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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밭 소묘 / 숟가락 ㅡ 최 장 순

장대명화 2024. 10. 27. 03:20

                             연 밭 소묘 / 최 장 순

 

먼 가로수 소실점이 숨긴 길처럼, 내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사는 일 또한 재미없다 싶을 때도 있다. 그런 날이면 걸음은 자연스럽게 연 밭으로 향한다.

올여름 유난히 뜨거웠던 마음이었다. 흙탕물처럼 흐려져 바닥이 보이지 않을 것도 같았다. 어느새 달라진 계절이 이곳까지 당도했을까. 만평 연 밭길을 걷고 있으려니 흐린 마음의 바닥이 조금씩 보이는 것도 같다.

연 밭이 누런빛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가을은 기도의 계절, 여름내 발갛게 밝힌 등을 거의 소등한 연 밭은 온통 기도처로 변해있다. 무엇이 저토록 간절할까. 연밥의 무거운 꽃대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갈색으로 타들어가는 얼굴들, 밤낮으로 읊조리던 기도 소리에 성대가 한껏 부어올랐을 연대, 죽으면 죽으리라, 모습마저 결연하다.

몇 발짝 더 가까이 연 밭을 들여다본다. 관망하듯 바라본 기도 모습과는 달리. 그곳은 거대한 인간 세상이다. 가득 고인 신비 속으로 점점 마음이 끌려들어 간다. 내 안의 뜨거움도 조금씩 식어간다. 평화로움이 밀려온다​.

"에, 에, 주민 여러분께 알려들립니다."

발음이 세련되지 못한 이장의 가을 소식이 녹​슨 마이크를 닮은 연밥을 통해 흘러나온다. 그 어눌한 발성을 바로잡아 주려는 듯 빈 꽃대에 앉은 고추잠자리가 꽁무니를 들썩거린다. 어느 대목에서 쉼표를 찍어야 하는지, 어느 대목을 강조해야 하는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뙤록뙤록 눈망울을 굴린다. 보이는 나와 속에 숨은 나와의 갈등은 다 잊어버리라고, 땀 흘린 만큼 수확도 크리라고 가만히 들려주는 가을의 소리들, 여러 마이크의 소리가 잡음으로 들리기는커녕 한 채널, 한마음으로 듣는 내 안이 고요해진다. 채 익지 않은 푸른 연밥은 우리 집 샤워기, 마침 가볍게 지나가는 비를 틀어 남은 미열에 쏴아, 들이붓는다.

샤워기는 한줌 늦더위마저 지우고 비를 잠갔다. 연잎으로 튄 물방울들이 어느새 찾아든 성미 급한 햇살에 점점 박힌 보석으로 반짝거린다. 이파리에 고인 물이 수정처럼 맑다. 수정 속에 들어앉은 농축된 쪽빛, 잠시 고개 들어 올려다보는 쪽빛 하늘도 만평이다.

이곳만큼 좋은 집터도 없다고, 왕거미가 집 한 채씩 지어놓았다. 이쪽 연대와 저쪽 연대가 기둥 역할을 하는지 밑줄을 긋듯 거미줄을 쳐놓았다. 그것도 불안한지 보와 도리와 종도리를 얹듯 몇 겹의 줄을 왕복시켜놓았다. 그리고 공중에 마련해 놓은 방사형 올가미, 단기 매매차익은 물론 특별한 전망을 프리미엄으로 얹어준다고 마이크를 빌어 소문을 냈을 것이다. 그 다디단 소문을 덥석 물은 하루살이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을 것이다. 연대와 연대 사이 한 겹 한 겹 하늘을 옥죈 포위망, 단숨에 공중으로 뛰어오르려는 야망이다. 낚아챈 거미집을 보며 어느 가장의 사연을 오버랩한다.

불길함 한 무리가 먹구름처럼 몰려오던 그날, 크레인 소리는 멎고 하늘은 깜깜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날 신문 하단에는 건축조합장의 사기 사건이 실렸다고 했다. 그동안 고생한 것 다 잊고 떵떵거리며 살겠다고 개미 손들이 모은 돈으로 지은 집, 그러나 공중에 박은 무수한 못은 금세 녹이 슬었고 욕망은 끝내 기둥을 세우지 못했다고 그는 말했었다.

지금 저 거미집이 그렇다. 바람 한 줄 스치기만 해도 위태로워 보인다. 그러나 거미의 쪽에서 보면 단단히 욕망을 뻗은​ 집이다. 줄에 걸린 하루살이들은 이미 목숨이 끊겼는지 미동도 없다. 뒷면으로 돌아가 살펴본다. 거미는 집 중앙에 거꾸로 매달린 채 부지런히 입만 움직이고 있다. 하루살이의 입장에서 보면 거미집은 욕망의 덫이지만, 거미는 저 집을 짓기까지 여름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까.

저만치 앞서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걱정을 있는 대로 들여놓은 늦된 이도 있다. 늦어도 다 제 걸음 찾아간다는 어른들의 말을 이제야 믿는다. 여기 연 밭에도 그런 늦된 걸음이 있다. 다른 연대들은 누렇게 연밥을 매달았는데, 때늦게 꽃을 피웠다가 이제야 꽃잎을 떨군 연대, 푸른 보료 같은 연잎이 받치고 있는 두 장 꽃잎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미처 여름을 따라가지 못한 고무신 두 짝, 아버지 눈을 뜨게 하려고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의 것일까. 차마 떨어지지 않던 걸음이 자꾸만 뒤돌아보는 듯하다. ​

​연밥에서 떨어진 연자들은 저 컴컴한 진흙탕에 묻힐 것이다. 화사한 웃음을 꽃피우고 벌 나비를 유혹했던 열정의 시간은 모두 지금을 위해 애쓴 순간., 오로지 썩기 위한, 그래서 다시 태어나기​ 위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고요한 연 밭, 오락이 없고 특별한 소리도 없어 재미라곤 하나도 없을 것 같은 곳, 그러나 귀 기울이면 들리는 소리가 있다. 가만 들여다보면 보이는 세상이 있다. 숭숭 뚫린 연밥의 구멍으로 우리들 한 생이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흐르고 있다.

 

                                        숟가락 / 최 장 순

 

 수액 몇 개가 링거대에 달려있었다. 기력을 채우기 위한 링거주사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릴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노인의 목에 호스가 꽂혀있고 그 관으로 가족이 유동식을 흘려 넣고 있었다. 숟가락을 놓은 노인의 삶은 죽음 쪽으로 더 쏠린 듯했다.

숟가락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도구, 객관화된 일상에서 오직 나만을 위한 주체적인 삶의 행위인 숟가락질, 손가락과 손목 관절이 동원되는 하루 세 번의 노동은 그래서 신성할 수밖에 없다. 아니 거룩하다고 해야 마땅할지 모른다. 기력이 떨어질 것 같으면 몸은 수시로 신호를 보내고, 숟가락의 노동은 바로 시작된다. 식은 방을 덥히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때듯, 숟가락질은 몸에 불을 지피는 의식이다. 때맞춰 비워지는 위胃지만, 그것을 채우지 않고서는 다른 즐거움이 생기지 않는다.

직선의 끝에 붙어있는 이파리 한 장, 30그램의 밥과 5그램의 국을 뜰 수 있는 오목한 잎, 그렇다면 아파트 저편 숲은 얼마나 많은 숟가락을 키우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나무는 무엇이 숟가락 역할을 하는 것일까. 숟가락을 닮은 물음표가 나의 호기심 언저리를 서성인다.

어떤 이는 양분을 길어 올리는 나무의 뿌리가, 또 어떤 이는 햇볕이나 빗물을 받는 이파리가 숟가락이라 말할 수 있겠지. 바람과 햇살과 공기를 고루 떠먹는 나무도 우리처럼 스스로의 수저질로 영양을 조절하고 있지 않은가. 햇살이 뜨거우면 바람으로 식혀 먹고, 목마르면 비로 갈증을 달래기도 하면서. 그러나 기후에 따라 달라지는 식사는 가뭄에 목이 타들어 갈 것이고, 장마엔 허천나게 물을 들이켤 것이다. 숟가락질이 어려워진 나무는 어떨까. 언젠가 본 병든 소나무는 종족 번식의 본능이 되살아나는 것인지 평소보다 배나 많은 솔방울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마치 환자가 여러 개의 링거로 연명하듯.

천변의 왜가리와 오리를 보며 숟가락을 떠올린다. 머리에서 목으로 연결된 부분은 히브리 문자 같기도 하고, 숟가락 모양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의 부리가 수저 역할을 하고 있는 셈, 자칭 '움직이는 숟가락'이다. 사람이 사용하는 수저는 그 용도에 따라 다양하듯 오리는 주걱 모양이고, 독수리는 갈고리, 참새는 기호∠와 닮았다. ​반면 벌새는 참새의 그것보다 가늘고 길다. 부리를 물속에 넣고 저으면서 먹잇감을 찾는 저어새는 '숟가락 부리'라는 뜻의 스픈빌(spoonbill)이라 불린다. 음식이 가깝거나 먼 것에 따라 숟가락의 길이가 달라지듯, 새들의 목과 부리도 먹이를 구하기 쉽게 발달했을 것이다.

먹고 일하고 잠드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쉽게 잊고 살았다. 삼시세끼 밥 굶지 않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일이었던가. 때마다 가지 끝에 꽃을 피우는 나무, 봄날 길섶에 피어난 민들레 꽃 한 송이는 얼마나 치열했는가. 물에서 열심히 주걱질 하는 오리의 몸짓은 또 얼마나 경건한 일이었던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작은 새들, 그것이 비록 하루살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방해하거나 훼손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것들만이 할 수 있는 먹는 일의 충직한 시종侍從, 숟가락의 힘은 위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주린 짐승처럼 달려드는 허기는 공포다. 기력이 고갈되어 더 이상 숟가락을 들 수 없을 때, 비로소 허공을 채우려는 욕망이 불가한 허망임을 알게 된다. 이립옹李笠翁은 '조물주로부터 받은 인체의 기관 중에서 아무 쓸모 없는 것이 입과 밥통'이라 했다. 그것이 있어서 먹어야 하는 문제가 복잡해졌다고 한 것은, 먹는 일의 거룩함을 역설적으로 풀어 낸 말이리라. 가사에서 손을 뗀 연로한 어머니는 때마다 밥상에 수저를 놓는 일을 고집하셨다. 자식들에게 손수 밥을 챙겨주지는 못하지만, 그 거룩한 일을 숟가락을 놓는 것으로 대신하고 싶은 간절함이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

어떤 음식도 너그러이 떠안는 포용은 숟가락의 미덕이다. 음식을 찍는 포크나 집는 젓가락과 달리 따뜻함과 정성을 담아낸다. 병든 사람을 치료한다는 것은 다시 숟가락을 들 수 있는 힘을 회복시켜주는 일, 옛사람들이 숟가락을 무덤까지 가져간 것은 죽음이 삶의 종착점이 아니라 삶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살아서 받는 밥상이나 사후에 받는 제사상이나 수저와 저분이 놓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늘 제 수저를 소지하는 이들이 있다. 정갈하게 포장지로 씌운 음식점의 수저마저도 믿지 못한다는 그들, 수많은 입을 맛보았을 공용의 수저는 내 것이 아니어서 나만을 위한 식사가 아니라는 이유에서 일 것이다. 야전 생활에 익숙한 병사들은 숟가락을 늘 군복 앞주머니에 지닌다. '총은 잃어버려도 숟가락은 잃어버리지 말라'는 농감처럼 수저는 몸의 분신인 셈이다. 여든여덟 번의 일손으로 짓는다는 쌀농사, 황송한 밥상 앞에서 누군들 공순히 수저를 집지 않을 수 있으랴. 먹는 일의 경건함은 숟가락을 듦과 동시에 가지는 마음가짐이다. 그래서였을까. 최고의 보시布施는 상대의 손을 잡아끌어 숟가락을 쥐여주는 것이었다. 음식을 깨작거리면 '복 달아 난다'고 어른들이 불호령을 내린 것도 그 때문이다.

상추에 밥을 얹고 고추장을 찍은 삼겹살 한 점을 보태 큼직하게 쌈을 싼다. 두 손으로 움켜쥐고 맛나게 먹는 순간에도 누군가는 쓸쓸히 숟가락을 놓고 있을 것이다. 밥통을 채우는 즐거움과 그것을 채울 수 없는 슬픔을 지켜보는 숟가락, 철이 든다는 것은 그 작은 숟가락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인지를 알아가는 것이리라.

오늘도 밥상 앞에서 공손히 숟가락을 집는다. 아니, 숟가락을 모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