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행복은 얼마나 친할까 / 서 숙
돈과 행복은 얼마나 친할까 / 서숙
내 천성에는 약간의 트위스트가 들어있다. 액면을 뒤튼다. 가령 누군가가 돈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고 기염을 토하면 나는 신속한 결론에 닿는다. 아하, 저 사람은 돈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군. 또는 어떤 이가 돈, 그거 좋지요, 웃으며 말하면 저 사람이야말로 돈의 과부족에 그다지 구애받지 않을 사람이로구나, 적어도 돈에게 행복을 구걸하지는 않겠는걸, 혼자서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이런 직감이랄까 어설픈 진단이 종래에 그럭저럭 맞아떨어지는 경우에 당도하여 반어적 심리탐색에 확신이 쌓여만 간다. 사람들은 유독 돈에 대해서 이중적이거나 위선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의 아버지는 재물을 쌓는 삶을 경원시하여 당신의 여유를 가까운 사람들과 나누며 살고자 했다. 소신에 굳건하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 식구들은 뒤처리 비용을 융통해야 했다. 그러나 믿었던 친지들에게 청을 넣었다가 매번 빈손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축재 대신에 쌓은 인맥의 진정성을 의심하여 심지어 아버지의 일생마저도 회의하였다.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남에게 돈을 빌리는 경우는 만들지 않겠다고, 번잡한 시내 보도블록의 길 위, 모멸감의 한가운데서 결심하였다. 살면서 내내 저축에 열심이었던 것은 남의 돈을 빌리지 않으려는 자기방어의 제법 거창한 실천적 인생관에 기인하는 바이다.
돈이 없어서 삶이 구차해지고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 세상은 언제나 그래왔다. 과연 우리의 내딛는 걸음걸음은 진달래꽃을 즈려밟고 가는 것이 아니라 지폐를 밟고 간다. 하룬들 소비 없이 지탱을 할 것인가. 당당함과 편리와 안락과 온갖 풍요와 진귀함을 누리게 하는 재화는 생명을 연장하고 노화를 막고 아름다운 외모도 준다. 무엇보다 재력으로 수하에 사람을 부릴 수 있으며 심지어 마음도 얻을 수 있고 이상적인 배우자도 취할 수 있다. 돈이 바로 요술램프 속의 '지니'의 현현이다. 반면에 가난은 살릴 목숨을 잃게도 한다. 제아무리 뛰어난 재능이나 덕성도 연수입과 환치되지 않으면 빛을 발하기가 쉽지 않다. 한 영화에서 난치병으로 오랜 병원생활을 하는 환자를 두고 의사가 말한다. "병이 문제야? 돈이 문제지." 그만하면 돈이야말로 행복한 삶의 제일의 조건이 됨직도 하다.
아마도 대체로는 인간다움과 자존에 해를 입지 않을 정도의, 의식이 족하여 예를 갖출 수 있을 만큼의 재물을 지닐 수 있는 처지라면 복된 삶이라 이를 것이다. 문제는 돈에 대한 가치 부여에 있다. 항용 인간이 돈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돈에 휘둘리는 주객의 전도 현상이 벌어질 때 돈은 확실히 모종의 독성을 지니게 된다. 그에 대한 비유는 이런 것이다. 아흔아홉 섬을 가진 사람이 백 섬을 채우려고 덤빌 때, 달랑 한 섬 가진 사람이 기어이 이를 빼앗기고 만다. 한 섬 가진 사람이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보다 아흔아홉 섬을 가진 사람이 백 섬을 채우려는 욕망이 더 세기 때문이다. 이렇듯 돈에 얽힌 욕망은 아무리 많은 것을 움켜쥐어도 만족을 모르는 공허한 나락에 자칫 빠져들게 한다. 목까지 물속에 잠겨서도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어 갈증으로 신음해야 하는 탄탈로스나 손에 닿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해버려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마이더스의 비극이 욕망의 실체를 설명한다.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이즈음의 세태는 물물교환을 대신하던 원래의 돈의 효용에서 멀어진 모습 속에, 그러한 비극의 그림자가 짙다. 선물先物이니 펀드니 하여 실체도 없는 것을 가지고 순전히 숫자놀음에 의한 불로소득의 무한증식이 가능하다. 세상에 생산과 노동이 없는 재화의 회전에 의한 거대한 투기장이 된 오늘의 관점에서는, 지난날 유럽 전역에서 악명을 떨치던 유대인들의 고리대금업은 오히려 소박하기까지 하다. 앞으로도 간판이나 형태만을 바꾼 금융의 농간은 주기적으로 비슷하게 변형 복제되어 반복될 것이다.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 사태처럼 현대인의 생활 깊숙이 침투하여 일상을 압박할 시대의 회오리는 다시 또 어떤 이름으로 닥칠 것인가.
마하트마 간디가 손수 물레질을 하며 자급자족이야말로 생존의 출구라고 인도의 백성을 설득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로 돌아가 산속에 숨지 않을 바에야 초연하게 체재 밖에 서 있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기부문화를 선도하는 온정적 자본주의 같은 말들이 그럴싸하게 들린다. 그래도 우리가 누리는 편리와 안락의 대가라 할, 이미 만연한 돈의 독성을 제거하기에는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돈이 행복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는 대부분의 문제가 돈으로부터 비롯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돈이 너무 없으면 삶이 비참하다. 너무 넘치면 인간이 실종한다.
"가난은 슬프지만, 탐욕에는 사랑이 없어." 박경리의 탄식이다.
혼즐과 베프 사이 / 서 숙
혼자 먹으려고 그럴듯한 요리를 하여 예쁜 그릇에 담아 테이블 세팅을 한 기억이 내겐 없다. 그런 준비는 언제나 타인과 같이하려 할 때였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다르다. 혼자 밥 먹고(혼밥) 혼자 술 마시고(혼술) 혼자 놀고(혼놀) 혼자 영화 보고(혼영) 혼자 여행하고(혼행)…. 혼자 즐기는 ‘혼즐’이 시대의 흐름을 타고 있다. 홀로 자신만을 위한 쿠킹을 하며 즐겁다는 것이다. 찻집이나 식당에는 탁자가 벽이나 창에 붙어 있어서 혼자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부쩍 많아졌다. 소위 혼밥족이 늘어나는 추세를 반영한다.
사람들은 점점 타인과 생활을 나누는 것을 불편해한다. 자신의 공간에 남의 숨결, 남의 자취를 남기는 것은 싫다.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싶다. 간섭이나 구속은 질색이다. 혼자 잠을 자고 혼자 TV를 본다. 가족을 만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외로움은 필연이지만 견딜만하다. 자기 일상은 자기가 해낼 수 있도록 편리해진 세상 덕분에 홀로 살아가는 일이 그다지 문제가 안 되므로 기꺼이 고독을 찾아, 독립된 삶을 추구한다. 사회는 이렇게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혼자 사는 즐거움」의 저자 사라 밴 브레스낙은 현대인들의 심리를 가장 잘 아는 작가 중의 한 명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다. 그녀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며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한다. 혼자 산다고 해도 세상에서는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고 그 가운데 고유한 자신만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이렇듯 자발적으로 고독을 껴안으려는 혼놀족도 있지만 좁은 공간에 갇혀 근근이 끼니를 때워야 하는 비자발적 혼밥족도 있다. 경제적으로 파탄의 지경에 이른 사람들은 가족이 한 지붕 아래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기가 불가능할뿐더러 생계가 막연한 나머지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도생해야 한다. 고시원 동네의 원룸에는 생존이 급급할 뿐 미래를 저당 잡힌 사람들이 싸구려 밥집에서 혹은 열악한 혼밥으로 민생고를 해결한다. 이래저래 혼밥의 의미는 결국은 혼자 꾸려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재래의 가족관계가 붕괴하는 현상을 대변하므로 ‘혼밥’이라는 말은 처지가 제각각인 현대인들을 두루 포괄하여 널리 공통분모를 이룬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매우 끈끈한 혈연사회 안에 있다고 여겼는데 가족제도는 균열되어 이렇듯 어이없게 단시일에 그 종말로 가고 있는 듯하다. TV의 홈드라마가 보여주는 대가족의 설정은 그러한 가족의 해체에 대한 애석함의 발로로써 흘러가 버린 것에 대해 마지막 조의를 표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결혼제도의 지속성과 그에 따른 군집생활의 필요는 그 시효가 언제까지일까. 프랑스 사람에게 결혼 대신 동거는 이제 일반적이다. 외로움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기 싫지만 언제라도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열린 미래를 지니겠다는 의미다. 재래식 가족제도가 해체되는 혼즐의 연장선상에 결혼을 졸업한다는 졸혼과 미혼모를 놓을 수 있다. 노년에 이혼하지 않지만 결혼생활에서 벗어나 별거하며 각자 자유롭게 살기를 택하는 졸혼은 남녀 공히 해방구가 될 수도 있다. 통계청은 인구센서스 항목에 미혼모와 미혼부를 추가했다. 결혼과 상관없이 아이를 낳아서 혼자 기르는 게 행복하다는 생각이 확산되면 결손가정이라는 편파적 잣대가 없어지고 나아가 저출산 해소에 다소간 도움이 될 수 있다.
1인 가구가 늘면서 그들을 대상으로 솔로 이코노미라고 하는 소비시장이 커지는 중이다. 싱글슈머(single + consumer = singlesumer 1인 가구 소비자)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혼자 살다 보니 가구 등 살림살이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 간소화와 소량화, 일회성 물품이 키워드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일이나 장례를 집 밖에서 치르는 일은 큰 흉이 잡히는 일이었다. 아마도 장례식장의 일반화는 가족에서 개인으로의 가족해체라는 급격한 파편화의 조짐이었던 것 같다. 결혼도 환갑도 마을잔치였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제사도 사라지는 추세이고 아직은 명절이면 밀리는 귀경 차량을 볼 수 있지만 그런 행차도 슬그머니 줄어드는 추세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하고 혼자가 편하다고, 자유롭고 속박도 없다고 하지만 혼밥이나 혼술의 이유는 함께할 사람이 없어서 이기도 하다. 홀로서기는 가뿐하긴 한데 간헐적으로 찾아드는 외로움이 문제다. 혼자 있고 싶은데 외롭지는 않고 싶다는 이율배반으로 같이 술을 마시고 대화를 나눌 친구가 필요하다. 피상적 인간관계가 허전한 차에 절친한 친구를 줄여서 ‘절친’으로 부르고 베스트 프렌드를 줄여서 ‘베프’라고 부르며 진한 관계를 맺고 싶다. 그러므로 줄임말의 세상에서 혼밥의 대상에 베프가 있다. 그러나 혈연 대신에 들어앉은 베프, 그 연결고리는 허약하다.
싱글 라이프, 의지할 데 없는 망망대해의 돛단배 신세, 각자 외롭게 떠돌아다닌다. 자발적이건 비자발적이건 앞으로는 독거가 보편적인 주거형태가 될 것이다. 혼밥과 혼술 속에 살다고 자력으로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면 요양원에서 얼마간 머물고 장례식장에서 생을 마감하는 현대인의 삶이 스산하게 여겨져도 시류는 어쩔 수가 없다. 까딱하면 독거노인이 되어 고독사를 하거나 집도 돈도 잃고 행려병자의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100세 시대, 고령화 사회의 풍경을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