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층 / 무게 ㅡ 김 창 식
1.5층 / 김 창 식
건물은 1층도 2층도 아닌 어정쩡한 건물이었다. 처음부터 그 건물이 눈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해 질녘 산책길에 슈퍼마켓에 들렀다가 눈에 익은 초록색 바탕의 노란 리본 로고와 위로 향하는 화살표 표지가 보여 무심코 옆 계단을 올랐다. 홀로 한 바퀴 휘둘러보고 옆쪽으로 트인 출구로 나오니 그냥 널찍한 평지였다. 다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오거나. 엘리베이터 또는 에스컬레이터, 하다못해 아래로 향하는 비탈진 길이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이번엔 역순으로 쪽문을 열고 내부 홀로 가로질러 계단을 되짚어 내려왔다. 도로면에 잇닿은 평평한 땅이 나왔다. 높이는 달랐지만 계단을 올랐는데도 1층이었고 내려왔는데도 1층이었다. 길모퉁이에 비켜서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특별할 것도 없는 지역 농협 건물이었다. 다만 건물이 아파트 입구 언덕바지에 서 있어 계단을 오르내리더라도 밖으로 나오면 다시 택지나 도로로 연결되는 구조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건물이 조금 기울어져 보였다.
주위 행인들은 건물 생김새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듯 자연스레 오갔다. 건물이 한적한 이면도로에 위치한 데다 '피사의 사탑' 같은 유서 깊은 랜드마크나 관광 명소도 아니니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이다. 그렇다 해도 미심쩍고 석연치 않은 느낌이 온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그곳을 떠났다. 발을 접질려서 넘어질 뻔했다. 뒤통수를 무엇이 잡아채는 듯 따가웠다.
가던 길을 멈추어 뒤돌아보았다. 여전히 낡고 허름한 건물이었다. 초록색 바탕의 빛바랜 노란 리본 문양 간판 뒤로 해가 기울고 있을 뿐. 언뜻 건물이 기우뚱하더니 지면에서 비스듬히 분리돼 공중으로 떠오르는 착각이 들었다. 건물이 입체영화에서처럼 확대되며 다가왔다.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천공天空의 성城 라퓨타처럼. <아바타>에 나오는 판도라 행성의 움직이는 산처럼. 순간 한 생각이 스쳤고 그 생각이 그럴 듯하게 여겨졌다. 1.5층의 삶!
계단을 올라가도 1층, 내려와도 1층이면서도 떠도는 건물. 남의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저 1.5층 건물이 우리네 삶을 에둘러 말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모두 1층도 아니고 2층도 아닌 어정쩡한 사이 공간을 떠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땅에 굳건히 뿌리박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위로 오르지도 못한다. 어디론가 흘러가거나 잠시 머물면서도 그곳이 가려 한 곳인지 정작 확신이 없다. 1.5층의 삶은 떠도는 삶, 출발지도 목적지도 아닌 경유지의 삶이다. 출발지의 설렘도 도착지의 안도감도 없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유량을 계속하는 경계면의 삶.
인상주의 화가 고갱의 삶을 떠올린다. 문명세계에 염증을 느낀 고갱은 두 달여의 항해 끝에 타히티섬에 닿는다. 원주민 처녀와 동거하며 태곳적 모습을 간직한 원색의 자연과 원시생활의 순후함을 화폭에 담는다. 빈곤과 고독, 병고에 시달리다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개인전을 열지만 실패하고 주위로부터도 냉대를 받는다. 고갱은 다시 남태평양으로 떠나 필생의 역작인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남기지만 우울증과 영양실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살을 기도한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영원한 보헤미안 고갱은 1.5층의 삶을 온몸으로 살아낸 사람이 아닐까?
영화 <식스센스(The Sixth Sense)>도 생각난다. 주인공이 보통 사람인 줄 알았는데 죽은 자였다. 그는 죽은 사람을 보는 소년과 교유하며 우정을 가꾼다. 주인공은 죽었으면서도 이승의 사람 주위에 출몰하며 기이한 공간을 떠돈다. 막판에야 주인공의 정체가 드러나는 반전이 있는 영화이면서도 애틋한 여운을 안겼다. 그런데 잠깐, 우리 주변에도 혹 이러한 허깨비 같은 삶을 사는 존재가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산 사람의 삶은 그 같은 흐릿한 삶과 어떻게, 또 얼마나 다른 것일까?
다시 1.5층의 딜레마를 반추한다. 제 갈 길을 만족하며 반듯하게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1층은 내가 속한 곳이자 나를 얽어매는 남루한 현실일 수 있다. 현실의 질곡에 발목 잡혀 있으면서도 삭막한 담벼락을 힘겹게 오르는 넝쿨 식물 같은 위태로운 삶이 우리 삶의 본디 모습일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파우스트 박사의 고뇌 어린 독백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어둠의 사슬을 끊고 나아간 빛의 세계'가 또 다른 평평한 땅으로 이어질는지 모르지만 나는 마음속 어둑한 계단을 오른다. 해 질녘 틈새의 시간에 회백색의 낡은 건물이 침묵 속에 잠겨 있다. 본디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었다는 듯.
무게 / 김 창 식
딱히 잠버릇이 사납지 않은 아내지만 잠 찜에 한쪽 다리를 내 배 위에 올려놓는 버릇이 있다. 그럴 때면 아내의 무의식적인 신뢰에 안도하면서도 순간 숨이 막힐 듯하다. 다리 무게가 얼마나 나간다고? 그 다리에는 아내와 두 아이를 합친 가족의 무게가 함께 실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인다.
기억을 더듬는다. 60년대 소매치기가 한창 기승을 떨던 시절이었다. 버스 손잡이에 넋 놓고 매달려가던 나는 깜박하는 사이 손목시계를 날치기 당했다. 그 후 어쩌다 손목에 눈이 갈 때면 시계 찬 자리에 동그랗고 붉은 언이 상흔처럼 아른거렸고,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리기도 했다. 손목의 허전함은 시계의 무게만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본디 무게에 심리적인 무게가 덧놓으면 실제보다 무겁게 다가오기 마련인가 보다. 눈꺼풀에 한사코 달라붙는 졸음이 그렇다. 재활치료 중인 알츠하이머 환자가 떼는 첫발의 힘겨움도 마찬가지다. 친지의 주검을 운구한 적이 있다. 관의 무게가 그렇게 무거운 것인지 미처 몰랐다. 세상을 등진 자의 아쉬움과 보내는 자의 안타까움이 함께해서 일 것이다. 그래서 그 옛날 기억 속의 꽃상여도 망설이며 뒷걸음치고 물러서며 앞으로 나가는 듯 발 구름 했던 모양이다. "에헤라디야~ 상사디야~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잃어버린 것의 무게는 잃어버리기 전보다 무겁게 다가온다. 놓쳐버린 작은 조각의 무게는 남겨진 전체 무게의 합合과 같다. 퍼즐은 마지막 작은 블록으로 완성되고, 깨진 거울이나 꼭지가 떨어져 나간 도자기는 온전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겨울날 장갑 한 짝을 잃어버린 적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두 짝을 모두 잃어버린 셈이었다. 성경에는 '선한 목자'의 비유가 나온다. 길을 잃은 1마리 양의 무게는 다른 99마리 양의 무게를 합친 것과 다를 바 없다.
구체적인 사물이지만 무게를 마음속으로 계량할 수밖에 없는 소소한 것들이 있다. 창틀에 내려앉는 눈송이, 공중을 부유하는 홀씨, 곤충의 빗살 무늬 날개, 갓 부화한 병아리의 솜털, 하늘로 올라간 헬륨 풍선, 손만 가까이 대도 기척을 알아차리고 하르르 닫히는 미모사…. 도대체 무게가 있을 성 싶지 않은 현상도 있다. 끌탕처럼 피어오르는 먼지,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나가는 물무늬, 소멸하여 하늘로 흩어지는 연기, 햇볕과 더불어 자취를 감추는 안개 알갱이…. 사람이 죽었을 때 육체를 빠져나가는 에너지 생명체靈魂의 무게는 또 얼마나 될까?
사람은 평생 심리적 무게를 안고 사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든 잊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둔 한과 자책이 있을 법하다. 남몰래 짓는 한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간절히 바라면서도 꿈꿀 수 없고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있을 때, 그 원망願望의 무게를 어찌 가늠할 수 있을까? 마음속 돌멩이는 켜켜이 쌓여 돌탑이 되었다가 소리를 내어 구른다. <한오백년> 구슬픈 가락에 돌덩이를 실어낸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