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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이 아름다운 이유 / 초원 위에 빛나는 별 /박 재 명

장대명화 2025. 3. 21. 11:48

                         그 길이 아름다운 이유 / 박 재 명

 

새벽에 출근길을 나서니 안개가 자욱하고 한기가 가득하여 몸이 움츠려

들어 옷깃을 세웠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이 오래되지 않은 것 같은데, 지

금의 마음은 벌써 가을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가 보다.

늦가을의 아침 추위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잰걸음으로 바꾸어 놓았고, 나

역시 기차역을 향한 발걸음이 빨라진다. 기차에 오르니 따뜻한 온기가 나

를 반긴다 사람이 간사하다고들 말하던데, 얼마 전까지 에어컨 바람을 찾

다가 벌써 따끈함이 좋아지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까?

사람의 마음이야 그렇든 말든 기차는 늘 그랬던 것처럼 묵묵히 안개 낀

새벽을 헤치며 철길을 달린다. 기차가 달리는 속도만큼 열차를 오르내리

는 사람들은 제각각 바쁘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아침을 깨운다 충주

까지 태워준 기차가 저만치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 이제는 내가 발

품을 팔 차례다.

기차역을 등지고 홀로 호젓한 들길을 걷는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봄

부터 튼실하게 자란 벼들이 황금들녘을 이루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단했

던 한해를 마무리 하는 듯, 탈곡된 볏짚이 되어 나란히 누워있다 벌써 텅

비어버린 들녘을 바라보니 어느새 또 한해가 지나간다는 공허함으로 잠시

나를 쓸쓸하게 만든다.

그럴 즈음에 들판 길은 끝나고 탄금호 제방의 산책길에 다다랐다. 드넓

은 호수면의 물안개는 생명이 숨 쉬며 토해내는 입김과도 같아 있는

듯하다 살아 있으되 고요하고 평온한 모습이니 정중동(靜中動)이란 이런

모습일까? 탄금호는 그렇게 조용히 겨울 맞이를 하고 있었다. 밤새 떨어진

가로수 나뭇잎이 산책길에 흩날려 어지러이 뒹굴고 벌써 갈색으로 변해

버린 길섶의 잔디가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만든다. 얼마간 걸어가니 퇴색

된 잔디 사이에 활짝 핀 보랏빛 쑥부쟁이 한 송이가 눈에 들어온다.

그 모습이 마치 가냘픈 몸매의 가녀린 소녀 같기도 하고 단아하게 몸단

장을 마친 아낙네를 보는 듯하다 강하지 않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듯

도 하지만 청순하고 기품 있어 보인다. 꽃송이에서 절개 굳은 여인네의

자태를 보는 듯하여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향기에 취해 본다.

녹음방초(綠陰芳草) 무성하던 오뉴월의 천자만홍(千紫萬紅)은 모두 결실

을 하여 겨울 준비하건만 너는 무슨 생각으로 늦은 가을이 되어서야 꽃

을 피우느냐? 세상 사람들에게 홀로 고고한 척 자태를 뽐내기 위해서, 외

롭고 안쓰러운 모습으로 뭇 사람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기 위해서냐? 혹

은 이 꽃 저 꽃을 가리지 않고 넘나드는 봄 나비가 싫어서 이냐?

그도 저도 아니면 아직도 겨울 준비를 못한 벌들에게 희망의 꿀을 주고

자 함인가 겨울로 가는 길목에 사람이며 나무며 만물이 겨울준비에 한창

인데, 너는 아직도 여유로움의 향기로 사람의 발길을 잡으니 그래서 매력

적인가 보구나!

인생의 겨울은 언제이고, 그 겨울의 길목에 있는 인생의 늦가을은 언제

일까? 퇴색되고 낙엽만 지는 가을길이라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길인가.

그것이 만일 인생의 길이라면 얼마나 메마른 자갈밭길과 같은 인생인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가을 길처럼, 내 인생의 가을 길에도 들국화 같은

꽃을 피워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어떻게 가꾸고 피워야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꽃 한포기 피지 않은 나의 미래를 상상해 보니, 살아 온 세월의

한과 시름만 투영되는 흑백의 영상으로 지나간다.

그 사이로 아침에 만난 들국화를 살짝 피워 올려 본다. 그러자 세월의

한시름과 무기력으로 얼룩진 흑백의 영상이 꽃향기 가득한 천연색의 화사

한 세상으로 변했다. 늦게 피는 꽃이 더 아름답고 향기가 진하여 멀리 간

다고 하지 않던가! 출근길에 만난 쑥부쟁이는 인생의 늦가을까지 피워야

할 꽃이 많음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고 보니 지나간 날 중에 보석 같은

시간을 허송세월로 보낸 날이 많았던 것 같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만난

들국화를 보며 내 인생의 남은 여정을 채워 줄, 나만의 들국화 한 송이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언제 시작하고, 어떤 길목에서 어떤 모습으

로 피울까 라는 생각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마음도 발길도 바빠진다.

 

2007/28 집

 

 

초원위에 빛나는 별 / 박 재 명

 

끝없는 지평선을 하루 종일 달릴 수 있는 나라를 보면 괜히 심

술이 난다 심술도 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밤 하

늘의 별빛 한 번 보겠다며 끝없이 광활한 지평선을 달리고 날아서

이곳에 온지 벌써 3일째 광활했던 대 평원은 산맥을 가로 넘는

고갯길을 끝으로 꼿꼿한 나무 한포기조차 없는 몽골 초원에 들어섰

다 그저 평범한 산 하나를 지나왔는데 해발 1,800m급이니 고산

증에 견딜 수 있느냐며 가이드가 걱정스레 물어 본다 그러지 않아

도 이렇게 큰 평야를 가지지 못한 심통이 발동해, 눈만 뜨면 이

정도의 산은 늘 다니는 사람들이니 걱정을 말라며 일축해버렸다.

천하를 정복했던 그들의 선조 징기스칸이 연상되었을까? 우락부

락하고 건장한 청년들과 체격 좋은 처녀들이 우리를 애워싼 채 우

렁찬 노래 한 곡 선사하였고, 연이어 건네는 독한 술 한잔은 반

강제적으로 마셨다. 술 한 잔에 기세 눌렸던 긴장감과 이방인의 낳

선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은 절로 풀어진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우

리와 꼭 닮은 모습을 한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여장을 풀 틈도 없이 처음 혼자 힘으로 타는 말에 올라 초원을

향해 나선다. 잠깐 달려 왔을 것 같은데 저만치 보이던 마을은 어

느새 언덕에 묻혀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드넓은 초원을 한 바퀴

빙 돌아 보니 이곳이 곧 저곳 같아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고, 다만

내 그림자의 방향만이 마을 위치를 대강 가르켜 주었다. 저 언덕

너머에 먹구름 한 줄기가 지면에 드리웠으니 혹시 그곳에는 빗줄기

를 뿌릴까?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초원의 한 쪽에는 먼지 바람이

일었다가 다른 언덕으로 사라졌다 초원의 밤 하늘에 별이 그렇게

초롱초롱하다고 하던데 지금의 황톳빛 하늘을 보니 별 구경 못할까

걱정이 앞서고 행여 그 먹구름이 밤하늘에도 낄까 우리가 묵을

마을을 덮칠까 조바심이 생겼다.

지평선 너머 해가 넘어 갈 즈음 사람들은 공연장 주위로 하나

둘씩 모여들고 마침내 피어 오른 모닥불은 민속 공연의 시작이 임

박했음을 알린다 하늘과 바람과 초원은 청아한 몽골 처녀들의 노

래 가락과 율동을 타며 빙빙 돌아가고, 흥에 취하고 술에 취한 여

행객과 현지인이 하나가 되는 사이에 초원의 밤은 점점 깊어갔다.

멍석에 누우면 앞산과 뒷산 사이에 빼곡히 들어서던 별들이 아름다

웠던 고향의 한여름 밤이 생각난다 그렇게 초롱초롱했는데 그것보

다 더 낳으려나?

공연이 막바지를 향하며 모닥불도 꺼지고 공연내내 불빛에 산란되

었던 희뿌연 하늘은 서서히 검은색으로 변해간다 사람들이 제각각

잠자리를 찾아 떠나간 자리에 하나 둘 별들이 찾아 오는가 싶더니,

몽골처녀의 노랫소리가 담긴 풀끝의 이슬이 선율을 타고 모두 하늘

에 올라갔을까? 어느새 초원의 밤하늘에 모든 별들이 다 나와서 제

각각 빛을 발한다 너무 크고 선명해서 금방이라도 우수수 떨어질

것 같은 별빛은 점점 더 현란해져 폭죽이 터진 듯하고, 아롱거리는

저 작은 별들은 고요한 밤하늘에 은색의 강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

어 냈다 매 순간 떨어지는 유성이 초원의 언덕 바로 위로 떨어지

니 불꽃놀이의 여운과도 같다 보석같은 저 별은 언덕에 올라 조금

만 더 발 돋움하면 쉽게 잡힐 듯하니, 사랑하는 당신이여~ 곁에

있으면 당장 따다가 한아름 안겨 주었을 것을..... 지금 함께 있지

못하니 안타까울 따름이요 나 혼자만 바라보고 좋다하기엔 아깝고

도 벅차니 이 마음에 어떻게 전해 주리....

초원의 언덕위에 배고픈 승냥이 한 마리는 멀뚱하니 마을을 굽어보

, 초원의 밤하늘은 별빛 따라 초롱초롱 깊어만 간다. 낭낭한 노

래의 주인공 소녀도, 양치기 소년도, 여행에 지친 이방인도 쏟아지

는 별빛 머금은 이슬과 함께 단꿈에 젖어 드는데, 나 홀로 잠못드

는 밤에 찬란한 은하의 해변을 거닐며 또 다른 여행을 한다.

 

2007년 봄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