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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의자 / 이 정 림

장대명화 2023. 9. 21. 10:23

                                                  당신의 의자 / 이 정 림

 

우리 집에는 의자가 많다. 혼자 앉는 의자, 둘이 앉는 벤치, 셋이 앉는 소파…. 언제부터 우리 집에 그렇게 의자가 많이 생겼는지 알 수가 없다. 분명 소용이 있어서 사들였을 텐데, 정작 우리 집에는 한 개만 있으면 족하지 않던가.

사람들이 몰려오는 날이면 그것도 모자라 바닥에 내려앉아야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을 때는 그 비어 있는 의자들이 하품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 모습이 안돼 보여, 심심한 촌로 뒷짐 지고 마을 가듯, 이 의자 저 의자에 가서 그냥 등 기대고 앉아 본다.

의자의 사명은 누구를 앉히는 것이다. 아무도 앉지 않은 의자는 그냥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 비어 있는 의자에 앉힐 사람들을 돌려가며 초대를 해 보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그 빈 의자에 앉혀 놓고 밤이 깊도록 도란도란 대화를 나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누구를 초대할까. 제일 먼저 떠오르는 분이 있다. 남보다 더 낯선 우리 ‘아버지’--.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는 일조차 나로서는 참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내가 세 살 때 돌아가셨으니, 나는 아버지의 얼굴도, 음성도, 체취도 알 리가 없다. 다만 남에게서 전해 듣는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실감나지 않는 판타지 소설처럼 귓가에 어려 있을 뿐이다.

아버지는 일찍이 개명하시어 외국 친구들도 많았지만, 그보다 더 사고(思考)가 자유로웠던 분인 것 같다. 그 단적인 예가 자식들의 이름을 항렬에 따라 짓지 않고 당신이 선택한 ‘바를 정(正)’ 자를 넣어 파격적으로 작명을 하신 것이다. 그래서 막내인 내 이름을 ‘말자’나 ‘끝순’이 같은 전형적인 여자 아이 이름이 아닌 ‘수풀 림(林)’ 자를 넣어 지어 주셨다. 그러면서 음(音)이 같다 하여 이다음에 선생님이 되면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다른 글자도 아닌 ‘바를 정’ 자를 자식들의 이름에 넣어주신 건 무슨 뜻이 있었던 것일까. 복이 있되 바른 복을 취하라, 구하되 바르지 않은 것은 탐하지 말라, 구슬도 반듯하게 생긴 것이 더 아름답다, 쇠도 반듯해야 좋은 연장을 만들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시며 자식들에게 ‘바를 정’ 자를 넣어주셨던 것은 아닐까.

나는 아버지가 지어 주신 내 이름을 사랑한다. 그러면서도 이름처럼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이 죄송스럽다. 수풀 속에서 바른길을 찾으라 하셨지만, 아무리 헤매어도 내 앞에 펼쳐진 길은 혼돈의 길이었을 뿐이다. 그 혼돈의 길에서 나는 늘 이름값도 못하는 나 자신을 힐책하곤 했다. 나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그날까지 당신이 지어 주신 이름을 화두로 안고 살아가게 될 것만 같다.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 당신이 앉으실 의자는 우리 집에서 제일 가운데에 있는, 가장 좋은 의자가 될 것이다. 그 의자에 앉아 계시는 아버지를 상상해 본다. 나는 아무래도 요즘 딸들처럼 아버지 앞에서 스스럼없이 응석을 부리지는 못할 것 같다. 아버지가 남겨 주신 유산으로 별 고생 없이 살 수 있었으면서도 당신의 부재는 우리를 늘 허전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영화(榮華)는 당신의 시대에서 끝났지만 그래도 그 풍요로운 추억이 있어 마음이 춥지 않았음을 감사해야 하는데, 나는 여전히 아버지가 낯설고 어렵기만 하다.

가끔 언니가 말했다. 아버지의 불같은 성격을 네가 가장 많이 닮았다고. 아버지는 당신의 성격을 많이 닮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당신은 그 불같은 성격으로 사업을 성공시키셨지만, 나는 그 성격으로 사람들을 많이 떠나보내야 했으니…. 그러나 이젠 그 불같은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 세월이 나를 유순하게 만든 것이다. 그 순리(順理)가 나를 오히려 슬프게 한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리면 당신은 아마 측은히 바라보실 것이다. 자식이 늙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처럼 안쓰러운 것은 없을 테니까.

아버지가 내 집에 오시면 원두를 갈아 커피를 대접하고 싶다. 당신이 원두를 담아두셨던 가지 모양의 나무 그릇을 내가 아직까지 가지고 있음을 아신다면 얼마나 감회가 깊으실까. 또 당신이 출타하셨을 때 손님이 오시면 어린 딸의 손에 들려 명함을 받아오게 한 달마상이 금박으로 그려진 까만 쟁반을 아직까지 내가 갖고 있음을 아신다면 입가에 미소를 지으실까. 당신이 쓰시던 파란 유리 잉크스탠드와 당신이 활을 쏘실 때 엄지손가락에 끼우셨던 쇠뿔 가락지를 내가 가보처럼 아직도 가지고 있음을 아신다면 그 옛날 당신의 영화와 낭만을 어제인 양 추억하시지 않을까.

함께 있다는 것과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의 차이는 어떤 것일까. 마음이 있으면 시공을 떠나 이렇게 함께할 수 있는 것을. 젊은 날에는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리 있는 것 같아 외로워하고 안타까워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제야 나는 함께 있는 법을 안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을 가슴속에 품고 사는 한, 이렇게 늘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오늘도 빈 의자를 바라보며 당신에게 초대장을 쓴다. 이번엔 당신이 오실 차례니까.

 

 

                                  태양이 없는 그림 / 이 정 림

                                                                                                             

 얼룩동사리는 매우 부성애(父性愛)가 강한 민물고기다. 흔히 동물의 세계에서는 수놈보다 암놈이 새끼에 대한 사랑이 깊은 법인데, 이 물고기는 의외로 그 반대다.

 얼룩동사리는 수놈이 먼저 집을 짓고 암놈을 기다린다. 집이라야 수초(水草)로 엉성하게 고치처럼 얽은 것인데, 그 곳은 신혼의 보금자리가 아니라 암놈의 알을 받기 위한 둥지인 셈이다.

 집을 다 지으면, 부지런히 지나가는 암놈들을 유혹한다. 물고기들도 제 눈에 들지 않으면 응할 생각이 없는지 어떤 놈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힁허케 가 버린다. 또 어떤 놈은 마지못해 응하는 아가씨처럼 도도한 몸짓으로 집을 한바퀴 둘러본다. 장만한 아파트가 몇 평이나 되나 알아보려는 것이 아니라, 알을 낳아도 될 만큼 안전한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 안전도 검사에서 불합격을 놓은 암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리고, 다행히 집이 마음에 든 놈은 거기에다 산란(産卵)을 한다. 그러고 나서는 지체 없이 떠나 버린다. 어미라고 해서 모두 모성애가 강한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수놈은 떠나 버린 암놈에 대해서는 미련이 없다. 오직 종종 보존에만 관심이 있어서 새끼가 부화될 때까지 지성으로 돌본다. 지느러미를 흔들어 산소를 공급해 주기도 하고, 외적이 나타나면 용감하게 싸워 물리치기도 한다. 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덤벼드는 모습은 정말 아버지같이 믿음직스럽고 감동적이다.

 수놈은 스무 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오로지 알이 부화되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다가 그 숱한 알에서 새끼들이 터져 나오고, 하나 둘 알둥지를 떠나고 나면, 마침내 기진하여 숨을 거둔다.

 텅 빈 알둥지 앞에서 눈을 껌벅이며 죽어가는 얼룩동사리의 모습을 화면에서 보다가, 그만 가슴이 뭉클해 왔다. 자식을 위해 끝없이 헌신하다가 생을 마치는 아버지들의 모습을 거기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이 땅의 아버지들은 작고 고독한 존재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 옛날, 한 집안을 떵떵 울리던 위엄은 사라지고, 가정 한 귀퉁이에서 조그맣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아버지. 그 아버지들이 요즘 바깥에서 배회하고 있다. 아버지의 위엄은 땅에 떨어졌어도 여전히 생계의 책임을 혼자 짊어져야 했던 고달픈 아버지들이 회사에서 무더기로 감원을 당한 것이다.

 아버지들은 그러고 싶어도 감히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걱정스러워하는 아내의 눈길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고,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릴 것 같은 아이들의 얼굴을 차마 마주 보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아니면 지하도 맨바닥에서 신문지 한 장 깔고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이제까지 달려온 숨가쁜 세월, 그것은 누구를 위해서였던가.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였다면, 그들은 아마 일찌감치 그 고된 삶의 짐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한 여자를 만나 아이 낳고 기르면서, 그들을 위해 사는 것이 평범한 사람이 가는 정도(正道)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를 가기 위해 자신은 기꺼이 모든 것을 버렸다. 하고 싶은 일도, 뱉고 싶은 말도, 모두 버리고 참았다. 밥값을 내지 않으려고 제일 늦게 구두끈을 매는 좀생원이 되었어도, 그런 비굴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상사(上司)의 모욕적인 말도 저녁때 한잔 술로 풀어 내면 귀는 다시 깨끗해졌다. 내 가정만 지킬 수 있다면, 내 아이들만 잘 기를 수 있다면 아비의 자존심 따위가 무슨 대수랴 싶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아버지들이 의욕을 상실했다. 날로 야위어 가는 것은 육체뿐만이 아니다. 육체를 지탱케 해주는 것은 의욕이요 희망인데, 그것이 없는 사람에게 찾아드는 것은 무기력일 뿐이다.

 무기력은 정신을 갉아먹는 좀벌레와 같다. 이젠 더 이상 체면이라는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무료배급소에서 밥을 타 먹는 두 손도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생존만이 절체 절명의 과제일 뿐이다.

 요즘 아이들의 그림에서는 태양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태양은 아버지를 상징하는데, 그려도 귀퉁이에 조그맣게 그린다고들 한다.

 어린 시절, 우리는 도화지에 이글거리는 태양을 많이 그렸었다. 그때 아버지들은 어린이들의 우상이었다. 아이들이 다시 도화지에 커다랗게 태양을 그릴 날은 언제 올 것인가.

 지금 서울의 아스팔트 위에서는 얼룩동사리들이 숨져 가고 있다. 맨바닥에 누워 신문지로 얼굴을 가리고 잠들어 있는 그 모습에서, 나는 이 시대의 불운한 태양들을 본다.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