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별빛 아래 / 김 경
파리의 별빛 아래 / 김 경
난민 영화가 우리 곁에 가까이 와 있다. ‘가버나움’은 내가 본 첫 난민 영화로 꽤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파힘, 스위머스, 사마에게 등 실제 난민들이 겪는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세상의 이목을 끄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억압, 폭력, 가난 등 다양한 부조리의 결과로 수많은 난민이 양산되고 있다. 인류의 오랜 숙제인 불평등의 세계를 고발하고, 인간답게 살 최소한의 권리를 만천하에 알리고자 감독들은 메가폰을 잡는다. 최근에는 ‘파리의 별빛 아래’가 내 마음을 울렸다.
전 세계 여행객들이 가장 사랑하는 도시라는 파리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센강으로 떨어지는 별빛들은 신비의 마법으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불안한 것이 숨어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메시지는 더욱 강렬하다.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주인공들의 감정에 이입된다. 그것도 아주 절실하게.
센강 다리 밑 비밀 장소에서 숨어 지내던 홈리스 여인에게 어느날 혹이 따라붙는다. 엄마를 잃고 헤매던 아프리카 난민 소년이다. 추방하려는 경찰, 도망치는 난민의 대열에서 소년은 엄마의 손을 놓치고 혼자 떠도는 신세다. 여인은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버거운 삶에 모르는 아이까지 품을 여력이 없다. 매정하게 내쫓는 여자, 도망갔다가 다시 찾아와 기웃거리는 소년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 무서운 얼굴로 아무리 으름장을 놓아도 소년은 먼발치서 여인의 눈치만 살필 뿐 떠날 기미가 없다. 결국, 여인은 체념한다. 누더기 이불을 내어주고 얻어온 빵을 나누면서 둘은 조금씩 마음을 연다.
가끔 웃기도 하고, 장난도 치며 하루를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가는 것도 그런대로 괜찮다. 소년이 잠든 밤이면 여인은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경제 과학 잡지를 읽는다. 이불 속 희미한 불빛에 비친 얼굴은 진지한 가운데 생기가 돋아난다. 한때는 엘리트였음을 말해주는, 그녀의 불행한 인생사를 가늠케 하는 복선이다. 그것도 잠시, 어느 날 둘이 함께 지내는 것이 들통나고 만다.
“세상에 버려진 것을 다 구하지 못해요!”
센강 다리를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의 배려로 지친 몸을 누일 수 있었던 창고에서의 호사도 그날도 끝이었다. 자신의 밥줄을 염려한 환경미화원은 두 사람을 윽박지르고는 자물쇠를 채워 버린다. 쫓겨난 이들은 이 거리 저 거리를 헤맨다. 여자는 영어를 모르고 소년은 불어를 모른다. 그저 눈만 쳐다보며 상대의 생각을 읽어내려 애쓴다. 손짓, 발짓으로 어렵사리 소통하는 동안 둘은 서로에게 더 없는 존재가 된다.
별빛 쏟아지는 파리의 아름다운 야경과 대조되는 홈리스의 비참한 일상. 하루를 살고 나면 또 다른 하루가 천근의 무게처럼 찾아온다. 세상이 밝아오는 만큼 어두워지는 삶의 무게를 견디는 여인의 발걸음을 카메라가 힘겹게 따라붙는다. 도시의 구석진 곳을 떠돌다 밤이면 어김없이 숨어들던 비밀 아지트를 그리워하며 소년을 안고 거리에서 밤을 건넌다.
그녀가 가장 평화로워 보일 때는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인 누더기들을 있는 대로 덮어쓰고 곤한 잠에 빠져있을 때다. 보는 이로 하여금 차라리 그대로 영원히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마저 들게 한다. 인간의 구원은 어쩌면 죽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등식을 인정하고 싶어진다.
소년과 점점 밀착되면서 어느덧 그녀에게도 삶의 목표가 생긴다. 노숙자 급식소에서 입에 풀칠하면서 소년에게 엄마를 찾아주기 위한 험난한 여정이 시작된다. 실상 그것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한 방편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는 나중에야 알게 된다.
불안과 초조, 분노로 가득하던 여인의 얼굴이 어느새 바뀌어 있다. 누군가 던져준 한 알의 사탕으로 소년의 마음을 풀어주고, 엄마가 그리워 밤마다 우는 아이에게 자장가를 불러준다. 여인의 얼굴은 더없이 평온하다. 이때 과거 회상 장면이 나오는데 한때 아이들의 엄마였던 젊은 자신이, 잃어버린 가족이 흑백필름처럼 스쳐 지나간다. 관객이 주인공의 과거를 헤아릴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장면이다.
삶에 있어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주어질 때, 개인의 의욕은 몇 배나 된다. 스스로 짊어진 책임은 크나큰 삶의 이유가 되기도 하니까. 타인을 위한 희생이야말로 신이 부여한 가장 위대한 숙명일 지도 모른다. 전에 없던 목적이 생긴 여인의 행보는 폭주 기관차를 닮아간다. 모자를 만나게 하려 자신이 아는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하지만 번번이 실망이 돌아올 뿐이다.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흥분으로 들끓는다. 어찌어찌 찾아간 행정구치소에서 타박만 받고 돌아오다가 우연히 경찰차에 압송돼 가는 레게머리 흑인 여자를 발견한 것이다. 소년이 신줏단지처럼 품고 있던 추방명령서에 나란히 찍힌 모자의 사진에서 본 얼굴이 분명하다. 아이의 엄마일 거라는 확신에 사력을 다해 뛰지만, 뚱뚱한 몸집과 절룩거리는 다리로는 역부족이다. 차는 먼지만 남기고 점점 멀어져간다.
조용한 가운데 깊은 울림으로 내내 끌고 가는 영화. 서로 반대되는 것끼리의 조합은 각자의 값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영화는 수시로 파리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면 가득 채우는데 그럴수록 더 아파지는 감정은 불가항력이다. 인간이 불행할수록 풍경은 돋보이고, 거리가 빛날수록 버려진 자들은 처절하다.
의인은 있는 법. 불쑥 등장하는 협업꾼은 관객을 희망의 세상으로 안내하는 인도자다. 공항에서 근무하며, 남몰래 노숙인들을 돕는 노동자를 만난 것은 행운 중의 행운이다. 처음엔 경계 태세로 일관하던 그가 추방자들을 비행기에 태우기 위해 만들어놓은 비밀 게이트를 가련한 영혼들에게 알려준다. 마지막 기회임을 직감한 여인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읊조린다. “엄마를 찾는단다. 엄마를 찾는단다.”
그녀는 공항 관계자가 관광객의 물건들을 조사하는 틈에 에펠탑이 그려진 티셔츠를 슬쩍해 아이에게 입힌다. 거룩한 사명이 이제 곧 현실로 나타날 조짐이다. 관객의 심장을 훔치면서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한 인간의 원초적 휴머니즘과 모정이 집약된 장면에서 알지 못할 전율에 휩싸이는 순간이다.
“메르시.”
아이는 눈동냥으로 익힌 단 하나의 불어를 수줍게 뱉어낸다. 가슴이 뭉클해진 여인이 그윽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본다. 이런, 낭패다. 오매불망 마지막 추방자 무리에도 소년의 엄마는 없다. 숨어서 지켜보던 둘은 낙담한다. 서로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경지가 된 지 오래, 아이는 새까만 눈동자로 ‘괜찮다’ 말하고 여자는 ‘미안하다’며 위로한다.
그때, 소년의 엄마가 공항 경찰들에 에워싸인 채 비밀 게이트를 빠져나가는 모습이 포착된다. 아들을 찾기 위해 마지막까지 몸부림 치다가 기어이 붙들린 신세다. 여인이 절규하듯 소리친다. 하지만 그것이 두꺼운 유리벽을 뚫지는 못한다. 다급해진 그녀가 이마로 유리창을 들이받는다. 그 충격에 유리문이 스르르 열리고 여인의 이마에선 한줄기 피가 흘러내린다. 어수선한 소란에 뒤돌아본 소년의 엄마가 아들을 발견하고는 달려와 부둥켜안는다. 눈물범벅이 된 엄마 품에서 소년은 손을 내밀어 여인에게 흔들어 준다. 작고 새까만 손이 둘의 관계를 압축하는 절정의 미로 작용하기에 충분하다.
장면의 느린 전환. 어느 건물 옥상에 주인공 여인이 서 있다. 마침내 생에 주어진 마지막 일을 끝낸 듯, 무거운 누더기를 하나씩 벗어던지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슬로우모션으로 연출한 화면이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명장면이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관객이 읽어내야 할 숙제다.
화면으로 보이는 것이 하나나 둘이라면 우리가 헤아려야 하는 것은 일곱이나 여덟 혹은 열이 아닐까. 21세기에도 여전히 전쟁이 일어나고, 기아에 허덕이고, 파멸이 존재한다. 나라를 버리고 바다를 건너는 난민들이 속출한다. 각 나라의 난민 정책은 아무리 머리를 써도 그들을 구제하기는 역부족이고 그 와중에 희생자가 부지기수로 늘어나는 것이 현실이다. 영화의 역할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있다. 움직인 마음이 행동을 부를 때 우리 사는 세상은 조금이나마 따뜻해질 것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밤하늘을 수놓는 별빛만큼 수많은 이들이 홀로 아픔을 견디고 있단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대사가 엔딩 크레딧을 따라 메아리처럼 윙윙거린다.
김 경 /《대구문학》 신인상 등단, 대구일보 전국수필대전 은상, 동서문학상 수필 부문, 시부문 입상, 대구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수필집 『매혹』 (2019)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