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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몸과 해금 / 김 훈

장대명화 2025. 5. 17. 23:38

                                        글과 몸과 해금 / 김 훈

 

글을 쓸 때 내 마음속에는 국악의 장단이 일어선다. 일어선 장단이 흘러가면서 나는 한 글자씩 원고지 칸을 메울 수 있다. 이 리듬감이 없이는 나는 글을 쓸 신명이 나지 않는다. 내 몸속에서 리듬이 솟아나기를 기다리는 날들은 기약 없다. 그런 날 나는 때때로 술을 마시거나, 자전거를 타고 강가로 나간다.

 

휘모리장단으로 글을 쓸 때, 내 사유는 급박하게 솟구치는 언어 위에 서려서, 연결되거나 또는 부러진다. 사유가 부러지고 다시 이어지는 대목마다 문장이 하나씩 들어선다. 이런 문장들은 대체로 짧고 다급하다. 문장은 조바심치면서, 앞선 문장을 들이박고 뒤따르는 문장을 끌어당긴다. 휘몰이로 몰고 나가는 문장은 거칠다. 나는 이런 문장을 한없이 쓰지는 못한다. 힘이 빠지면 내 문장은 중모리장단쯤으로 내려앉는다. 중모리 문장은 편안하다. ​사유는 문장 속에 편안하게 실린다. 휘몰이 문장을 쓸 때는 사유가 문장을 몰고 가지만, 중모리 문장을 쓸 때면 문장이 사유를 이끌고 나가는 것 같다. 그래서 중모리 문장을 쓸 때 내 몸은 아늑하다. 그 아늑함이 한가하고도 부질없이 느껴질 때 나는 다시 휘몰이 쪽을 넘보는데 휘몰이 문장을 불러오려면 사유의 질감을 바꿔야 한다. 이 전환은 쉽지 않다.

 

한 개의 문장을 하나의 우주로 만들어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릴 때, 나는 진양조로 나아간다. 24박자로 끝없이 늘어지고 퍼지면서 먼 것들을 불러들이고 가까운 것들을 쓰다듬어 가면서 하나의 거대한 산맥과 강물을 문장 속에 끌어들여 출렁거리게 하려면 진양조 리듬 위에 올라타야 한다. 올라타서 천천히 몸으로 바닥을 밀면서 나아가야 한다.​

 

진양조 문장을 서너 개 쓰고 나면 몸은 기진맥진해져 나자빠지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미진한 것들이 남아 있어 다시 솟아오르는 진양조 리듬에 올라타야 한다. 휘몰이는 날뛰고, 걷어차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진양조는 뱀처럼 땅을 밀면서 나아간다. 나는 글을 몸으로 쓴다.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없으면 단 한 줄도 쓰지 못한다. 연필을 쥔 손아귀와 손목과 어깨에 사유의 힘이 작동되어야 글을 쓸 수 있다. 그리고 몸과 사유를 연결시켜서 글로 옮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리듬이다. 나는 이 리듬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 리듬은 살아있는 생명 속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이 리듬은 비논리적인 것이고 오직 시간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글을 쓸 때 나는 작곡을 생각한다. 글은 몸속의 리듬을 언어로 표현해 내는 악보이다.

 

해금은 놀라운 악기다. 해금의 음색은 그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의 몸의 질감을 느끼게 해준다. 모든 국악기는 양악기에 비해 훨씬 더 진하게 연주자의 몸을 느끼게 하지만, 그중에서도 해금이 풍기는 육체의 질감은 가장 깊고 진하다. 해금의 음색이 매우 비논리적으로 들리는 까닭은 이 육체의 질감 때문일 것이다.

 

몇 년 전, 진도에 놀러 갔다가 진도 단골들의 시나위를 구경한 적이 있었다. 사실, 해금의 생김새는 볼품없다. 네 가닥 줄에 대나무 통이 전부다. 그러나 그 음역과 표현력은 놀랍다. 거칠게 꺾이고 휘면서 섬세한 것들을 아우른다. 진도에서 본 시나위 악사는 왼손으로 해금의 네 줄을 싸감아 쥐고 떡 주무르듯이 소리를 주물렀다. 소리를 손으로 주무르는 것이다. 그래서 해금의 소리는 주무르는 인간의 몸의 소리처럼 들린다. 몸이 겪어내는 온갖​ 시간 감관 몸속에서 솟고 또 잦는 리듬이 그의 손바닥으로 퍼지고 그 손바닥이 소리를 주물러서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소리를 주무를 떄, 그의 손바닥에 와닿는 떨림은 다시 그의 생명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해금을 켜는 시나위 악사를 바라보면서, 나는 나의 글이 해금의 소리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 소리를 주무를 수 있는 자들은 얼마나 복된가. 나는 해금 악사가 소리를 손바닥으로 반죽해 내듯이 내 문장을 주물러 낼 수가 없다. 그래서 그 힘이 모두 빠진 날 나는 해금 연주를 듣는다. 작년에 해금 음반이 많이 나왔는데, 꼭 나를 위해서 만들어 준 음반 같다.

 

                               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 /김 훈

 

사쿠라꽃 피면 여자 생각난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사쿠라꽃 피면 여자 생각에 쩔쩔맨다.어느 해 4월 벚꽃 핀 전군가도全群街道(전주-군산 도로)를 자전거로 달리다가, 꽃잎 쏟아져 내리는 벚나무 둥치 밑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나는 내 열려지는 관능에 진저리를 치면서 길가 나무둥치에 기대앉아 있었다. 나는 내 몸을 아주 작게 옹크리고 쩔쩔매었다. 온 천지에 꽃잎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나무둥치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바라보면, 만경 평야의 넓은 들판과 집들과 인간의 수고로운 노동이 쏟아져 내리는 꽃잎 사이로 점점이 흩어져 아득히 소멸되어 가고, 삶과 세계의 윤곽은 흔들리면서 풀어지면서, 박모의 산등성이처럼 지워져 가는 것이었는데, 세상의 흔적들이 지워져 버린 새로운 들판의 지평선 너머에는 짐승들의 어두운 마음의 심연 속에서 희미하게 가물거리고 있을 호롱불 같은 관능 한 점이, 그러나 명료하게도 깜박거리고 있었다. 그 관능의 불빛 한 점은 쏟아져 내리는 꽃잎 사이를 꺼질 듯 꺼질 듯 헤치면서 지평선 저쪽으로부터 인간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면서 점점 크고 밝고 뚜렷하게 자리 잡아, 이윽고 태양처럼 온 누리를 드러냈다. 숨을 곳이라고는 아무 곳도 없었다. 그 관능의 등불이 자전하고 공전함에 따라 이 세계 위에는 새로운 낮과 밤과 계절이 드러나는 듯했다. 꽃잎들은 속수무책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들의 삶은 시간에 의하여 구획되지 않았다. 그것들의 시간 속에서는 태어남과 절정과 죽음과 죽어서 떨어져 내리는 시간이 혼재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태어나자마자 절정을 이루고, 절정에서 죽고, 절정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이어서 그것들의 시간은 삶이나 혹은 죽음 또는 추락 따위의 진부한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어떤 새로운, 절대의 시간이었다. 꽃잎 쏟아져 내리는 벚나무 아래서 문명사는 엄숙할 리 없었다. 문명사는 개똥이었으며, 한바탕의 지루하고 시시껍적한 농담이었으며, 하찮은 실수였다. 잘못 쓰인 연필 글자 한 자를 지우개로 뭉개듯, 저 지루한 농담의 기록 전체를 한 번에, 힘 안 들이고 쓱 지워버리고 싶은 내 갈급한 욕망을, 천지간에 멸렬하는 꽃잎들이 대신 이행해 주고 있었다. 흩어져 멸렬하는 꽃잎과 더불어 문명이 농담처럼 지워버린 새 황무지 위에 관능은 불멸의 추억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육신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었으며 여자에 대한 그리움도 아니었으나, 그 그리움의 대상이 인간의 여자였다 하더라도 무방했으며, 들개나 염소의 암컷이라 해도 역시 무방했다. 무방하였다. 그것은 말하자면 종種과 속屬으로 구획되기 이전의 만유萬有의 ‘♀’에 대한 그리움이었으며, 내가 그 그리움을 감당해 내기 위해서라면 굳이 인간의 ‘♂’이 아니라도 또 한 번 무방하였다. 내 벗은 몸을 내던져 이 난해한 세계와의 합일에 도달할 수 있다면 나는 수캐라도 좋았고 염소라도, 수탉이라도 좋았다. 만유의 혼음으로 세계와 들러붙으려는 욕망이, 어떻게 인간이라는 종과 속 안으로 수렴되어 마침내 보편적인 여자, 그리고 더욱 마침내, 살아 있는 한 구체적인 여자에 대한 그리움으로 정리되어 오는 것인지에 관하여 나는 아직도 잘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그 만유혼음의 그리움이 인간의 종과 속을 거쳐서 한 여자에게로 와 닿는 여정旅程은 인간이라는 종족의 계통 발생의 여정만큼이나 장구하고도 외로운 것이리라. 그리고 또 말하건대, 인간의 여자에게로 향하는 그 여정에서 짐승의 호롱불 같은 만유관능을 떨쳐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모두 챙겨서 거느리고 우리는 가는 것이리라.꽃잎 쏟아져 내리는 벚나무 둥치 밑에서 나는 내 모세혈관 속을 흐르는 저 짐승의 피의 수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그 후 또 다른 어느 해 4월에, 나는 남태평양의 한 절해고도에서, 바닷가의 저편에서 이편을 향해 걸어오는 한 토인 여자를 보았다. 나는 그 토인 여자에 의하여 내 헤매려는 만유관능의 충동을 인간의 종과 속 안으로 확실하게 편입시킬 수 있었다.하루의 답사 일과를 마친 저녁이었다. 나는 바닷가 호텔 방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저무는 바다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흐린 날의 그 큰 바다는 한마디로 불가해했다. 그 너머의 대안對岸에 또 다른 인간의 흔적이 있으리라는 추측이 남태평양의 흐린 바다 앞에서는 불가능했다. 물과 하늘과 수평선과 그 너머의 아득한 공간까지도 거대한 어두움 속으로 빨려 드는 것이어서, 바다는 무한대로 뻥 뚫려진 허당일 뿐이었고, 몇 개의 가물거리는 등불로 버티어 있는 섬과 문명은 바다 앞에서 곰팡이나 버섯일 뿐이었다. 물결 높은 해안선이 호텔의 유리창 밑까지 바짝 달려들고 있었고 파도가 인간의 생각의 화살을 튕겨내 버리는 것이어서, 생각의 화살들은 해연海淵의 캄캄한 깊이에까지 닿지 못하고 바다의 표면에 부딪쳐 무참히도 꺾어져 버리곤 했다. 그때 한 토인 여자가 해안선의 저편에서 나타나 호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의 시선은 여자의 진행 방향에 따라 서서히 왼쪽으로 이동했다. 여자는 해초류를 따는 여자였던 모양이다. 맨발에 바구니를 끼고 있었다. 그 여자는 익명의 여자였으며 나로부터 문명의 수 세기와 지리의 수억만 리로 격절된 여자였다. 시선이 닿지 못하는, 목측目測 너머의 미지의 공간으로부터 그 여자가 내 시선의 안쪽으로 서서히 걸어 들어옴에 따라 나는 저 낯선 바다, 그리고 시선과 생각의 화살이 가 닿지 못하는 해연의 캄캄한 깊이와 해풍에 멸렬하는 낯선 시간들이 마침내 나에 의하여 감지되고 인식될 수 있는, 그리하여 그 위에다 내가 하나의 삶이나 의미를 세울 수 있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조용히 그리고 분명히, 바뀌어 오는 것을 느꼈다.저 익명의 여자를 축으로 삼아 회전하는 세계와 시간의 공전公轉은 따스하고 포근했으며, 비릿하고 달았고, 서늘하고 축축하였다. 여자는 그 하루만큼의 살아가기에 지쳐버린 듯, 느린 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내 호텔 쪽으로 접근했다. 여자가 한 걸음씩 접근함에 따라 공전으로 바뀌어 드는 세계와 시간의 저 비리고 오련한 질감이 먼동처럼 느리고 느린 확실성으로 굳어져 오는 것을 나는 느꼈다. 이윽고 여자가 내 호텔 유리창 바로 밑을 지날 때 나는 그 여자의 푸대 자루 같은 옷 속에서 젖가슴이 출렁거리는 것을 보았다. 맨발의 뒤꿈치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아마도 그 굳은살에는 그 여자가 세계의 표면을 디디고 살아온 노역이 갈라진 금으로 파여 있을 것이었고 그 실핏줄 같은 금마다 때가 끼어 있을 것이었다. 그 토인 여자는 문명이나 교육에 의하여 형성된 여자는 아니었다. 그 여자는 오직 종족의 유전자만으로 형성된 여자였고, 해풍에 실려 오는 낯선 시간들을 생명 속으로 받아들여 그 시간들을 새로운 피륙으로 짜냄으로써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여자의 발뒤꿈치 굳은살과 갈라진 금과 때들은, 연민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연민이라 말해도 무방했다. 발뒤꿈치의 굳은살로, 인식되지 않은 불귀순의 시간과 공간을 헤치고, 세계의 표면을 걸어서 한 걸음씩 내게로 가까이 오는 여자는 내 종족인 인간의 여자였으며, 인간의 젖가슴과 인간의 목소리와 인간의 성기를 가진 여자였다. 여자는 내 호텔 유리창 밑을 지나서 저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세계의 질감質感은 또다시 공전했다. 따스함과 축축함이, 이제는 등을 보이고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여자의 등에 실려 서서히 사라지고, 가을 숲의 잘 마른 오솔길처럼 바스락거리는 서늘함이 세계의 공간 안에 가득 찼다. 나는 그 서늘함이 인간 쪽으로 인식되어질 수 있는 서늘함임을 느꼈다.여자는 어둠의 저편 끝으로 사라지고 날은 캄캄하게 어두웠다. 나는 커튼을 여미고 자리에 누웠다. 뇌수가 쏟아져 내리는 해조음이 밤새도록 세계의 변방에서 으르렁거렸지만, 그 인기척 없는 바닷가 호텔 방에서 그날 밤 나는 아주 오랜만에 깊고 편한 잠을 이룰 수 있었다. 그날 밤의 잠은 깊고 아늑했고, 빠져 죽을 듯이 곤했다. 세계와의 무섭고도 영원한 작별을 나는 잠 속에서 이루었다. 그날 밤의 잠에 관하여 나는 말할 수조차 없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말할 수 있는 것을 겨우겨우 말하기에도,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한다. 하여튼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보다 먼저 나를 찾아와서 기다리고 있던 손님은 신선하고 반가운 시간의 손님이었다. 나는 그 손님을 맞아 수줍고도 친밀하게 사귀었다. 우리는 예절 바른 벗이 되었다. 잠에서 깨어난 내 팔다리 속에는 내가 모르던 새로운 힘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신생新生했다. 그 힘들은 솜병아리의 부드러움과 귀여움, 그리고 독수리의 강력함과 정확함을 갖춘, 경이로운 힘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옹크리고 앉아 나는 이 전율과도 같은 힘을 끌어안고 진저리를 치면서 쩔쩔매었다. 한 개씩의 개별적인 음音이 사라지고 다가오면서 선율을 이루듯이, 나는 나에게 찾아온 새로운 힘에 의하여 부드럽게 엉기고 연결되는 시간 위에서의 삶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 가능성을 느꼈다. 내가 잠든 사이에 저 토인의 여자가 내 방에 찾아와서 시간 속에서 출렁거리던 그 젖가슴으로 나를 안아주고, 그리고 내가 잠에서 깨기 전에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었을까.내가 깊이 잠들어 있었으므로 그 여자가 다녀간 기척을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가 다녀가지 않았다고도 나는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나에게 찾아온 새로운 힘을 ‘사랑’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름을 붙이고 나서 나는 혼자 좋아서 웃었다. 말린 조개를 끓인 수프가 그 바닷가 호텔 식당에서 가장 비싼 아침이었다. 나는 내 시간의 손님을 맞아서 그 조개수프를 주문했다. 나는 빈 의자를 앞에 놓고 혼자서 먹었다. 그 빈 의자에는 내보이지 않는, 그러나 만유에 미만한 젊은 시간의 손님이 나와 마주 앉아 수프를 맛있게 떠먹고 있었다.사랑을 이룬다는 저 속된 말에 의지해서 인간이 희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문명을 통해서 세계와의 합일, 삶에 대한 직접성, 시간과 더불어 짜이면서 흐르기에 도달하려는 꿈은 문명을 제거함으로써 거기에 가려는 꿈과 나란하다. 그리고 사랑 또는 여자, 여자가 아니라면 그저 ‘너’에 대한 내 사유의 전체도 이 틀로부터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다. 저 나란함이야말로 내 삶 속의 말하여지지 않는 비극이다. 그리고 그 비극은 아마도 당신들의 비극과 동질의 것이되, 서로 소통되지는 않는 비극이리라.

 

 

                                           시간과 강물/ 김 훈

 

 나는 1948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6‧25 전쟁이 나서 엄마 등에 업혀 부산으로 피난 갔고, 부산에서 자라서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에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은 잿더미가 되었다. 학교에는 건물이 없어서 미군이 지어준 천막 교실에서 수업했다. 해마다 보릿고개에는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고 관공서 건물에는 ‘기아 퇴치’, ‘절량농가 근절’, ‘식량 증산’ 같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여름에 큰비가 와서 한강 물이 불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마포구 망원동 쪽 한강으로 물 구경을 나갔다.

 한강은 물이 가득 차서 출렁거리며 흘러가고 있었다. 강은 힘차고 거침없었다. 아버지는 상류 쪽을 바라보았고, 멀어서 흐려지는 하류 쪽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 아버지는 말했다.

 “물을 잘 봐라. 흐르는 물을 보면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느낀다. 물이 흘러가는구나.”

 나는 좀 더 자란 후에야 아버지의 말에 담긴 고통과 희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흐름을 잇대어 가면서 미래로 나아가는 시간의 새로움을 말한 것이었다. 경험되지 않는 새로운 시간이 인간의 앞으로 다가오고 있고, 그 시간 위에서 무너진 삶을 재건하고 삶을 쇄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말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강물은 미래로 향하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희망의 토대’라는 말에는 잿더미가 되고 가루가 되어 버린 시대의 폐허에 맨몸뚱이로 부딪혀 나가야 하는 인간의 고통이 스며 있었다. 아버지는 시간에 대한 희망으로 폐허의 슬픔과 절망을 감당하고 있었고, 흐르는 강물이 새로운 시간의 흐름을 아버지의 마음속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마지막 몇 페이지에서, 경찰 토벌대에 쫓겨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게 된 빨치산 대장 염상진은 마지막 남은 부하들과 수류탄으로 자폭해서 생을 마감한다. 염상진의 후배 하대치가 대원 다섯 명과 한밤중에 염상진의 무덤에 절하고 나서 동트는 새벽의 어스름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에서 이 대하소설은 끝난다. 이 어둠은 새벽의 빛을 잉태한 어둠이었다. 어둠의 밑바닥에서 밝음이 번져 오기 시작하는 새벽에 하대치와 대원들은 미래의 시간을 향해 나아간다. 하대치는 시간과 더불어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기나긴 이야기가 끝나는 시간은 새벽인데, 이 소설은 마지막에서 무한한 미래를 향해 새로 시작된다. 막이 내리면서 다시 열리고 있다.

나는 내 아버지의 강물과 하대치의 새벽 시간에서 인간의 생명을 통과해 흐르는 시간과의 힘과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시간 앞에서 인간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고, 시간과 더불어 새롭다.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순간은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은 자신의 생명 앞으로 바싹 다가온 미래의 시간 위에서만 음과 선율을 불러낼 수 있다. 지나간 시간 위에서는 악기를 연주할 수 없다. 한 개의 음은 창세기의 새벽처럼 이 세상에 태어나고 또 소멸한다. 모든 악기들은 아직 당도하지 않았으나 곧 다가올 미래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악기는 살아 있는 인간의 생명과 시간을 연결해서 시간을 지속된 흐름으로 흘러가게 하고, 그 흐름 위에서 선율은 태어난다.

 물리학자들은 빅뱅 이후 40억 년의 시간을 수리적으로 계량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인간의 생명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시간을 객관화해서 물리적 대상으로 인식할 수는 없다. 시간은 언어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시간이 스스로 새로운 것인지, 인간의 생명이 다가오는 시간을 새롭게 만들어서 수용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어느 쪽이라 하더라도 같은 말이다. ‘날마다 새로워지고, 더더욱 날로 새로워진다日日新又日新’라는 <대학大學>의 문장은 시간 자체의 새로움보다는 인간의 능동적 쇄신 의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읽히지만, 이 문장에서 시간의 본질적 새로움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별들이 운행하는 우주 공간 속의 시간과 땅 위의 흙을 익혀서 흙 속에 잠들어 있던 태초의 색을 발현시키는 도자기 가마 속의 시간과 몸속에서 몸을 길러내는 포유류의 자궁 속의 시간과 씨앗에서 꽃을 피워내는 식물들의 시간과 김치를 익히는 김장독 속의 시간이 모두 동일한 질감과 작용을 갖는 것인지를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 모든 시간들을 인간의 언어의 영역으로 끌어넣을 수 없다 하더라도, 저 여러 가지 시간들은 말의 길이 끊어진 절벽 건너편에서 제가끔 아름답다.

  안중근 안중근安重根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덕순 우덕순禹德淳을 만나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러 가자고 제안했을 때 우덕순은 두말없이 따라왔다. 이 두 젊은이는 이토를 죽여야 하는 대의大義를 거대담론으로 말하지 않았고, 실탄과 여비는 모자라지 않은지,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 이토를 쏘고 나서 어디에 몸을 두어야 할 것인지를 말하지 않았다. 뜻은 순식간에 서로에게 스몄다. 이토를 쏘러 가기로 작정한 그다음 날 아침에 두 젊은이는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으로 가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3등 열차에 몸을 실었다.

 소설 <하얼빈>을 쓰면서 나는 이날 아침에 밝아오는 어둠을 뚫고 달리는 하얼빈행 열차를 생각하면서 행복했다. 내 아버지의 한강이 고통과 시련의 과거를 이끌고 새로운 시간 속으로 흘러가듯이, 안중근의 열차는 약육강식하는 시대의 어둠을 뚫고 하얼빈으로 갔다. 이날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의 아침에 청춘은 아름답고 강력하다. 그들은 서른한 살이었다.

  어린아이들은 길을 걸어갈 때도 몸이 리듬으로 출렁거린다. 몸속에서 기쁨이 솟구쳐서 아이들은 오른쪽으로 뛰고 왼쪽으로 뛴다. 아이들의 몸속에서 새롭게 빚어지는 시간이 아이들의 몸에 리듬을 실어 준다. 호랑이나 사자의 어린 것들도 스스로 기뻐하는 몸의 율동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것들은 생명을 가진 몸의 즐거움으로 발랄하고 그 몸들은 신생하는 시간과 더불어 뒹굴면서 논다. 이 장난치는 어린것들의 몸의 리듬을 들여다보는 일은 늙어가는 나의 내밀한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