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미소와 눈빛만으로 / 전규태
그 미소와 눈빛만으로 / 전규태
웃음처럼 즐거운 인생은 없다. 늘 미소를 띠고 있는 사람을 보면 보는 이의 마음도 따라서 훈훈해지고 즐거워진다.
홍소(哄笑)니, 폭소(爆笑)니, 고소(苦笑)니 하여 웃음의 종류도 가지가지이지만 이 미소만큼 흐믓하고 인상적인 웃음은 또 없으리라.
그런데 예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호탕한 너털웃음은 장부다운 기개를 보이는 것이라고 예찬해 왔지만, 차분한 미소는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를 않아 온 것 같다. 딴은 피식피식 잘 웃는 (미소 짓는)사람을 두고 '싱거운 사람'이라고들 일러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미소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 머리 속에는 순간 '미소 짓는' 한 여인의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아른거린다.
내가 신문기자 시절의 얘기다. 물론 미혼이었다.
내가 출입하던 곳은 한국은행과 재무부였다.
한창 취재하느라고 서성거리고 있는데, 그동안 교분이 두터웠던 한 부장이 나를 살며시 부르더니 새로 입행한 모 여행원이 몹시 총명한데, 한 번 가보고 마음에 들거든 사귀어 보라고 귓속말로 일러 주었다. 실없는 소리를 할 분이 아닌지라 농담이 아닌 줄은 짐짓 알았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뚱딴지같은 소리라고 웃어 넘겨 버렸으나 어딘지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듯한 공허감을 느껴 오던 때였으므로 그 길로 L부장이 가리켜 주던 방에 들러 보았다.
L씨가 말한 그 자리에 앉은 그 여행원은 호수 같이 맑은 눈의 소유자였다.
문득 눈이 마주쳤다. 나는 처음 눈여겨보았지만, 그녀는 나를 보더니 마치 구면인 듯 가벼운 미소를 지어 주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그녀는 이미 여러 차례 나를 봤다고 한다) 그리고는 갑자기 겸연쩍은지 얼굴을 돌려 옆에 앉아 있는 동료와 말을 건네면서 줄곧 다정스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다정한 미소와 눈길이 결코 교태에 흐르지 않고 늘 교양의 향기가 풍겨지는 것이었다.
나는 지남철에 걸린 못처럼 그저 저립하고 있었다.
정말 두고두고 잊지 못할 호젓한 미소와 눈길이었다.
뭐 얼굴이 살뜰하게 예쁘다거나 몸맵시가 알뜰해서가 아니었다.
그 차분한 미소는 그녀의 마음속 깊숙이 담긴 그 무엇을 느끼게 해주었다.
망막한 사막을 거닐고 있던 목마른 나그네가 뜻하지 않았던 곳에서 시원한 오아시스를 발견할 때의 기쁨이라고나 할까….
말이란 입 밖에 한 번 나와버리면 어휘 자체가 지닌 표현 한도를 넘는 효과를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미소만을 지으면서 그 미소 하나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의 쾌락을 느끼게 하는 매력ㅡ 이것이 미소의 미덕(美德)이 아닐까.
그 후 그녀를 몇 번 만났지만 그녀는 퍽 과묵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그녀가 어디로인가 먼 곳으로 전근 갔다는 소리를 풍문에 들었다. 아름다움은 그렇게 빨리 사라지는 것인지… 거리에서, 찻집에서, 무섭게 화장하는 웃지 않는 여자들을 만날 때마다 그녀의 그 다소곳한 눈빛과 미소는 나를 그리움에 떨게 한다.
ㅡ전규태 전 연세대 교수. 시인 문학평론가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