 ‘챙김’이라는 말이 주는 부정적인 의미를 강조해서 해석하고 있는 것 같다. 국어사전의 의미를 보자. ‘챙기다’는 말은 ‘필요한 물건을 찾아서 갖추어 놓거나 무엇을 빠뜨리지 않았는지 살피다. 거르지 않고 잘 거두다.’라는 의미이다. 용례로, ‘짐을 챙기다/서류를 챙기다/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그는 주위 사람의 생일을 잘 챙긴다.’라고 제시된다. 한편 ‘알아차리다’의 의미는 ‘알고 정신을 차려 깨닫다.’이다. 예로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어머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를 알아차리셨다.’가 제시되었다. (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 http://stdweb2.korean.go.kr) 이처럼 사전적인 의미로 ‘챙기다’는 ‘빠뜨리지 않고 살피고 잘 거두다’는 의미이고, ‘알아차리다’는 ‘알고 정신차려 깨닫다’로 이해한다면, 사띠는 두 가지 단어 중에 ‘챙기다’에 가깝고, 삼빠잔나는 ‘알아차리다’에 가깝다. 실제 수행에서 사용한 예를 보자. 필자는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이해하여 별문제 없이 20년 가까이 위빠사나 수행을 해왔다. 마음을 놓치지 않고 챙기거나, 마음이 대상을 챙기는 행위는 존재양식(being mode) 그 자체이다.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로 사띠를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수행을 한 필자와 그리고 그러한 설명을 듣고 수행을 한 많은 분들은 ‘마음챙김’이라는 신조어를 통해 사띠의 의미를 이해하여 실제 수행에 적용했으며 문제가 없었다. 인경스님 말대로 하면, 필자가 위빠사나 수행을 지도하면서 ‘대상에 마음을 챙기세요’라고 말하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마음을 자신(我)이나 자신의 소유물(我所)로 생각하고 관리하고 통제하세요.’라고 들릴 수 있다는 것인데, 이런 방식으로 ‘마음챙김’을 이해한 사람을 아직까지 만나본 적이 없다. 실제 위빠사나 수행에서 ‘있는 그대로 놓치지 않고 포착함’이라는 의미로 ‘마음챙김’을 이해하며, 마음챙겨서 알아차린 것, 알게 된 것은 정지(正知)로서 ‘알아차림’이라 이해한다. 인경스님이 “챙김이라는 개념은 상업주의에 철저하게 물들어진 용어이다.” 라고 단정 짓는 것은 자의적인 해석의 하나일 뿐이다. 불교는 욕심을 떠나는 가르침이니까 ‘챙기는 것’은 나쁘다고 단정 짓는 것도 억지스럽다. ‘사띠’는 기억과 그대로 현재의 경험을 잊지 않고, 놓치지 않고 있는 마음상태를 의미하며, 따라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는 ‘사띠’,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의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김재성 교수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1029호 [2009년 12월 24일 13:03] |
----------------------------------------
05.
“챙김은 인위적 조작…불교 아니다”
특별기고-인경 스님, 김재성 교수 재반론
삼빠잔나는 알아차림 아닌 ‘분명한 앎’
진리는 챙기는 게 아니라 드러나는 것
삼빠잔나는 알아차림 아닌 ‘분명한 앎’
진리는 챙기는 게 아니라 드러나는 것
기사등록일 [2009년 12월 30일 20:37 수요일]
동방대학원대 교수이자 한국명상치료학회장 인경<사진> 스님이 “서구 불교심리치료의 핵심개념인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것은 불교명상과 심리치료의 근본정신에 명백하게 어긋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마음챙김’을 처음 사용한 김재성 서울불교대학원대 교수는 “챙김은 대상에 대한 접근방식을 의미한다”며 “마음챙김은 초기불교와 선불교 정신이 담긴 개념으로 사띠의 적절한 번역어”라며 반박했다. 이후 인경 스님과 김 교수 간에 논쟁이 오고가는 가운데 이번에는 인경 스님이 다시 김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 먼저 김 교수는 사띠를 ‘대상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마음상태’라고 정의하고, 여기에 합당한 용어는 ‘마음챙김’이라 주장한다. 물론 ‘포착’이란 국어사전적 의미는 대상을 ‘꼭 붙잡음’이란 의미도 있다. 하지만 이것도 순간포착처럼 실제로는 감추어진 사태나 알지 못한 사실을 알게 된다는 ‘알아차림’의 인지적인 의미를 뜻한다. 아무튼 사띠를 꼭 붙잡음이란 의미로서 해석하는 김 교수는 경전적인 전거로 『숫타니파타』의 151게송, ‘(자애의) 이 사띠( ![]() ![]() 하지만 이 문장도 ‘굳게 지녀야 할’ 대상은 자애의 마음임을 말하는 것이지, 사띠란 ‘굳게 지닌다’는 의미임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이 문장을 ‘마음챙김을 굳게 지녀야한다’로 직역하면 챙김과 지님이 중첩돼 모순된다. 이런 경우는 차라리 <자애의 마음을 굳게 지녀야한다>로 의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렇다 하여도 151게송이 사띠와 자애는 동일한 의미임을 제시한다고 추론하는 것은 무리다. 오히려 위의 문장( ![]() 다음은 가장 중요한 사띠(sati, 正念)와 삼빠잔나(sampajañña, 正知)의 관계이다. 이것은 중요한 만큼 많은 분들에 의해서 이미 언급되고 있다. 사띠는 현재의 순간에 대한 개별적 대상, 경험에 대한 판단 없는 자각을 의미한다. 반면에 삼빠잔나(sampajañña)의 경우에 접두어 ‘sam’은 ‘바른’ 혹은 ‘함께’라는 의미이고, ‘pajañña’는 지혜[智]를 의미하는 pañña와 성스런 앎[知]을 뜻하는 ñāna와 동일한 어근을 가진 용어로 ‘이해’, ‘앎’, ‘지혜’ 등으로 번역한다. 곧 삼빠잔나는 무상(無常)과 같은 보편적인 특성을 그 대상으로 한다.(Goenka, 1999; Analāyo, 2003) 사띠와 삼빠잔나는 개별과 보편, 부분과 전체의 관계처럼 인식 대상의 범위가 서로 다르다. 삼빠잔나는 사띠에 의해서 발생되지만, 사띠와는 다르게 삶의 넓은 부분(목적, 적절성 등)에 걸쳐 관여하고(Nyanaponika, 1962), 대상의 전체적인 특성과 변화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U Sīlānanda, 2002) 따라서 삼빠잔나를 ‘알아차림’으로 번역하는 일부 전공자의 이해는 잘못된 번역이다. 알아차림은 개별적 대상에 대한 현재의 자각을 뜻하고, 아직 분명한 앎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기에 사띠의 번역어로 제격이다. 하지만 삼빠잔나를 단순하게 ‘알아차림’으로 번역하는 것은 삼빠잔나가 가지는 대상에 대한 보편적이고 전체적의 인식, 성스런 앎이란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삼빠잔나는 분명한 앎, 바른 이해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더구나 삼빠잔나를 알아차림으로 번역을 하니까,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주장은 궁색하다. 한편 자애의 마음을 ‘굳게 지님’, 물건을 꼭 붙잡은 ‘챙김’과 같은 용어는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행동의 영역에 속한다. 반면에 알아차림은 변화하는 대상의 어떤 순간을 포착하여 안다는 인지적 관점을 가진다. 예컨대 실례를 든 일상에서 ‘서류를 챙긴다’고 할 때, 우리는 대상(서류)가 책상위에 있음을 먼저 알아채고, 그것이 내가 원하는 올바른 서류인지를 분명한 앎으로 확인한 다음에, 그것을 잘 챙겨서 밖으로 나간다. 여기서 알아차림은 대상의 존재에 대한 지각이라면, 챙김은 그 대상을 소유하여 가지는 행위이다. 먼저 알아차림의 인식이 있고, 나중에 챙김의 효과적인 행위가 뒤따른다. 위빠사나 명상의 소의경전인 『염처경』의 사례에서 보면, 대상은 몸, 느낌, 마음, 현상[身受心法]인데, 이들은 물건과 같은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상이다. 이런 대상들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면, 이것을 곧 알아차리는 것 이것이 사띠이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대상의 전체적 속성을 분명한 앎에 의해서 확인하는 것이 삼빠잔나이고, 이들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여, 소유방식을 내려놓는 것이 위빠사나 명상이다. 이런 점들을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표 참조> ![]() 그러면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이해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 우선 대표적인 사례는 ‘그는 마음챙겨(sato)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의 챙김’이 먼저 있고, 그런 다음에 ‘숨을 들이쉰다’는 의미로서, ‘호흡’챙김이 아니라 ‘마음’챙김 하는 내용이다. 명상주제는 몸이지만, 실제로는 마음을 챙기는 것이 된다. 몸과 마음의 범주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점은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이란 주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불쾌하거나 즐거운 느낌 그 자체보다는 느낌에 대한 ‘마음’을 챙긴다는 의미가 되고, ‘마음에 대한 마음챙김’도 탐욕이나 성냄과 같은 마음현상이 아니라, 마음현상에 관한 ‘마음’을 챙긴다는 것으로, ‘법에 대한 마음챙김’도 다섯 가지 장애와 같은 현상보다는 그런 현상에 대한 ‘마음’을 챙긴다는 의미가 된다. 이렇게 마음챙김의 대상은 『염처경』에서 말하는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경험 그 자체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마음챙김은 별도의 다른 마음의 존재를 상정하게 된다. 지금 여기 몸과 마음의 경험에서 떠난 ‘마음’이란 어떤 마음인가? 대승불교의 불성(佛性)에 기초한 간화선에서는 “이것은 몸도 아니요, 느낌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법도 아니다. 이것은 무엇일까?”라고 묻는다. 하지만 이것은 『염처경』에 기반한 간화선의 방식, 화두참구법이 아닌가? 이런 문제는 ‘마음챙김’뿐만 아니라, 사띠를 ‘마음지킴’, ‘마음집중’으로 번역하는 신조어 모두에 해당된다. 챙김, 지킴, 집중은 그 자체로 모두 마음현상인데, 여기에 다시 원문 사띠에 없는 마음(citta)이란 용어를 올려놓는 것은 옥상위의 집처럼 부자연스럽다. 이것은 ‘적절하지 못하다(전재성, 2009)’. 오히려 <호흡(느낌, 마음, 현상)에 대한 알아차림>이나 <그는 숨을 알아차리면서 들이쉬고, 숨을 알아차리면서 내쉰다>(심준보, 2004; 최종남, 2006)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래야 숨이 길면 길다고, 숨이 짧으면 짧다고 하는, 존재하는 그대로의 호흡에 대한 분명한 앎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다음으로 사띠를 챙김으로 번역하면, 결국 “챙기라! 챙기라!”는 말을 자주할 수밖에 없다. 과연 우리는 물건을 챙기듯이 호흡, 느낌, 마음과 현상을 챙길 수가 있는가? 우리는 움직이는 대상을 지키거나, 챙길 수가 없다. 호흡을 챙기면 챙길수록 더욱 숨이 막히고, 마음은 혼란에 빠져버린다. 왜냐하면 호흡을 챙기려는 능동적인 의지가 긴장과 불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마음은 더욱 산란하여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다만 존재하는 그대로 수용하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분명한 앎으로, 그것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는 것이다. 명상은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는 그대로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염처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만 몸이 있다’는 알아차림이 드러난다.”는 후렴구이다. 이 후렴구가 『염처경』과 위빠사나 수행의 심장이다. 이것은 몸, 느낌, 마음, 현상에 대해서 동일하게 적용되어 이 후렴구가 총 13회 반복된다. 여기서 드러남으로 번역한 ‘ ![]() ‘알아차림’은 지금여기에서 몸과 마음의 현상이 그 자체로 의식의 지평위에 스스로 드러남을 의미한다. 이러는 한에서(yāvadeva) 비로소 높은 수준의 지혜와 지속적인 선정에 도달하게 된다. 진리는 내가 챙기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드러난다. 내가 진리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내게로 드러나 현전한다. 이게 존재의 진실이다. 1030호 [2009년 12월 30일 20:37] |
----------------------------------------------------------------------------------------
06.
“마음챙김 부작용 지적은 기우”
|
|
특별기고-김재성 교수, 인경 스님에 재반론
명상,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잘못 사띠에 근거 둔 위빠사나는 인위적 행위 기사등록일 [2010년 01월 08일 11:38 금요일]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