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과 공모전 수필 / 박 양 근
읽고 싶은 수필과 공모전 수필 / 박 양 근
좋은 수필의 재정의
아날로그 시대에는 문인들이 글의 힘을 가졌었다. 디지털시대에 접어들면서 그 소유권은 스마트폰을 터치하는 일반시민에게 옮겨졌다. IP라는 접속인자를 가진 SNS세대가 그 전위병이 되었다. 이 변화는 전통 문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불쾌한 현실로 보인다. “아는 힘”과 “알리는 힘”을 가진 신지식인들이 글쓰기를 주도하면서 ‘말 글’을 쓸 줄 모르거나 생생한 생활지식을 갖지 못한 문인은 더 이상 ‘글의 힘’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전문직, 스포츠맨, 방송인, 탤런트, 오지 탐험가들이 쓴 산문이 인기를 누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즈음의 독자들은 왜 수필이 재미없다고 말한다 신춘문예에서 왜 수필이 밀려나고 있는가. 양적으로 수필이 팽창하고 있음에도 독자와 신춘문예에서 박해아닌 추방되는 이유는 하나다. 모든 문학이 변하는 가운데 수필은 제대로 변하지 않는 탓이다. 레슬리 피들러는 “다른 매개체나 다른 형태로 전환되는 것을 거부하는 문학은 죽는다.”고 예언하였다. 소설이 팩션(허구와 사실의 결합)으로 바뀌고 시가 담시(운율에서 내용으로)로 변하고 있다. 문학의 변화는 돌연변이가 아니라 시대에 따른 진화이다.
그러면 수필은 어떡해야 하는가. 독자가 말하는 재미있는 글은 무엇이며 심사위원들이 말하는 문학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재미있는 수필은 “ㅎㅎ ㅋㅋ”의 글이 아니라 진정 읽고 싶은 글이다. 시간적 부담이 없고, 삼빡하게 마음에 와 닿고, 아삭아삭하게 씹히고, 가슴 어딘가 뜨뜻해지고, 머리가 빵 한번은 뚫리고, 그러면서 빈 마음에 알맞게 무거운 돌 하나 얹어주는 글이다. 문학유희론으로 이런 욕망을 풀이하면 “읽기 쉽고, 재미있고, 이로운”(easy, interesting, and useful) 글이다.
심사위원들이 반기는 수필은 어떤 글인가. 우선 읽을 만해야 한다. 심사위원은 일반 독자가 아니라 까다로운 고급독자들이다. 그들은 격 있는 주제, 신선한 소재, 탄탄한 구성, 완벽한 문장으로 요리한 글을 원한다. 무엇보다 문장이 완벽에 가까워야 한다. 종심에 다다른 작품들은 다른 요건들이 대등하므로 문장을 기준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쯤이면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나 “가볍게 읽도록 쓴” 글이 아니라 디자인부터 포장까지 완벽하게 손이 간 명품이라 할 만하다.
일반적으로 수필은 주제와 제재와 구성과 문장이라는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네 요소가 균형을 이루면 괜찮은 글로 여길 만하다. 괜찮은 글과 살아있는 글은 다르다. 독자는 글뿐만 아니라 생선회도, 채소도, 옷도, 장독도, 숨 쉬는 것을 원한다. 맥혈기를 갖추어야한다는 뜻이다. 팔등신의 몸매를 가진 마네킹을 누가 포옹하려 하는가. 온기의 피가 없기 때문이다 수필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혼이란 거창한 재능이 아니라 성실한 창작정신을 말한다. 난을 치는 경지에 ‘석파란’(石破蘭)이 있다. 석파란은 불운한 시절을 보낼 때의 흥선 대원군이 난을 치던 솜씨를 일컫는데 ‘좌(左)란 삼십 년, 우(右)란 삼십 년’하면서 각고의 훈련을 하니 ‘삼전지묘(三傳至妙)’에 다다랐다고 한다. 난 잎이 세 번 자연스럽게 휘어지도록 붓을 움직인다는 뜻이다. 세 번 휘어지는 멋이 문인과 장인과 예인의 경지라 하겠다.
문학적 소통은 독자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다. 솜씨 좋은 기능을 두고 “예술이야, 예술”이라고 경탄하는 것처럼 독자의 호응을 받으려면 문장의 명의로서 깊게 관찰하고 치밀하게 구상하고 올바르게 쓰고 끈기 있게 퇴고하는 능력을 갖출 것이다.
읽고 싶은 수필작법
독자반응은 ‘본전을 찾았다’가 아니면 ‘손해 봤다’이다. 본전 이상을 하게 하는 수필은 세 종류 중의 하나이다. 첫 번째는 ‘쉽게 잘 쓴 수필’이고, 두 번째는 ‘재미있는 수필’이고 세 번째는 ‘이로운 수필’이다. 이것이 모두 합치면 “읽고 싶은 수필”이 될 수 있다.
(1) '잘 쓴 수필 '과 기법
‘잘 쓴 수필’은 폼 나는 글이다. “폼 난다” 함은 “제멋대로”가 아니라 “제대로” 언어와 문장이 이루어져 읽기 편하다는 의미이다. 웅대한 성경의 시편도 정교한 묘사로 이루어져 있듯이 디테일한 기교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잘 쓴 수필’의 기법은 첫째, 척추처럼 곧고 어긋남이 없되 반전, 역전, 반칙을 적절하게 구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법과 활법이다. 둘째 문장력이다. “일물일어설”을 주창한 플로베르는 “소재 자체에는 미(美)도 추(醜)도 없다. 문체만이 사물을 보기 위한 절대적인 방법”이라 했다. 중언부언은 읽는 즐거움을 떨어뜨린다. 셋째는 신선한 비유법을 적소에 배치한다. 유머와 에피소드를 남용하면 약발이 없다. 수필 기교에 ‘신선한’, ‘적절한’이라는 제한이 붙는 까닭을 곰곰이 생각할 것이다.
(2) ‘재미있는 수필’과 일탈
오늘날 재미는 글의 디저트가 아니다. 재미는 내용과 표현과 관점으로 만들어진다. 재밋거리는 푸념과 수다거리가 아니라 “마수걸이”다. 마수걸이는 남다른 화젯거리를 찾으라는 주문이다. 사람이 개를 무는 것은 개화기 시절의 이야기이다. 적어도, 개가 남자의 주요 부분을 물고 사람이 개의 그곳을 물어 앙갚음한 이야기가 디지털시대의 이야깃감이 된다. 웃기는 이야기로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복수하려는 인간의 폅심을 들추라는 뜻이다. 그럴 때 개라는 텍스트와 ‘물다’라는 콘텐츠의 결합이 재미를 만들어낸다.
수필의 재미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유머와 위트는 인식의 혈(穴)을 뚫고 재치 있는 단어와 생경한 묘사는 읽는 맛이 증폭시키고 낯선 어휘와 은유는 물수제비 같다. 톡톡 튀어 오르는 반동이 독자의 감성을 라드미컬하게 자극한다. 수필을 읽는 재미는 타인의 인생을 훔쳐보는 데 있으므로 사실을 숨기려하지 말라. 독자가 열쇠 구멍에 눈을 대려는 욕망을 나무라서는 안 된다.
(3) ‘이로운 수필’과 육화
‘이로운 수필’은 충실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상식은 식상하다. 사회적 이슈도 유익한 내용이나 개성적인 육화(肉化)가 없으면 좋은 글감이 아니다. 지적 정서적 충격을 던지는 작가의 에스프리가 있으면 심적인 스파크와 텔레파시를 일으킨다. 과장된 “날 체험”에 의존하면 불쾌감만 남긴다. 독자가 “그거 재미있네.”라고 말하지만 짝퉁에 현혹 당하지 않는다.
공모전에 대비하여
공모전에 대해 이야기 하기에 앞서, 나는 문학정신은 순수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좋은 작품을 써서 단 한 명의 독자에게 기쁨을 준다면 ‘나는 행복하다’는 정신이 필요하다. 문학이란 일차적으로는 자신의, 자신을 위한, 자신에 대한 고백이므로 작가가 거룩한 것이다.
한 가지 의문점에서 떠날 수 없다. 제대로 쓰고 있는가라는 불안이다.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가 합평과 등단과 문예공모전과 신춘이다. 캄캄한 바다를 달리는 배는 나침반과 등대와 별자리가 필요하다. 홀로 하는 문학은 진정 암담하므로 객관적 평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공모전은 글쓰기의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어야 한다. 입상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쓰다 보면 입상기회가 온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현재 신문, 문예지, 각종 기관에서 여러 공모전을 운영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입선된 작품은 괜찮다. 심사자들이 정실에 얽매이지 않는 한 좋은 작품을 뽑게 된다. 다만 소수의 심사자가 심사하는 만큼, 취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심사과정은 어떨까. 1차, 2차 심사에서는 주제와 소재와 문장력에서 장점을 갖춘 작품을 고른다. 3차는 글의 특이한 장점을 찾는다. 종심에서는 사소한 흠을 찾는다. 제출 작품 수준이 고른가도 중요한 상대적 기준이 된다. 여러분이 과일을 고를 때 어떤 순서로 고르는가? 과일 알이 굵은가 작은가를 먼저 구별하고, 다음에는 색깔과 향기를 본다. 마지막으로 과일에 흠이 있는가를 살피고 포장도 선별기준으로 삼는다. 입상하고 싶으면 과일가게에서 고객이 어떤 과일을 원할까를 생각해보면 된다.
공모전 준비를 어떻게 하는가. 한 작품을 죽도록 다듬기 보다는 적어도 다섯 편 내외의 준비작이 필요하다. 그것을 어느 정도 정리한 다음, 합평을 통하여 다듬어간다. 그 다음에 가장 잘된 작품을 고른다. 유의할 점은 공모전마다 나름의 선정기준을 가지고 있다. 등단자를 배제하는 공모전도 있고, 공모전의 취지를 고려하는 경우도 있다.
한번 실패하더라도 좌절할 필요가 없다. 작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심사자와 견해가 달랐구나라고 생각해야 한다. 열 번은 좌절한다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도 공모전에서 떨어지면 운수가 나빠서가 아니라 작품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자인하여야 한다. 어머니에게는 못난 자식도 세상에서 가장 잘난 자식으로 보이지만 작품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애정 방식은 정반대이다. 잘난 자식도 어딘가 못나 보인다. 심사위워들은 세상 어디엔가 더 좋은 작품이 있다는 기대를 안고 언제고 떠나려는 욕심장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