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굴손과 버팀목 ㅡ 김 선 화
덩굴손과 버팀목 / 김 선 화
해마다 봄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나는 이상하리만치 덩굴식물을 심는 버릇이 있다. 온상으로 여리게 자란 싹이지만, 오이니 수세미니 하는 것들을 베란다에 열을 지어 옮겨놓고 나면 마음은 절로 넉넉해진다. 몇 해 전에는 박씨를 얻어 무심코 빈 화분에 묻어두었더니, 그것이 여름밤 내내 청초한 꽃을 피워 초가마을의 밤 풍경을 연상케 했다. 그걸 계기로 덩굴식물과 나는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다.
실내에서 자라는 덩굴식물은 비록 열매는 맺지 못하지만 제 나름대로의 욕구가 충천衝天하여 좋다. 그걸 보고 있다 보면 끈질긴 의욕을 읽게 된다. 새 흙에 뿌리가 잡히기 시작하면 이내 뻗어 나오는 덩굴손. 덩굴손이 하나둘씩 늘어날수록 내 마음도 덩달아 급해진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라고 내 안의 내가 외쳐대는 것만 같다. 그래서 서둘러 버팀목을 마련해 준다. 그리고 이리저리 줄을 띄워 동굴식물이 잘 타고 오르도록 길을 터 준다. 그리고 나면 어떤 줄기는, 하룻밤 사이에 줄과 줄 사이를 서너 바퀴씩이나 휘감아 돌린다. 하지만 아직 줄에 닿지 못한 것들은, 잡을 듯 헛손질만을 해대다가 그만 바닥에 나동그라져 타일 틈서리를 기고 있다. 그러면서도 제 근성의 자존심인 양 덩굴손만을 꼿꼿이 세우고 하느작거린다.
나는 이러한 덩굴식물을 보면서 사람들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만 같다. 한없이 뻗어나가고 싶은 본능本能. 그 욕구에 의해 사람의 감정은 곧잘 희비喜悲로 엇갈린다. 각기 그 형태가 다를 뿐, 그것은 살아있음의 증표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식물의 덩굴손과도 같은 사람의 욕망은 '주머니 안의 송곳'과도 같아, 가만히 있어도 자꾸만 불거져 나온다. 때로는 그게 지나쳐서 우愚을 범하기도 하고, 구설에 오르는 일을 부르기도 한다. 또 이러한 욕망과 부합되는 것이, 보이지 않게 형성되는 연緣줄이다. 이 연줄 앞에서 연약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성을 잃거나 우스꽝스런 사례를 빚어내기도 한다.
줄과 줄 사이, 그리고 덩굴손과 버팀목의 관계는 참으로 모호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다 한 사람이 괜찮게 풀려 두드러진다 싶으면, 으레 '쟤, 내가 키웠어'하는 등의 공치사가 따라붙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묵묵히 뒤에서 지켜보며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이 있다. 이럴 때 사람들의 마음은 후자 쪽으로 쏠리게 된다. 따라서 숨은 이의 공로도 자연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 한 예로 미 워싱턴주 상원의원 신호범 씨는, 여섯 살 때에 거리의 소년이던 것이 현재의 자리에까지 이르렀다. 그것은 한 의인義人이 있었기 때문인데, 신호범 의원은 그 의인이 미국인 양아버지였다고 고백했다. 말하자면 양아버지의 숨은 공로를 고백함으로써 의인이 세상에 드러난 셈이다. 그는 6.25와 같은 궁핍의 시기를 겪으면서 미군들에게까지 구걸행각을 벌였다고 하는데, 그건 어쩌면 살고자 하는 본능에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양아버지의 인연을 가져와 오늘의 그를 있게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결과를 논할 때, 거기에 따르는 공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고 또 남의 공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다. 이래서 성급하게 자신의 공으로 알아달라고 지레 목청 높이는 사람 곁에는 선뜻 다가서는 것을 꺼리게 된다.
밑에서 뚝심있게 받쳐주는 버팀목과 그것을 타고 올라야만 너른 세상을 관망할 수 있는 덩굴식물. 그러고 보면 이 둘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상호보완적인 자리에 있는 것 같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살이에서는 더욱 이것이 요구된다. 비약이 심할지 모르나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지체부자유자에게 버팀목 역할을 해준 사람이 공치사에만 급급하다면, 버팀목을 타고 오른 식물에게 꽃 피울 기회도 주지 않고 그 뿌리째 잡아 흔드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생 최고의 아름다움은, 서로 간에 사심 없이 어우러질 수 있는 숭고한 정신에서 기인되는 것이라 여겨진다.
한적한 농촌에서 만났던 여름날의 풍경이 잊혀지지 않는다. 친정에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그 곳은 마을 입구에서부터 개울길을 따라 버드나무가 운치 있게 늘어서 있는 곳이다. 그런데 하루는 이색적인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버드나무길이 끝난 들판에 웬 자색 빛을 띤 기둥 하나가 우뚝 서 있는 게 아닌가. 다가가 살펴본즉, 고목으로 퇴화하여 몸통뿐인 버드나무를 담쟁이덩굴이 타고 오른 것이다. 그리고는 앙증맞은 잎새마다에서 윤기를 내는 것이 마치, 오랜 숙원을 풀어낸 사람의 얼굴과 흡사하였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감히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자연이 빚어낸 설치미술이었다. 대자연의 생성과정이 아무리 신비롭다 한들, 신神의 조화가 아니고서야 이렇듯 아름다운 예술품을 선보일 수는 없다. 검게 타버린 고목이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 또 다른 형상으로 환생하고 있었다. 사람으로 치면, 조화롭게 어우러진 사제師弟간의 숨은 정리情理를 드러낸 것 같았다. 뻗어 오르고자 하는 담쟁이덩굴의 본능을 허용하여 그 잎새들에 가리워진 버팀목 하나, 바람결에 달싹이는 무성한 잎새 사이로 버팀목의 굳은 표피가 얼비치고 있었다. 그러고도 풍만豊滿하기 이를 데 없는 의인의 모습으로 초연하게 서 있었다.
나는 고목과 담쟁이덩굴이 연출해 내는 경이로움 앞에서, 신의 조화를 만난 듯한 느낌으로 한참동안이나 붙박인 듯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