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 난 자 수필
화두 / 맹 난 자
경봉선사께 받은 화두話頭는 '시삼사是甚麼'였다.
50년 전, 통도사 극락암에서 "예까지 몸뚱이를 끌고 온 이 마음은 무엇인고?"를 물으시며 "이 무엇고?"의 화두를 내려주셨다.
근본 취지도 모르면서 어느 날 애꿎게 1700개 공안公案중에서 화두 하나를 골라 들었다. 『벽암록』 제45칙의 '만법귀일'의 공안이다.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물었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간다 하는데 그 하나로 어디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나는 청주에 있을 때, 한 벌의 베옷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더라." 조주 스님과의 문답에서 나는 세 가지가 궁금했다.
첫째, 만법은 왜 하나로 돌아가는가?
둘째, 돌아가는 그 하나는 어느 곳으로 가는가?
셋째, 조주는 왜 뚱딴지같이 베옷 한 벌의 무게가 일곱 근이라고 했을까?
머리를 굴려 답을 찾지 말고 온몸이 의단疑團과 한 덩어리가 되어 천지 허공이 갈라지는 경계를 몸으로 체득해야 비로소 안목이 열린다고 충고한 선지식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자리에 앉곤 했다.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만공선사도 이 화두로 깨쳤다.
어느 날, 벽에 기대어 서쪽 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空이 없어지고 눈앞에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났다.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법계를 관찰할진대 모두가 마음의 지음이라)'를 외우던 중이었다. 그때 두우둥 둥 새벽종 소리가 울려왔다. 한순간에 미망의 경계가 벗겨지고 어두웠던 눈앞이 환하게 열리더라고 했다.
만법萬法이 만 가지로 벌어짐은 온갖 존재의 차별을 뜻한다. '하나'로 돌아간 '귀일歸一'의 자리는 자취를 감춘 평등의 세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닐는지, 모든 것은 연기緣起에 의해서 차별적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만법귀일'의 萬과 일一,' 베옷 한 벌과 일곱 근'의 7과 1은 각기 평등과 차별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모든 차별이 실체實體없는 공성空性임을 안다면 일체의 차별이 근원적인 한 가지 이치로 화통된다는 의취로 풀이해 본다. 이 공안에 송고訟古를 붙인 선두 스님은 "일곱 근 장삼 무게를 몇이나 알까? 이제 서쪽 호수에 던져 버렸으니 산승은 장삼이 필요치 않다"고 시치미를 떼었다. 다시 말해도 '서 푼어치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조주)의 계책에 걸려들었다'고 한 것은 분별에 속지 말라는 뜻이리라.
어영부영 칠십 줄에 들어서니 '일귀하처'의 화두가 더욱 절실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우주의 기원과 인간의 사후死後가 궁금했다. 1871년 영국의 캘빈 경은 "어쩌면 생명의 씨앗이 운석으로부터 지구에 떨어졌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로부터 100년 뒤 멜버른 북쪽 머치슨이라는 마을에 운석이 폭발해서 작은 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이 운석은 43억 년이나 되었고, 거기에 74종의 아미노산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세계적인 고생물학자인 닐 슈빈은 우리 존재의 시원을 137억 년 전, 빅뱅에까지 소급해 올라간다.
'우주의 모든 은하들, 지구의 모든 생명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원자와 몸은 깊은 차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연결은 137억 년 전, 특이한 한 점點에서 시작된다'고 언급한다. 우리 몸은 물질로만 본다면 원소들을 골라 뒤섞은 혼합물이다. 주로 가벼운 수소로 구성되어 있지만 마그네슘, 철, 코발트 같은 무거운 원소도 적지 않다. 하지만 우주를 탄생시킨 빅뱅은 수소, 헬륨, 리튬의 원소밖에 만들어 내지 못했다. 나머지 원소들은 빅뱅 이후 만들어진 별이 최후를 맞는 초신성 폭발 과정에서 생성됐다. 그러니까 우리는 별이 내려준 원소를 먹고 존재하는 것이다. 초신성이 폭발하면 그때 발생한 충격파가 주위에 있던 성긴 물질에 전해진다. 그러면 성간운星間雲의 밀도가 증가한다. 그 결과 새로운 별의 탄생으로 이어질 중력 수축이 성간운에 유발된다. 성간운에 들어 있던 수소와 헬륨이 뭉쳐서 별이 만들어진다. 거의 모든 별의 내부에서는 수소에서 헬륨이 헬륨에서 탄소와 산소가 만들어진다. 네온, 마그네슘, 규소, 황 등의 순서로 무거운 원소들이 합성되고 핵융합 반응의 최종 단계에서 드디어 철이 합성된다. 우리의 DNA를 이루는 질소, 치아를 구성하는 칼슘, 혈액의 주요 성분인 철 등의 원자 알갤이 하나하나가 모조리 별의 내부에서 합성됐다는 것이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우리들은 별의 자녀'라며 '별들의 기원과 진화와 그 뿌리에서부터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고 쓰고 있다. 아무튼 우리의 몸속에 있는 원자들은 모두 몸속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개의 별을 거쳐서 왔을 것이고, 수백만에 이르는 생물들의 일부였을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주의 먼지로부터 왔다"는 어디선가 읽었던 글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먼지에는 수소, 탄소, 산소, 철도 들어 있다니. 오래전에 죽은 별들이 우주 먼지를 제공해 주어 우리는 거기에서 왔으므로 인류는 빅뱅의 아득히 먼 후손이라는 것이다.
빅뱅 전의 상황을 물리학에서는 '진공'이라고 한다. 대폭발이 '가짜진공''스칼라 장' 또는 '진공 에너지'라고 부르는 어떤 것 때문에 일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모두가 아무것도 없는 무의 세계에서 불안정성이 나타나도록 해 주는 무엇을 뜻하는 말들이다. 없음에서 있음이 생겨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때는 없음의 세계였던 곳에서 오늘날 우주가 생겨나는 것은 그런 일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무의 불확실성 때문에 흔들려서 운동이 일어났고, 여기에서 유가 나왔다는 것이다.
"없음은 천지의 처음을 일컫고, 있음은 만물의 어머니를 일컫는다." (도덕경 제1장)는 노자의 일구가 우리를 일깨운다. 세상의 물건은 만물의 어머니인 유에서 나왔으며, 이유는 천지의 바롯함인 무에서 나왔으므로 결국 도의 근원인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생명이 본래 시작된 곳, 우주의 별로 돌아가는 것이니 역시 '순환'이다. 개체의 입장에서는 생사이지만 전체의 입장에서는 순환일 따름이다. 온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원시반종, '주역'의 말씀이 떠올랐다.
마당에 나와 찬란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은하수로 춤추러 간다'며 쾌활하게 떠난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할머니도 거기에 계실까. 쇼펜하우어의 음성도 들린다.
"인간의 죽음은 대자연의 사이클일 뿐이다."
봉선화 / 맹 난 자
초가을 산정에 한 남자가 앉아 있다.그는 별밤에 이 노래 저 노래 부르다가 밤이 깊도록 ‘봉선화’만을 되풀이 해 불렀는데, 배가 고파서 더 부를 수 없을 때까지 부르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는 것이다.
법정 스님의 수필 ‘초가을 산정에서’를 읽다가 나는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이 칼칼한 비구스님의 나직한 오열은 무엇이란 말인가?
스님은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내 모양이 처량하다.---’여기까지 부르면 내 마음엔 까닭 없는 슬픔이 벤다고 적고 있다. 아주 오래 전에 비오는 날이면 모종 삽을 들고 화단을 가꾸던 아버지도 이 노래를 자주 흥얼거리시곤 했다.
‘어언간에 여름 가고 ---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인생 중도의 좌절로 말년이 고적했던 아버지도 법정 스님도 모두 고인이 되었다. 그런데 요즘 이 노래가 이상하게도 내 가슴 속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다.
2010년 3월 12일
법정 스님은 입던 옷 그대로, 관도 없이 대나무 평상에 실려 가ᄉᆞᆫ 덮은 채 쌓아놓은 장작더미 사이로 운구되었다. 점화가 시작되자 스님은 불꽃에 휩싸였다. 스님을 처음 뵙던 때가 떠올랐다. 1969년 봄, 세 사람이 마주 앉았다. 홍정식 선생이 스님께 내 취직을 부탁하려던 자리였다. 명동 입구로 옮긴 사무실(대한불교)에는 한상범 선생의 모습이 가끔 보일 뿐, 신문사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 후 청탁한 ‘신행 불교’으 원고를 받으러 다래헌으로 찾아가면 원고는 주시지 않고 스님은 이 방에서 갖고 싶은 것을 말하라고 했다. 마침 레코드판 위에서 ‘어린 왕자’의 불어 낭송이 이어졌다. 그러나 말씀드리지 못했다. 양손에 책만 가득 얻어 갖고 봉은사 나루터에서 배를 탔다.
그 후 30여 년이 더 흘러 보내드린 첫 수필집에 답신으로 온 엽서
‘가난이 우리를 이만큼 키웠습니다.’
이 한 마디에 힘겹던 나의 반평생이 실려 지나가듯 했다. 알 수 없는 드거운 것이 안에서 솟구쳐 올랐다.
점점 불꽃의 기세는 더해갔다. 스님은 저 뜨거운 불꽃 속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계실까? 그때 누군가가 화중연생(火中生蓮) 하고 크게 외쳤다. 거푸 세 번을 되풀이 했다. 불속에서 연꽃으로 피어나라는, 죽되 죽지 않는 법심(法身-진리의 몸)으로 피어나라는 말씀인 것 같다.
나는 다비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지켜 보면서 무언의 작별을 고했다. 세월 만큼 만감이 지나갔다.
산다는 것은 / 맹 난 자
지축이 흔들린다. 서둘러 개표를 하고 지하철 계단으로 내려갔다. 전동차 앞에 초등학생들이 무리 지어 있다. 붉은 악마의 티셔츠를 입은 아이들, 하늘색과 노란색의 티셔츠를 입은 세 그룹이었다.
재잘거리는 소음 때문에 다음 차를 탈까 하다가 그냥 올랐다. 책을 보기는 틀렸다 싶어 경로석에 기대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와글'대는 소리가 여름밤의 무논 같다. 별안간 고함치는 아이들의 함성에 놀라 눈을 떴다. 왈칵하고 전동차가 급정거를 하며 심하게 흔들렸다. 바람에 누운 풀잎처럼 작은 몸들이 앞뒤로 쏠린다. 낄낄대면서 아이들은 재미있는 놀이처럼 즐거워한다. 그러면서 금세 중심을 잡아간다.
서른이 채 안 돼 보이는 여교사들은 능숙하게 아이들을 지휘한다. 청바지 차림의 한 여교사가 검지를 입에 갖다 대자 차내는 금세 조용해졌다. 그 애들이 병아리처럼 귀여웁기만 하다. 내 앞에 서 있는 여자아이에게 몇 살인가를 물었더니 새침데기처럼 손가락만 여덟 개를 펼쳐 보인다. 또다시 재잘대며 장난치는 아이들, 잠시도 가만있질 못한다.
이번에는 어느 짓궂은 녀석이 여자애의 머리를 잡아당겼는지 선생이 갑자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사과하라고 채근한다. 별안간 오른편에 서 있는 남자아이의 얼굴이 버얼개진다. 선생의 독촉은 계속되었고 아이는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나는 가슴이 조마조마 해져서 그 아이에게서 차마 눈길을 뗄 수 없었다.
"미안해." 잦아드는 목소리. 그 아이의 앞에 갈래머리를 땋은 여자애가 있었다. "어이구, 잘했어"를 연발하며 선생은 얼굴 벌게진 녀석의 등을 계속 두드려 준다. 괜히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눈앞의 광경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는데 서운하게도 그 애들은 모두 올림픽공원역에서 내렸다.
갑자기 전동차 안은 텅 빈 해안가처럼 적막해졌다. 대신 마주 앉은 노인들의 모습이 정면으로 들어왔다. 한 편의 정물화를 보는 느낌이다. 어깨는 많이 굽었지만 깨끗하게 차려입은 노신사, 샌들에 양말을 신고 도수 높은 안경을 쓴 노인. 그러고 보니 세 분은 모두 안경을 쓰고 있다. 안경 밑으로 눈가에 경련이 이는 할아버지에게 눈이 더 머문다. 볼수록 불편한 떨림, 자신의 의지로도 제어할 수 없는 경련,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여간 쓸쓸한 일이 아니다. 이제야말로 안경이나 지팡이, 의치義齒같은 보조 수단에 기대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의지대로 몸일 따라 주질 않는다.
땅거미질 무렵 혼자서 길을 가다가 만나게 되는 고즈넉하면서도 왠지 낯설지 않은 우수의 엷은 그림자 같은 것들, 어쩔 수 없이 이제 그런 것들을 수용해야 하는 때인가 보다.
요즘은 혼자가 훨씬 편하게 느껴진다. 남편도 진작부터 그런 눈치였다.
대체 인간의 몸이란 몇 살까지 이성을 용납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든 것은 오십 고개를 슬쩍 넘어서면서부터였다. 가임可姙기간이 끝난 여성들에게는 일본의 해군 대장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출생은 신화 같은 얘기이기도 했다. 여자 나이 56세에 출산을 하다니?
하지만 남자들의 욕구란 여자와는 다른 것 같다.
괴테가 19세의 처녀 올리케를 만나 청혼한 것도 그의 나이 75세 때라고 한다. 여자들을 사랑하고 헤어질 때마다 그는 수많은 시를 남겼다. 이웃 나라, 노벨상 수상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자살을 했을 때도 이렇다 할 단서나 뚜렷한 유서가 없었으므로 억측만이 무성했는데 그는 꽃 가게의 소녀를 데려와 많은 월급을 주면서도 아무 일도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꽃을 감상하듯 매일 소녀를 바라보며 잠시도 눈길을 떼지 않았다는 것이다. 몸에 와닿는 눈길을 견디지 못한 그 소녀가 집을 나가 버리자 이를 바관한 가와바타가 자살을 했다는 후문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가차없이 변태 성욕자쯤으로 치부했었다.
그런데 왜 그때는 몰랐던 것일까?
헤밍웨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여행 도중에 만난 소녀 아드리아나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이탈리아 귀족 집안의 막내딸인 이 18세 소녀를 자신의 큐바 집으로 초대하고 아내를 쫓아내려고까지 마음먹었다니. 그러나 제 또래의 청년과 눈이 맞은 소녀가 그곳을 떠나게 되었을 때, 헤밍웨이는 제 몸의 한 부분이 절단 당하는 아픔을 느꼈노라고 술회했다. 어린애처럼 주저앉아서 엉엉 울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오래전 비행기 사고로 성 불구자였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 중에 '젊음'만한 것이 다시 있을까? 괴테의 육성이 다시 들려오는 듯했다.
사람에게 생기를 주는 것이 사랑이라면
나야말로 멋진 증거가 아니겠는가
더는 사랑하지도 방황하지도 않는 자라면
차라리 죽어 매장되는 것만 못하리.
그렇다. 생기生氣였다.
요즘 들어 아이스 댄싱이나 살사춤 같은 TV 장면에 채널을 고정시키고 아예 넋을 놓고 빠져들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가족들의 눈길에도 불구하고 나는 누군가와 같은 심정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분명 춤부터 배웠으리."
눈부신 젊음과 아름다운 율동, 시원한 속도감과 게다가 격렬한 열정까지. 거기서부터 나는 이미 멀어져 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일정한 계단을 오르다가 중도에서 멈춰 서야 하는 퇴행성관절염보다도 더 쓸쓸한 일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 편 돌이켜 생각하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지금 괴테와 가와바타에게 속으로 사죄하고 있듯, 이렇게 몰랐던 부분을 다시 이해하게 되고 치기 어린 내 속단과 편견들을 시정할 수 있는 기회가 허락되기 때문이다.
내친김에 한 가지만 더 털어놓자면 한때 나는 다섯 자녀를 고아원에 내다 버린 루소를 몹시 미워한 적이 있었다. 그의 뜨거운 참회의 눈물을 알기 이전까지는.
그 후 산다는 것은 내게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왜 그때는 알지 못했던 것일까?
이렇게 흔들리는 전동차 안에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인화지에 피어나듯 떠오르는 지난 일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반성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아버지의 식탁에서 나날이 늘어나던 그 많던 약봉지를 좀 더 따뜻한 눈으로 이해해 드리지 못한 것도 못내 뉘우쳐진다.
차에서 내려야 하는데 어떤 날은 코끝이 매워 와 눈을 뜰 수 없는 때도 있었다. 씻겨 내리는 눈물, 가슴속에 화해해야 할 것이 남아 있는 동안은 우리에게 살아야 할 의무가 주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피어오르는 상념을 따라 머흘한 구름 속인 듯 나는 전동차에 멍하니 앉아 있기를 자주 한다.
백의종군이랄까. 변방인의 심정으로 지내고 있는 요즈음, 나 자신이 남루해진 옷만큼이나 편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떤 날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기도 한다.
다시 돌아올 출발점을 왜 애써 너는 왕복하고 있는가?
오늘도 이렇게 흔들리며 가노니 언젠가는 멈추게 될 시간의 파도 위를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별안간 몸이 수평선 너머로 파도쳐 내리듯 앞으로 쏟아지고 만다.
재잘대던 아이들처럼 몸이 출렁인다. 언젠가 이른 아침 몬트레이에서 시숙을 따라 부둣가에 나갔을 때였다. 통에 쏟아붓는 정어리와 눈이 마주쳤을 때 확 끼쳐 오던 그 뭉클함, 그리고 허공에서 활처럼 팽팽하게 휘어지던 그 은빛 활어活魚의 곡선. 그렇다. 바로 그런 생기였다. 산다는 것은 생기에 대한 열망, 그 향일向日에 바쳐지는 노정路程에 다름 아닌 것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한 뼘 남짓한 볕바라기. 살아 있음의 이 절실함. 나도 모르게 주먹 쥔 손에 힘이 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