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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벌레의 추억 / 이 어 령

장대명화 2024. 12. 22. 17:39

                               개똥벌레의 추억 / 이 어 령

 

 한적하던 길이 갑자기 몰려든 자동차들로 붐빈다. '인산인해'人山人海가 아니라 '차산차해'車山車海다. 처음에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짜증을 냈지만 정보에 밝은 M교수가 반딧불이 감상회가 열린 것이라고 알려준다. 아침마다 산책하는 연구소 뒷산 오에야마大枝山가 바로 반딧불이의 서식지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미 전멸한 것이나 다름없는 반딧불이를 이곳 연구소 바로 뒷산에서 보게 되다니…. 정말 한여름 밤의 꿈이다.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M·L교수와 함께 반딧불이 구경을 나선다. 야조野鳥 유원지라고 써 붙인 산길 입구에는 '반딧불이 감상회'라는 낯선 간판이 들어서고 텐트가 쳐져 있다. 우비 차림 도우미들의 친절한 안내를 받는다. "사진 촬영은 하지 마세요. 반딧불이가 놀란답니다." 맞다. 반딧불이들은 달빛이 있어도 날지 않는다. 깜깜한 냇가 이슥한 풀섶에서라야 비로소 그 발광기發光器가 제구실을 한다. 2초 간격으로 점멸한다는 빛의 발신發信으로 그들은 암흑 속의 자신을 알리고 구애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더 이상 그 빛의 모스 부호와 연시戀詩를 읽을 수 없게 된 것은 농약 때문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산간벽지의 오솔길까지 점령해 버린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반딧불이의 빛들을 모두 쫓아버린 것이다. 아이들이 환성을 지른다. 정말 공기보다 가벼운 반딧불이의 파란 불들이 허공 속을 날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풀숲에서 이슬처럼 맺혀 반짝인다. 빛의 이슬, 그리고 날아다니는 별들을 따라 300m 남짓한 작은 도랑길을 따라간다. 할아버지와 함께 온 아이들이 많은 것 같다. 할아버지는 옛 추억을 사냥하기 위해, 아이들은 해리포터 같은 마법의 불에 홀려 먼 데서 이곳까지 왔으리라. 하지만 반딧불이 감상회는 브람스의 음악 연주회보다도 짧다. 길어야 10분을 넘지 않는다. 오히려 초 단위로 계산해야 옳을 것 같은 반딧불이 감상을 위해 몇 시간 동안 그리고 수십 km의 길을 달려온 감상객들에게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을 한다.

주최자가 아닌데도 왜 그런 느낌이 드나? 생각해 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신설 문화부에 장관으로 부임해 브리핑 받던 생각이 난다. 반딧불이가 천연기념물 322호라는 말을 듣고 놀랐다. 무주 구천동 계곡에 양육 시험장을 만들어 반딧불이를 기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동네 개울에서 댑싸리 빗자루를 들고 쫓아다니던 흔하디흔하던 벌레가 이제는 정부의 관리들이 키우는 문서 속의 생물이 된 것이다. 그렇다. 그냥 기를 것이 아니다. 도시의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에게도 할아버지나 아버지들의 어린 시절처럼 반딧불이와 함께했던 신비한 그 여름밤의 기억들을 나눠줘야 한다.

그래서 여름방학을 이용해 어린이들을 위한 반딧불이 학교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친지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자기 아이들도 꼭 그 프로그램에 끼워달라는 청탁이었다. 그럴 때마다 무주는 길이 험해 아이들을 태운 버스의 안전이 염려된다고 극구 반대하는 소리를 뿌리치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딧불이는 날지 않았다. 비가 온 탓이라는 보고가 들어왔지만, 원래 반딧불이들은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직전까지만 해도 "반딧불이 발견! 다섯 마리 정도"라는 보고를 받을 때부터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결과는 처절했다.

그 먼 곳까지 그림책에서나 보던 꿈의 벌레를 쫓아간 서울 내기들이 풀이 죽어 계곡에서 돌아오는 어두운 그림자가 가슴에 와 박혔다. '그래 꼭 약속할게. 반딧불이를 잡아 깁(명주실로 조금 거칠게 짠 비단)으로 만든 주머니에 담아 책을 읽었다는 차윤車胤의 전설, 그리고 꼭 너희만 할 때 반딧불이 스탬프와 함께 상賞이라는 글자가 찍혔던 그 자랑스러운 공책…. 아니다. 반딧불이는 표준말이 아니다. 그것을 개똥벌레라고 불렀던 시골 아이들의 여름밤 사투리를 가르쳐 주마', 문화부를 나운 뒤에도 줄곧 반딧불이 살리기 캠페인을 벌이며 사라진 그 불빛을 아이들에게 다시 보여주려던 집념을 버리지 않았다.

농림부 장관을 만났고, 지방 자치단체장과 자리를 같이했으며, 삼성의 지구과학연구소였던가 의과학자들과도 만났다. 멸종된 겐지 호타루(일본 반딧불이 종류의 하나)를 다시 살려 냇물 전 지역을 반딧불이로 밝힌 오이타大分현으로 사람을 보내 조언도 받았다. 그러다 용인 에버랜드에서 양식한 반딧불이를 보여주는 축제를 벌이기도 했고 또 무주군의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반딧불이 축제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반딧불 없는 반딧불이 축제로 아이들에게 실망만 주었다. 반딧불로 하늘의 별빛이 흐리다는 두보杜甫의 시와 같은 '견형화見螢火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마다 속으로 "미안하다"고 말한 그 소리가 오늘 밤에도 내 입가에 떠돌고 있다. 하기야 셰익스피어와 같은 천재도 반딧불이의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 몰랐다. 단지 햄릿의 1막에 유령이 나오는 으스스한 공포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 도구로 이용했을 뿐이니까. 그리고 일본인 역시 반딧불이는 천하의 권력을 놓고 싸운 겐지(源氏)와 헤이게(平家)의 사무라이들과 연관되어 있다. 겐지호타루와 헤이게 호타루라는 이 반딧불이 이름이 바로 그 유명한 양가 무사 집단의 전쟁에서 비롯한 것이다. 누군가 말한다. "정말 저 반딧불이를 잡아다 모으면 책을 읽을 수 있겠네." 또 누군가가 말한다 "교통신호 불같네?" 아이가 말한다. "엄마 손전등 줘봐. 어디에서 불이 켜지는지 보아야지." 하지만 어디에서도 "반딧불 뻑뻑…" 하고 노래 부르던 아련한 추억 속의 아이들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반딧불이를 잡아다 책을 읽었다는 전설이 생겨날 때부터 반딧불이 죽이기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유령이 나오기 전 햄릿이 본 그 반딧불이처럼 파리하고 차가운 불빛이 어두운 풀숲 사이로 사라진다. '미안하다, 겐지 호타루…. 미안하다 헤이게 호타루…. 어렸을 때처럼 한국말로 불러줄게. 개똥벌레야.'

노래방 기계가 나온 뒤 나는 노랫말을 잃어버렸다. 어느 한 구절이라도 암송하느라 애쓰고 곱씹으면서 불렀던 그 노래 맛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총기가 좋다며 어머니 앞에서 노래 가사를 들려주던 나의 시간도 묻혀 버렸고 향수와 애절함도 잊은 지 오래이니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정감도 가뭇하다. 학생들은 수업 도중에도 스마트폰으로 검색하여 선생에게 틀린 부분을 지적한다. 학생 출석부를 받아들고 자기반 학생들 이름을 외우던 선생님의 기억력은 관심과 사랑이지 않았을까. 더 이상 종이 성적표에 점수를 주면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기기에 저장하고 불러내고 관리하는 일만 남아 실체가 약한 세상이다. 상처에 아파하고 어른들의 잔소리를 곱씹고 친구를 배려하던 그런 내 인생의 맛은 어디로 간 것일까. 단수수대를 씹으면서 단물을 삼키고 거친 밀과 질긴 나물을 씹던 튼튼한 나의 턱은 기억을 잃고​ 바슬거리기 시작한다.

불러내기와 퍼즐 맞추기 앞에 내 상상력은 곧 절단 나버릴 모양새다. 기억을 어떤 형태로 빚을 것인가. 작가의 기억력은 기억의 천재 앞에서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다. 작가들의 기억장치는 효모라도 있는 듯 세상사를 발효시키고 숙성시켜 슬픔까지도 얼마나 아름답게 그려내는 필기도구였던가. 그냥 기억만 해내도 독특하면 대단한 금맥이라도 찾아낸 것처럼 빛을 보고 그 이야기 자체로 사랑받던 기억담이었다. ​

우주 질서까지 상상력으로 버무려내던 작가의 기억력은, 스마트폰 안에 떠도는 기억의 천재 푸네스 유령들을 치유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포도알이 몇 개나 되는지 집착하는 천재들에게 포도송이마다 하늘이 울다 웃고 비바람이 춤을 추어 포도주가 익어가는 그 시간의 유산을 들려주어야 한다. 우리들은 날마다 수 억 건씩 기억되는 부질없음에 보르헤스의 말처럼 쓸데없는 몸짓들을 증식시키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까마득한 현기증을 느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