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우수 수필

사진과 수필 /이 정 림

장대명화 2023. 3. 12. 07:52

                                       사진과 수필 / 이 정 림 

얼굴이 못생겨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진에 대한 열등감은 초등학교 때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청년들이 유행처럼 카메라에 취미를 불이던 시절, 큰오빠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창 사진에 열을 올린 때가 있었다. 어느 날, 오빠가 작은언니를 꽃밭에 앉혀 놓고 사진을 찍어 주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오빠에게는 내 존재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듯 언니에게만 열중하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면서 나는 열등감과 언니에 대한 질투심으로 속을 끓였다.

그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언니는 몸매는 가냘팠지만 키는 다 자라서 제법 처녀티가 난 데다가, 누가 보아도 예쁘다고 할 만큼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오빠는 어쩌다가 언니와 나를 나란히 세워 놓고 사진을 찍어 줄 때도 있었는데, 나중에 보면 나는 통통한 얼굴에 웃는지 우는지 모를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데에 반해, 언니는 자신만만하게 예쁜 미소를 띠고 있으니, 사진에 대한 내 열등감은 점점 더해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사진이라면 자신 없어 하던 내가 요즘은 카메라 앞에 자주 선다. 글을 청탁할 때면 반드시 사진을 동봉하라고 하니 독사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 사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은언니가 찍어 주었다. 자기 말에 의하면, 찍는 사람이 피사체에 대해 애정을 품고 있어야만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찍는 사람이 임의로워야 찍히는 사람의 표정이 경직되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언니가 찍어 주는 사진은 비교적 표정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요즘은 취미로 할 영 기술까지 배운 후배 문인 덕분에 좋은 사진을 많이 얻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 좋은 카메라에 모델도 좋았다면 더 괜찮은 작품을 건질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사진을 많이 '찍히다' 보니, 나도 자연히 사진 찍는 일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의 인물 사진을 찍어 주게 되었는데, 그들은 아마추어도 못 되는 내 솜씨를 가지고 칭찬도 해 주고 격려도 해 주면서 격 좋아들 한다. 카메라를 만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틈이 나면 사진 전시회장을 찾는다. 사진을 볼 적마다 생각하게 되는 것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비단 문학작품만이 아니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이다. 어떤 사진 앞에서는, 어떻게 이런 구도를 잡았을까. 혼자 감탄할 때가 많다. 그러면서 작가의 탁월한 미의식(美意識)이 부러워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기도 한다.

어느 사진 촬영대회의 심사평을 읽고 나서는, 사진과 수필에는 공통점이 매우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심사평에는

“아마추어 사진의 공통된 약점은 주제가 산만하고 호소력이 약하며 복잡하다는 것이다. 되도록 단순화하며 한 가지만을 집중적으로 호소해야만 한다.”

는 구결이 있었다. 수필도 마찬가지 아닌가. 작품 이 안고 있는 주제가 흐려지지 않도록 곁가지를 쳐내야 하는데, 초심자일수록 군더더기를 잘라 내지 못한다. 군더더기를 잘라 낼 줄 알게 되면 비로소 문장에 눈이 떴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또 이런 말도 있었다.

“보이는 사실의 재현에만 급급하지 말고 자신의 내면세계와 융합하여 재구성해야만 된다.”

이것은 수필에서는 주제 의식에 해당하는 말이다. 소재의 나열에만 그치지 말고, 거기에 작자의 철학과 사상을 담아야만 비로소 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사진에서도 기술만 있고 주제 의식이 없으면 작품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모양이다.

“언제나 좋은 작품의 비결은 대상에 대한 직감적인 발견 결과 카메라 포지션과 카메라 앵글의 무궁한 변화에 의존한다.”

이것은 수필로 본다면 작가 의식에 비유될 수 있는 말일 것 같다. 너무도 낯익은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발견해 내는 눈, 그것은 깨어 있는 의식이다. 또한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은 평소 가진 문제의식에 달려 있다. 아무리 소재가 평범하더라도 남다른 시각으로 접근한다면 글은 결코 평범해질 수가 없다.

최근에 찍은 어떤 사진에서, 나는 작가가 흥분하면 좋은 작품을 얻을 수 없다는 공통성을 또 발견하게 되었다. 너무도 봄꽃들이 화사해서 찍는 내가 그만 흥분해 버렸더니, 그것은 평범한 기념사진이 되고 말았다. 카메라 앵글을 맞추는 미적 감각 도 이성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처럼, 수필에서도 감정을 여과시켜야 하지 않는가.

사진과 수필에는 많은 공통성이 있으나 크게 다른 점도 있다. 그것은 사진에서는 '퇴고'를 할 수 없다. 수필은 활자화되기 전에 수없이 되고를 할 수 있어 도, 사진은 한 번 셔터를 눌러 버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사진의 트리밍은 활자화된 글을 고치는 것과 같은 사후의 수정이지 사전의 그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인화 된 사진을 들여다볼 적마다. 내가 구도했던 것과는 다르게 나온 모습을 보고 실망을 한다. 그리고 발표된 수필을 대할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내 역량의 한계를 여러 번 확인하게 된다.

즐거워서 갖게 된 취미인데, 사진은 요즘 내게 스트레스를 준다. 기초적인 공부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좋은 사진이 나올 리 없건만, 나는 찍혀져 나오는 사진을 대할 때마다 회의를 느끼게 된다.

사진이나 수필이나 모르는 사람에게는 둘 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진사는 흔해도 사진작가는 많지 않은 것처럼, 수필 쓰는 사람은 많아도 진정한 수필가는 드물다.

사진에 작품성을 살리느냐 못 살리느냐 하는 것은, 좋은 카메라를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에 달린 것이 아닌 것처럼, 좋은 수필을 쓰느냐 못 쓰느냐 하는 것은 작가가 얼마나 문단 정치를 잘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린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그런데도 나는 이따금 카메라 타령을 하고, 문단 활동에 능한 사람의 출세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볼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