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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소리 / 강 지 영

장대명화 2023. 11. 3. 10:09

                                                         까마귀 소리 / 강 지 영

 

 까마귀가 운다. 나도 운다. 듣지 않느니 못한 소리를 귀에 담게 되는 건 아닐까.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손을 휘둘러 새의 잔상을 물린다. 까악 소리가 귀를 지나간다. 아직인가 보다. 내가 아닌 것에 더는 흔들리지 말자던 다짐이 이토록 쉽게 흐트러지다니. 갈 길이 멀다.

 

까마귀 소리를 삼키며 나를 돌아본다. 이런 모습을 꿈꾸지는 않았다. 떠밀리는 게 아닌 끌어가는 삶을 살고 싶었다. 우연이 가져다 준 길이 아닌 내 의지로 만드는 생을 조각하고 싶었다. 뜻을 다질수록 삶은 더 남루해졌다. 꿈은 그만큼 너덜너덜해져 갔다. 하고자 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행운은 아무에게나 허락되는게 아닌 모양이다. 까악. 뻗은 손을 거두지 못하는 내게 까마귀가 속삭인다. 꿈은 이미 사어死語가 되었다고.

 

새까만 울음을 따라 고개를 돌린다. 부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사람 모양 그림자가 있다. 까악, 까악, 깍. 낯선 입에서 나온 음이 고막을 지나간다. 사람이 짐승 소리를 내며 말을 한다. 음성에 덧씌워진 까마귀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되짚어 올라가본다. 언제부터 사람에게서 까마귀 울음을 듣기 시작한 걸까. 새가 인육을 먹어 흉조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였을까. 검은 새가 사람에게 부리를 쪼는 영화를 본 후부터였을까. 그도 아니면 검디검은 그색이 마음에 걸린 그날 부터였을까.

 

까악 소리를 붙들고 검음을 곱씹는다. 눈앞이 까마득해졌던 한날 오후가 나를 관통한다. 내 꿈과 글 쓰는 일과와 내 삶을 비아냥거리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꿈을 가운데 둔 길을 택했다는 이유로, 출퇴근을 반복하는 삶을 벗어나 있다는 것을 구실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진즉에 종말을 고한 소설가라는 사실로 인해 나는 그날 까마귀 부리에 쪼이듯 말에 찍혔다. 내게 부탁을 일삼던 이들이었는데. 내 지난한 실패와 도전과 열의를 잘 아는 근거리 지인을 자처하던 자들이었는데. 광기에 들뜬 혀의 춤은 매서웠다. 저려오는 심장을 문지르며 미소로 답을 대신하고 나오던 길,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지워버린 줄 알았다. 잊은 줄 알았다. 까악 소리가 날선 혀를 놀려대던 얼굴들을 되살려낸다. 작두 탄 무당처럼 무아지경에 빠져 움직이던 입술. 조언의 탈을 쓴 거드름 일색의 말. 걱정을 가장한 위선의 눈. 모든 게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검은 말의 여운은 생각보다 깊었다. 일 년. 가슴에 통증이 일고 숨쉬기가 힘들어지고 불현듯 잠에서 깨어 우는 일상이 꽤 긴 시간 이어졌다. 내 입을 닫게 만드는 비루한 현실이 억울했다. 한 마디 대꾸도 주지 않는 꿈이 야속했다. 즈음하여 까마귀 소리와 목소리가 하나로 들리는 증상이 시작되었다. 말소리에 놀라 귀를 틀어막는 일이 늘고 다가서려는 이들을 경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사람이 흉조와 다를 바 없다고. 인간에게서 검은 새의 울음을 들으며 자문했다. 시류에 맞지 않는 글쓰기라는 유령에 홀려있는 건 아닌지, 이 시대에 과연 꿈이 필요하긴 한 것인지, 이 우물의 끝은 물일지 벽일지를.

 

바위 밀어 올리기를 반복해야 하는 시시포스처럼 내가 나에게 내린 전업 작가라는 지령도 가볍지는 않을 터. 다시 질문을 던진다. 창문으로 금빛 햇살이 쏟아져 내리던, 첫 작품을 끝낸 그날로 돌아간다면 과연 다른 선택을 할 것인가. 까악. 펜을 쥐고 견딘 날들을 모욕하지 말라는 듯 까마귀가 요란스레 운다. 까만 새가 그날 내가 그들에게 하지 못한 말을 대신 전한다. 조언은 ‘은, 는, 이, 가’를 제대로 쓸 수 있을 만큼 글을 써본 후에, 펜 하나만 쥐고 벼랑 끝에 서 본 후에, 꿈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본 후에나 하라고.

 

혀가 짧은 사람도 혀가 긴 사람도 쳇바퀴 같은 일상과 관계의 불편, 밥벌이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 너도 나도 생이라는 과제를 부여받은 미약한 인간에 불과하다. 어쩌면 그날 오후 그들이 필요로 했던 건 달아오른 혀의 열기를 덜어낼 너른 등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모욕감을 느낀 내가 마주했던 어둠은 흉조를 대표하는 색으로서의 흑黑이 아니었다. 내 분투를 비웃는 세상을 대면하던 그때 내 눈에 담긴 것은 현玄이었다. 너무 눈부셔 보이지 않은 것뿐 노자가 말하는 지극히 검어 투명해 보이기까지 하는 바로 그 검음玄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까악.

귓가의 까마귀를 물린다. 언어의 무게를 감당해야 할 때를 마주하게 되면 침묵과 어둠 속에 있던 내가 필요로 했던 것이 따뜻한 손바닥이었음을 상기하리라. 듣기 좋은 새소리로 삶에 지친 이들의 어깨를 토닥여 주리라. 흉조니 길조니 할 것 없이 살아있는 모든 것이 삶을 노래하도록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