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우수 수필

심천(心泉) ㅡ 정여송

장대명화 2011. 3. 5. 09:03

                                   심천’(心泉)

                                                                                       정여송

 

 봄 가뭄 끝을 보셨나요. 비 내리기 직전이 되면 나무들은 가지 끝에 물방울을 맺는다고 합니다. 비를 마중하는 것이라네요. 미리 젖어 있어야 더 잘 젖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 봅니다.

나도 한때 새로운 생명을 얻고 싶어 봄비를 기다리는 나무가 된 적이 있습니다. 생각에 가난이 들면서 마음이 점점 메말라 가고 있을 때였지요. 싫어지는 것들은 늘어나고, 그런 것들이 마음 안에 채워지면서 잡아줘도 서지 못할 만큼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일어나는 아리한 통증에 시달렸습니다. 겨우내 혼자서 푸르러야 하는 소나무의 외로움을 앓아야 했습니다.

 우연이었겠지요. 아니 필연이었을 겁니다. 비가 내렸습니다. 해갈을 돕는 목비였습니다. 세찬 빗줄기가 호통치면서 나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빗물은 천지사방으로 깔리면서 메말랐던 생각 사이사이에 물꼬를 이어댔습니다. 적심과 씻김을 거듭했습니다. 마치 굿거리 하듯이 말입니다. 나는 곧 생각을 일으켜 세우고 힘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내가 달고 있던 잎새에 윤기가 돌고 제법 모습을 갖추었을 즈음입니다. 낮에는 높고 푸른 하늘을 동경하고, 밤에는 별들의 반짝거림을 부러워하던 일이 불현듯 시들해졌습니다. 그래서 몸 낮춰 땅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정말 잘한 일이었습니다. 내 곁에서 퐁퐁 솟고 있는 심천(心泉)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주변에는 낯모르는 꽃들이 즐비하게 피어 있었습니다. 흰 나팔꽃, 종설란, 상사화, 야생 매화, 백련화 등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이름을 알게 했습니다. 어울려 지내면 더 이상 메마름이 없을 거라고 촉촉하게 일러주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나는 그 샘물에 내 모습을 비춰보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맑은 옹달샘은 온 마음으로 품어 안습니다.

 ‘심천’은 하고 싶지만 하지 않고 숨겨 두었던 말을 꺼내어 시를 짓는 시인입니다. 말[言]허리를 돌리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면서 철철 삭아 내리는 어리굴젓 속 같은 세상을 얘기합니다. 왜 아프게 살아야 하는지 외치고, 왜 완전한 휴식 같은 자유를 누려야 하는지 귀 덧나게 노래 부릅니다. 월드컵 축구처럼 몸살 나는 재미를 던져 줍니다. 실로 일상에 갇힌 삶을 우주와 영원으로 풀어놓습니다.

 ‘심천’의 시구들은 이야기를 구워 입에 친한 맛을 주고 쉽게 정들게 합니다. 값이 비싸 더 먹을 엄두를 내지 못해 먹어도, 먹어도 양이 차지 않는 오묘한 매력을 풍겨냅니다. 먹다만 맛있는 음식처럼 감질난 여운을 감돌게 합니다. 소주잔을 비운 다음 ‘캬-!’ 하는 탁음이 곁들여 있고, 막걸리를 마신 후에 손등으로 입 언저리를 슬쩍 쓰다듬는 멋이 깃들어 있습니다.

 ‘심천’은 내 문학의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마음을 내려놓고 쉽니다. 정이 깔려 있고 짭짤한 말맛이 좋으니까요. 무엇보다도 따뜻하고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기대어 상상력을 키웁니다. 광활하고 방대하니까요. 무엇보다도 새롭고 신기한 물상들이 모여 들끓고 있어서입니다. 그에게서 신천지를 발견합니다. 내가 땀 흘리고 노닐기에 신바람 나니까요. 무엇보다도 위로가 되는 까닭입니다.

 ‘심천’은 그냥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어려움과 아픔을 삭여내고 녹여낸 마음에서 솟아나왔습니다. 더러움과 흉을 참아내고 헹궈낸 정신에서 피어올랐습니다. 머리와 어깨 위에 올려진 부와 영화를 내려놓고 벗어낸 생각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날들을 들려줍니다. 눈물이 납니다. ‘심천’이란 호(號)가 붙은 연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이런 ‘심천’과 어우러질 수 있는 것은 하늘이 이어준 인연입니다. 사주팔자가 그려놓은 행운입니다. 아주 커다란 행복입니다. ‘사람을 마음에 담는 것이 이런 거구나’ 깨닫게 합니다. 가슴이 벅차서 웃음을 짓습니다. 너와 나 가르기보다 두루뭉실이가 됩니다. 수많은 변화 속에서도 불변으로 남아 있을 ‘심천’이니까요.

‘심천’은 ‘성부동남’(姓不同-)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