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물이라네 / 이 문 자
나, 물이라네 / 이 문 자
나, 물이라네
생명의 근원이며, 변신의 귀재, 신비의 표상이라 일컫지. 온갖 생명체가 나로 인해 태동했으니 창조주가 발휘한 기적 중 실로 으뜸이 아닌가. 하고많은 행성 중 이 별에만 베푼 은전(恩典)이었으니, 지구별에만 허락한 편애 아니냐고 다들 불만일 걸세. 태양계 세 번째 초록별에 만물의 영장을 출현시킨 장본인인 내가 생각해도 이 별에 헌신한 공은 날 능가하는 존재가 없지 싶어.
난 멈춰 있을 때는 고요의 상징이지. 한없이 부드럽고 순하여 내 몸이 어디에 담기든 불평 한마디 않는다네. 높은 곳에서 스스로 낮출 줄 알고 결코 거스르는 법이 없거든. 어느 곳에서든 순응하고 잘 스며들어 침묵의 선행으로 일관하는 까닭에 반칙 같은 건 꿈도 꿔보지 않았어. 변칙, 불법을 밥 먹듯 하는 인간에게 나의 이치를 깨달아 순리를 행하라는 계시인 줄을 알아야 할 텐데. 안타깝네그려.
나, 가장 유연하면서도 강한 힘을 지녔다네. 고요의 경지 명경수면이면 산야는 온통 나르시시즘에 빠져 제 모습에 반해버리곤 하지. 실로 장관(壯觀) 아닌가 말일세. 유유자적하다가도 산들바람이 슬쩍 지나면 절로 미소를 짓게 되거든. 사랑을 품고 사는 사람의 눈에만 띄는, 그 ‘윤슬’ 말이네. 이럴 땐 나도 덩달아 설레고 싶지 뭐야.
그뿐인가. 분신인 초 미립자에서 출발하여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리다 보면 동료를 만나 함께 품고 가는 넉넉함도 지녔어. 도랑물로, 시내로, 강으로 말이야. 그 여정을 이어가며 논밭과 들을 적셔 초록별에 풍요로운 먹거리를 대고 있지 않은가. 해양에 이르면 너른 품이 좋아서 마구 내달리고 싶어. 포말을 흩뿌리며 길길이 뛰어오르다가도 물고기를 키우고 배를 띄워야 할 땐 퍽이나 순해지지. 내 뒤척이는 몸짓이 사람들 가슴을 식혀준다니 그저 흐뭇하기만 하이.
난, 정화수 한 사발에도 어머니의 간절한 비원(悲願)을 담고 있다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마음속은 모른다지 않는가. 내 성정이 정결하여 신과의 언약식에 등장하는 것도 순정한 맑음 때문이라네. 나 역시 신의 배려로 태어났으니 거룩한 모성의 비책을 모를 리 있겠는가. 생명을 잉태하여 숭고한 과업을 수행해 본 공감대 말일세.
상온에서 조용히 머무르길 좋아하지만 춤을 추고 싶을 때가 있어. 한없이, 한없이 가벼워져 하늘로 오르다 보면 파란 도화지에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거야. 그림붓 없이도 잘만 그려내는 내 솜씨에 땅에선 손뼉을 치며 야단들이지. 노랠 부르지 않나. 시를 읊지 않나. 기중 맘에 드는 건 아이들의 그림이고 노래인 거야. 아이들을 위한 일이면 난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아이들 마음을 닮고 싶어 신명이 나는 거야. 아니 아이들이 날 닮아서 그런가도 모르겠네.
한데, 선량하기만 한 사람들을 ‘물탱이’라고 부르는 걸 들은 적이 있지 뭔가. 각박한 세상살이에서 무엇이든 나누고 허용하는 이들을 ‘물탱이’라 비하하다니 이거 될 말인가. 모질지 못해 용서하는 일도 쉽게 하는 이들을 모욕하는 건 용납할 수가 없네. 인간의 몸통에 담긴 수분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나 하는 소리인지. 그렇게 따진다면야 인간은 모두 물탱이란 말일세. 나의 존재 가치를 우습게 보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말을 뱉을 수 있는지 한심스럽지 뭔가. 각성들 하시게나. 허튼소리 함부로 뱉지 말라는 경고 말이네.
혹자들은 세상에서 흔하고 흔한 게 물이 아니냐고 반문할 테지. 내가 기꺼이 모습을 바꿔가며 멀고 먼 순환의 길을 멈추지 않는 건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기 위함이라네. 오로지 내 소임에만 충실할 뿐. 고달파도 사명임을 알기에 긍지로 삼는 것인데, 흔하고 흔한 게 물이라는 말, 경을 칠 일이야. 초록별을 부러워하는 뭇 행성의 심정을 헤아린다면 가당키나 한 소린가.
나, 유일무이 지구의 자산이기에 뭇 생명체들에 골고루 베풀고 싶은 맘 간절하이. 낭비벽이 심한 사람을 물 쓰듯 한다고 말한다지. 날 얼마나 하찮게 여겼으면 그런 말들을 할까. 여보게. 물 한 모금 제대로 구하지 못해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그러고 보면 이 반도의 주인들은 물 씀씀이가 너무 헤퍼. ‘물 부족국가’란 불명예 판정이 내려졌다기에 어안이 벙벙했어. 예상했던 일이었지.
골짜기마다 옥수요, 한 움큼 들이키면 물맛 하나는 기막히다고 축복의 땅이라고들 하지 않았나. ‘치수’를 내 재물이듯 여겼다면 이 지경에 오진 않았을 터. 이 초록별에 행운을 가져다준 신의 은총을 안다면, 진실로 안다면, 날 함부로 범하지 말게나. 물 쓰듯 아낀다는 말이 나와야 할 판국에 말이네.
언제부턴가 내 임무인 ‘물의 순환’이 제 구실을 못 하게 됐지 뭔가. 지구가 걸핏하면 앓아눕거든. 지구 훼손의 주범이 인간이라니 될법한 소린지. 창조주가 분기탱천할 노릇인 게야. 비를 내려주지 않는다는 원망이 하늘을 찔러도 내 동정심만으론 어쩔 수 없는 일이라네. 인간이 자초한 지구 온난화로 돌아버릴 지경이 된 대기가 걸핏하면 정상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나, 그 바람에 나도 그만 정신 줄을 놓을 때가 비일비재거든. 태초에 삼라만상을 이롭게 하라는 분부를 받고 지구상에 왔거늘. 가물 땐 물 한 방울 모으기 힘들다가 수마로 지탄받게 될 줄을 어찌 알았을꼬. 난 순환의 법칙에 따를 뿐이네. 인간의 무분별이 저지른 죄과를 내게 전가하진 말게나. 제발……
이제 겨울도 끝자락인가 보이. 동면에 든 나목에 부지런히 수액을 올려 나도 부지런히 거동에 나서야겠네. 지구별의 찬란한 봄, 아니 그대들을 위해서 말이네. 얘길 들어줘서 고마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