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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구경에도 윤리가 있다. 외3편 /김 서 령

장대명화 2023. 2. 28. 10:11

     

                               꽃구경에도 윤리가 있다 / 김 서 령

 

20년 넘게 내가 사는 뜰에는 목련이 피었다. 해마다 꽃 피는 전과정을 지켜봤다. 책상 앞 바로 눈높이에 목련이 있어 눈을 들면 절로 목련과 마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울이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차츰 볕이 달궈지는 어느 날, 가슴 안쪽에서 문득 수상한 동계가 감지되는 어느 날, 목련의 첫 꽃은 툭 소리를 내며 터진다. 나는 흥분해서 4월3일 혹은 4월 6일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이날을 기록했다.

20대엔 그저 좋기만 했다. 잎 없는 가지에서 커다란 목련을 불러내는 주체가 뭔지도 몰랐다. 무뚝뚝한 회색 가지 안에서 무심코 꽃이 툭 튀어 나오는 줄만 알았다. 내 기분이 좋으면 팝콘처럼 즐겁게 터지는군 싶었고, 내 심사가 사나우면 뭐가 좋은 세상이라고 철없이도 피어대는군 싶었다.

내 아니 스물여섯에서 서른여섯에서 마흔여섯이 됐다. 목련은 해마다 피었다.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열매가 아니라 꽃만 피우면 임무 끝이니 게으름을 피울 핑계가 없었을까. 그새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두 마리가 죽었고 죽은 강아지를 나무 아래 묻었다. 그래 그런지 꽃은 밥사발보다 커졌다. 요즘 밥 먹는 아잘찮은 밥공기가 아니라 내 어린 날 일꾼 밥을 퍼주던 두터운 사기사발보다 더 컸다는 말이다.

 

​ 해마다 꽃을 내다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개화의 순간을 싱겁거나 실없다고 여기는 마음은 상대적으로 줄어 갔다. 그러다 알게 됐다. 목련은 내가 기록하는 그날이 아니라 석 달 전부터 아니 여섯 달 전부터 이미 꽃을 배고 있었다는 걸. 꽃피는 날은 그 밴 꽃을 날마다 조금씩 키워 드디어 해산하는 날이란 걸. 4월이 아니라 3월 초부터 목련은 매일 기쁨과 고통을 반복하며 제가 만든 세상을 조금씩 들이미는 진통을 시작한다는 것을.

꽃피는 순간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할 수 있을까. 그토록 무표정하고 고집스럽게 추위 속에서 꽃의 아기를 보호하던 겨울 눈, 추하다고 할 만하게 털이 숭숭하고 거칠고 딱딱하던 그 회색껍질이 맨 처음 땅에 툭 떨어지는 소리를 나는 봄마다 책상 앞에 앉아 듣는다. 때로 우박처럼 한꺼번에 두두둑 떨어지기도 한다. 봄밤의 장엄하고 흐드러진 음향이다. 흐드러진 생명의 음향이되 죽음의 음향이다.

생살을 찢으며 아이를 낳아본 어미인 내게, 명백히 이제 죽는구나 싶은 순간을 맛보았던 내게, 양다리 사이로 물컹하며 바닷물 같은 핏덩어리가 빠져나가던 절대 시간을 경험했던 내게 그 소리는 물질이 다른 물질에 부딪치는 객관음향일 수가 없다. 공포와 환희의 그보다 큰 무상감이 둥그렇게 구름 이루던 시간, 그 둥그런 감각이 목련의 겨울눈 깍지가 마당 위로 탁탁 떨어지는 봄날 새벽 내게 서늘하게 다시 찾아온다. 소리 안에 담긴 꽃피우는 놈의 불안과 공포와 환희를 낱낱이 헤아려낼 듯 나는 책상 앞에 곧추 앉아 있다. 우주가 둥그렇게 나와 목련 주변을 성근 원으로 감싼다.

저 목련의 거무튀튀한 겨울눈이 정반대의 빛깔을 제 껍질 안에 숨겨 두고 있다는 것. 그것은 해마다 확인해도 번번이 경악할 만한 반전이다. 설계자의 각본엔 봄이 세상의 명도를 갑자기 높이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꽃잎의 환한 우윳빛이 칙칙하고 지루한 회색을 흔들어 떨구면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게 우연일 리 없다. 이토록 커다란 반전을 기획한 의도가 뭘까. 나를 비롯한 목련을 바라보는 모든 생명, 그들의 가슴을 더 세차게 흔들어 놓기 위해서일 거라고 나는 해석한다. 흔들어서 뭣하냐고? 각자 제 생명을 충분히 만끽하고 땅 위에 넘치도록 번성하라는 것일테지….

봄날의 햇볕과 바람엔, 움직일 줄 아는 길짐승과 날짐승과 곤충들까지 모조리 화들짝 놀라게 하고 싶은 신의 의도가 깃들어 있다. 각자 제 핏줄 속에 소스라쳐 흐르기 시작하는 피톨들의 잉잉대는 소리를 들어보라 세상 꽃들이 모조리 작당을 하는 거다.

아직 실내는 어둡다. 그러나 바깥엔 저만치 봄이 오고 있다. 곧 꽃들이 필 것이다. 아이에게 맨 처음 새 이빨이 돋듯, 잇몸 위에 발갛게 피가 맺히듯, 모든 꽃의 끄트머리엔 조금씩 핏물이 돈다. 꽃은 결국 제 어미나무의 실핏줄을 터뜨리며 핀다. 벌써 아래쪽엔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다.

둔감을 위장하고 있는 저 겨울눈의 깍지는 제 안에 환한 생명을 감춘 채 날마다 조금씩 자란다. 1월에도 이미 입술 그리는 모필보다야 훨씬 컸던 저것이 어느새 우리 아버지 어릴 적 <동몽선습>을 베껴 썼다는 붓만 하게 변했다. 3월이 이윽하면 그중 장한 놈은 추사가 귀양 가는 길에 해남 대흥사에 써서 걸었다는 무량수전을 쓴 모필만 하게 자랄 거다. 이제 나의 봄은 머리 위로 흔들리는 수백 송이 꽃송이 안에만 있지는 않다. 목련나무 아래 가득 널브러진 수천 조각 겨울눈의 누추한 깍지들 속에도 있다.

겨울눈이 움쑥움쑥 자라고 있다. 곧 3월이 오리라. 날마다 커가는 겨울눈을 들여다본 눈이라야 목련의 개화를 즐길 자격이 있다. 흰 타월을 던지듯 뚝뚝 떨어지는 그놈의 처절한 낙화, 그 순간까지 실컷 음미하고 싶다면 지금부터 저 겨울눈과 친해져야 한다. 적어도 그게 꽃구경의 윤리다.

                                                     부엌 / 김 서 령

 어려서는 흙바닥에 물두멍이 있고 두 개의 아궁이에 가마솥과 동솥이 걸려 있는 부엌에서 지은 밥을 먹었다. 큰 솥엔 밥을 하고 작은 솥엔 국을 끓인 후 큰 아궁이에는 된장찌개 냄비를 얹고, 작은 아궁이에는 석쇠를 올려 김을 굽거나 간고등어를 구웠다. 뜨겁고 어둡고 바쁜 부엌이었다. 나는 고작 열세 살에 그 부엌을 떠났다.

 

그 후 내 소유의 부엌을 여러 개 거치면서 밥상을 차렸고 혼인을 했고 아이를 길렀고 나이를 먹었다. 요즘도 나는 여전히 부엌을 서성거리며 밥상을 차린다. 아마 죽기 전까지 언제나 그럴 것이다. 쌀을 불리고 국거리를 다듬고 마늘을 다지고 양파 껍질을 까고 찌고 굽고 튀기고 삶으면서.

 

‘식사를 간단히, 더 간단히, 이루 말할 수 없이 간단히 준비하자. 그리고 거기서 아낀 시간과 에너지는 시를 쓰고, 음악을 듣고, 자연과 대화하고, 친구를 만나는 데 쓰자’라고 주장하는 글을 읽으며 고개를 아무리 끄덕거려도 나는 이미 사과 한두 알, 감자 몇 개, 날 야채 한 바구니로 하는 식사보다 엄마가 옛 부엌에서 하던 온갖 양념들, 무치고 데치고 고아내던 음식 맛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어쩔 수가 없다.

 

생각해 보면 기억나는 숱한 부엌이 있다. 여고 때 살던 안동시 동문동 192번지의 집은 방문 앞 연탄아궁이 위에 지붕을 이은 가건물로 달아서 만든 부엌이 있었다. 구멍이 세 개 뚫린 블록 벽돌로 지은 가건물은 벽 사이로 바람이 숭숭 들이쳤다. 마룻장을 들치면 연탄아궁이가 나오고, 왜 그런지 이름이 두꺼비집이던 무거운 무쇠 뚜껑을 들치고 냄비를 얹어 밥을 했다. 화력이 센 연탄불에 알루미늄 냄비를 얹어서 짓는 밥은 다른 연료로 짓는 밥과는 전혀 다른 밥맛이 났다. 잠깐 방심하면 냄비 채 까맣게 태우기 십상이었지만 밥맛만은 고슬고슬하게 달았다.

 

동문동의 달아낸 부엌 블록 담의 구멍에는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는 나를 기다리는 편지 봉투가 언제나 꽂혀 있었다. 집에 들어오면 일단 연탄 아궁이의 불구멍을 열고 다음으로 편지 봉투를 열었다. 봉투 속에서 쏟아지는 현란한 말들로 방안이 금방 뜨겁게 달구어졌는지, 열어놓은 불구멍이 그토록 효과가 좋았는지는 지금껏 미확인이다...

 

대구시 대현동 240번지의 자그만 이 층 자취방에는 부엌이 없었다. 현관문 앞에 연탄 아궁이가 있어 난방을 감당했지만, 현관을 끼고돌아 자그만 세면대가 놓인 공간이 곧 부엌이었다. 거기서 내가 즐긴 요리는 세면대에 물을 받아 뽀득뽀득 씻은 오이를 채 썰어 넣고 고추장과 참기름으로 매웁게 비벼 먹는 비빔국수였다. 국수를 먹고 그 자리에서 땀이 솟은 얼굴을 아까 오이를 씻듯이 뽀득뽀득 씻었다. 세면대 위에 나무 도마를 걸치고 비스듬히 서서 오이를 채 썰던 이십 대의 나는 행복했을까. 다른 미래, 다른 시간과 공간이 어느 날 내 앞에 나타나리라는 기대와 갈망이 있어 불행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바로 그 시점을 즐겼던 기억은 없다. 웅크린 젊음이고 주눅 든 청춘이었다.

 

그러나 나는 머지않아, 아마 서른이 넘자마자, 삶이란 미래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인생이란 어느 날부터 본격적인 카운트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바로 인생의 핵심임을 당황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고향의 부엌을 떠난 후 여러 자취 집의 전전을 마치고 처음으로 내 집이 생기는 날이 왔다. 내 결혼을 의아해하고 미심쩍어하는 주변 사람들에게(주변 사람이 딱히 누구인지는 명백치가 않다. 부모인지 친척인지 친구인지, 실체가 모호하나 내 판단과 가치관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주변 사람’이란 이름의 우상이 내게는 언제나 큰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씨족 농경사회에서 수십 명이 함께 먹을 가마솥에 지은 밥을 먹고 자란 사람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려는, 다분히 불순한 의도에서 사게 된 집이었다. 의도가 순수하지 못하니 자연 무리가 따랐다. 번듯하지도 아담하지도 않은 산꼭대기의 집을 마당에 꽃잎이 가득 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선택했는데 돈이 모자랐다. 안방을 전세를 주면 모자라는 돈이 보충된다는 복덕방의 제안을 좇아 우리는 바깥의 작은 방 한 칸에 짐을 부렸다. 9자, 10자 정도의 작은 방에 장롱을 넣고 책장을 들이고 텔레비전을 놓아도 꽃병을 얹어 놓을 작은 테이블이 놓일 곳이 더 남아 있었고, 여분의 공간에 밤이면 이불을 깔고 세 식구가 누워도 자리는 넉넉했다. 신비한 방이었다. 유일한 문제라면 부엌이 없다는 점이었다. 벽과 바깥 담장 사이에 연탄아궁이가 놓인, 사람이 들어가기는 어려운 길쭉한 공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우선 거기를 부엌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름부터 지어두면 결국 이름에 부응하는 내용이 갖춰지게 되는 것은 사람에게나 공간에게나 공히 통용되는 진리인 모양이었다. 워낙 좁아서 똑바로 걸어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부엌의 기능에 별 무리는 없었다. 게걸음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점만 빼면. 옆으로 이동하는 갤러핑 스텝을 경쾌하고 능란하게 구사할 즈음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둘째 아이가 생겼던 것이다. 뱃속의 아이가 커지면서 내 배는 담장과 벽 사이에 꽉 끼여버렸다. 부른 배를 하고 모로 앉아 나는 그 부엌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카레라이스를 만들고, 남편이 좋아하는 시래깃국을 끓였다.

 

빨간 방울토마토와 마당에 자라는 박하 잎을 계란 노른자 위에 얹어 아이에게 대비되는 색감을 가르쳤고, 텔레비전 여성 프로에서 배운 대로 천연 조미료를 만들어 화학 첨가물을 배척하는 법을 실천했다. 그해 내가 입은 옷들은 모조리 달 표면처럼 크고 작은 융기가 생겨났다. 니트 옷의 보풀은 더욱 심해서 뱃속에서 아기가 태동하면 거친 시멘트벽에 쩍쩍 소리를 내며 달라붙었다. 그게 재미있어서 나는 깔깔 웃었고, 두 돌 지난 방안의 아기도 괜히 까르륵 따라 웃곤 했다.

 

다음 해 드디어 안방을 차지했을 때 내 부엌은 형이상학을 끌어내는 구조였다. 공간이 인간을 규정할 수 있을까.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풍수지리가 결국은 그것 아니겠나. 새 부엌에서 내다보면 온 동네의 크고 작은 집들이 창문 아래에 겸허하게 엎드려 있었다. 저녁 쌀을 씻으면서 가련하고 겸허한 목숨들이 어둠 속에 점점 묻혀가는 것을, 눈물을 글썽이듯 창문마다 불이 켜지는 것을 날마다 내다봤다. 그러면서 30대와 40대의 대부분을 탕진했다. 나는 행동하기보다는 관찰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맞서 싸우기보다는 도망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최근 내 부엌은 새로워졌다. 그토록 원하던 개수통이 두 개인 싱크대(나는 20년 동안 설거지통이 한 개인 부엌에서 설겆으면서 남의 집 두 개짜리 싱크를 부러워 했다.)와 버너가 여러 개인 가스대가 놓이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해부도처럼 손을 상하좌우로 힘껏 휘둘러도 아무것도 걸치적거릴 게 없는 부엌이다.

 

최근에 들은 농담 하나. 아들 집에 사는 시어머니는 골방에서 죽음을 맞고, 딸네 집에 사는 친정어머니는 싱크대 앞에서 ‘순직’을 한다나. 부엌 근처에서 순직하는 것이 골방에서 순명하는 것보다 훨씬 보람찬 결말이 될 거라고, 십 년 내에 아들과 딸을 혼인시킬 예정인 늙어가는 우리들은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았다.

 

가만히 따져보니 죽음의 장소로 부엌만큼 멋진 곳도 없을 듯하다. 열세 살에 집을 떠난 후 처음으로 나는 부엌과 죽음을 겹쳐 놓아 본다. 옛집, 엄마의 부엌은 원래부터 죽음과 친밀했었다. 우선 어둡고 깊고 불길이 활활 타는 평화가 있었고, 누대를 내려오면서 거기서 안방으로 자리만 옮겨 돌아가신 웃대 할머니들이 숱했고, 일 년에 열두 번씩 제사 음식과 향불을 덜어 내 간 곳이었으니 죽음은 아궁이 속에, 빈 솥 안에 상주해 있었다.

 

새로 생긴 낯설지만 익숙한 내 부엌을 둘러본다. 손을 휘저어보고 쓰다듬어보고 수납장을 열었다 닫아 본다. 이만하면 쓸 만하다. 더구나 집 뒤란으로 제법 늙은 소나무가 내다보이고, 식탁과 싱크대 사이에 내 한 몸 온전히 드러누울 만한 여유 공간이 있다. 누워서 늙은 소나무를 내다본다. 나무껍질이 절로 떨어지는 것을 구경한다. 이젠 쌍둥이를 배 안에 기른다 해도 옷에 보푸라기가 생길 리는 없는데 내겐 폐경의 징후가 슬슬 나타나기 시작한다. 생각해 보니 까르륵 웃어 본 지도 한참 오래되었다. 

 

                                        나목을 내다보는 시간/김서령

 

내 등뒤에 나목으로 이뤄진 숲이 있다. 저 나무들은 아마도 참나무일 것이다. 누가 심은 게 아니라 원래 이 땅에서 절로 돋아난 나무들. 참나무에 꿀밤이 열리면 꿀밤나무다. 도토리를 꿀밤이라고 부르지 상수리라 부르는 건 들은 적이 없는데 나무일 땐 도토리나무보다 상수리나무라고 부르는 빈도가 더 높은 건 왜일까(난 아직도 세상에 이렇게 모르는 것 투성이다). '참'이라니, 그 외의 다른 나무는 '거짓'나무라도 된다는 뜻일까.

  전에 꿀밤 나무에 관해 들은 이야기가 있다. 산에 꿀밤이 열리면 그걸 다람쥐가 먹고 꿀밤을 먹고 사는 다람쥐를 오소리 같은 좀 큰 짐승이 잡아먹고 오소리를 잡아먹는 너구리같은 더 큰 짐승을 또 호랑이가 잡아먹고, 그런 먹이사슬의 고리가 제대로 꿰어지자면 맨 아래사슬엔 꿀밤나무의 존재가 필수라는 것이었다. 호랑이가 살 수 있는 기본 조건이 바로 꿀밤나무라는 그 말의 사실여부를 나는 아직 확인해본 적 없다.

  그렇지만 그 말을 다 믿지 못하는 건 그 이야기의 논점이, 일본 산에는 꿀밤나무가 없어 호랑이가 자라지 못하고, 호랑이 울음소리가 가끔씩 땅을 흔들어주지 못해 일본 땅은 지기(地氣)가 모자라며, 지기가 모자란 땅에서 사는 일본인은 정신력이 왜소하고 옹졸할 수밖에 없다, 뭐 그쯤의 논리였는데 나중 알고 보니 일본 땅에서 번연히 꿀밤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뇌의 캡쳐 기능은 어리석고 고집스러워 나는 꿀밤나무를 보면 자동적으로 그 먹이사슬 이야기를 연상한다. 산에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 올리면서 다람쥐, 오소리, 너구리, 호랑이의 먹이사슬 구조를 재빨리 팔락팔락 파일 점검한다. 요컨대 도토리를 보면 호랑이를 연상하고 참나무의 톱니처럼 생긴 이파리를 봐도 재빨리 호랑이의 포효라는, 지축을 울리는 엄청난 소리의 스케일을 떠올리고야 만다.

  평생 참나무를 봐왔건만 그냥 참나무와 상수리나무와 떡갈나무가 같은 나무인지 이름만 다른지를 나는 구별하지 못한다. 신갈나무와 졸참나무를 구별할 줄 모르니 그 둘의 잡종이라는 물참나무 역시 알 리 없다. 아무튼 지금 내 등 뒤로는 아마도 그런 각종의 참나무들일 꿀밤나무가 가득 들어서 있다. 여름엔 짙푸르다가 가을엔 갈빛으로 물이 들었다가 지금은 갈잎도 거의 떨어진 나목이다. 나목! 옷 벗은 나무…. 그걸 내다보는 것이 내 일과 중 중요한 한 부분이다.

  잎이 무성할 때는 책상의 방향을 몰랐다. 잎이 지고 난 후에야 아침볕이 그쪽에서 비춰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러고 보면 여름과 가으내 서향으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등 뒤에 햇볕이 떠올라 내 머리통을 책상 위 컴퓨터 위에 드리우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이 사무실이 놓인 방향을 알게 됐다. 동향으로 창이 났건만 책상은 다들 서향으로 놓였구나. 출입문의 방향 때문에 책상의 방향도 그렇게 됐겠지만 이 방이 유독 산만한 건 책상 놓인 위치 때문이 아닐까… 혼자 실없는 계산을 해본다.

  이 자리에 앉아 9월이 지나고 10월이 지나고 11월이 지나고 12월이 되었다. 12월도 이제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 낯선 곳이 낯익은 곳이 되어가는 과정을 겪으면서 저 숲은, 아니 저기 선 각각의 나무들은 내게 말없는 위안이었다. 잎의 빛깔이나 가지의 모양새나 흔들림의 평화가 아니라 그저 서 있는 자세로, 익숙한 존재 자체로 등 뒤에서 나를 감싸주고 안식하게 만들었다.

  조직의 비효율에 대한 환멸이랄까 구조 속에 끼인 개인의 비애랄까를 뒤늦게 곱씹게 되던 이 곳에서 저 나무는 매번 내 안에 숨어 있는 에너지를 확인케 해줬다. 딴 방에 들어갔다 지쳐서 내 자리에 돌아와 앉으면 저 나무들이 어김없이 익숙하게 등 뒤를 받쳐줬다. 어떤 안락의자보다 안락하게 저 별것도 아닌 참나무들이 짙푸르게 누르스름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이파리들을 태연하게 흔들면서 사람을 위안하는 비밀을 어떤 지표로 밝혀낼 수가 있을까.

  저 숲은 전혀 고요하지 않다. 잎이 뱅그르르 돌면서 떨어지거나 가지가 괜히 부러져 떨어지거나 바닥에 꿩이 날아와 앉거나 높은 우듬지 쪽으로 청설모나 까치가 날아가는데 그때마다 숲 전체의 공기가 파도치듯 화르륵 뒤집어진다. 방음 잘 되는 유리창이 달렸으니 소리가 귀로 들리는 건 아니다. 시각적으로 들린다. 아니 보지 않아도 뭔가 소란한 낌새가 간헐적으로 지나간다는 걸 안다. 그게 지나갈 때만다 설레는 것도 같고 두려운 것 같은, 황홀인지 공포인지 기쁨인지 아픔인지 구별할 수 없는 마음의 뒤채임을 느낀다. 등 뒤에 참나무 숲이 있다는 말은 등 뒤에 어느 날 호랑이가 떡 버티고 앉아 유리창 안으로 날 들여다볼 가능성이 있다는 말과 같다.

  의자를 빙글 돌려놓고 고마운 나무들은 내다본다. 우리의 눈(생명 혹은 삶)이 마주치는 짧은 이 시간, 말라붙은 이파리를 매달고 흑갈의 몸뚱이로 묵묵히 저 자리에 십 수년(아니 수십 년? 나의 무지는 저 떡갈나무의 나이조차 가늠할 수 없다)을 서 있었을 나무를 내다보는 위안을 말로 설명해낼 수가 없다. 뭔가를 늘 언어로 설명하고 싶어 하는 이 안달과 안타까움은 문장을 배워버린 자의 한계이다. 알량한 문장을 가지지 않았다면 감각의 파장을 굳이 단어로 얽매려용을 쓰지 않아도 좋으련만.

  그런 헛수작을 지어내지 않을 때 저 풍경을 훨씬 깊이 즐길 수 있을 것을 모르지 않는다. 언어적 지성에 갇혀 비언어적 지성의 광활함을 잃어버렸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한계 안에 갇히고 만다. 습관인지 허영인지 그보다 질긴 업인지….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업의 때를 부드럽게 눅여주는 게 바로 저 나목이 주는 위안의 핵심이다.

  아마도 전생에 나는 나무 아래 살며 나무의 사계를 날마다 어루만지는 어떤 생명이었을 것이다. 가는 곳마다 눈앞에 나무가 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나무가 보이지 않는 곳에 터를 마련한 적 없다. 그게 나의 기호나 선택이 아니라 우주 운행의 방식 속에 이미 들어 있었던 원칙이었을 것 같다. 바쁜 일거리를 밀쳐두고 의자를 돌려놓고 실없는 생각으로 한 식경을 보내는 '나'… 를 저 나무들이 몹시도 익숙한 눈길로, 마주 바라본다.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아득하고 아득해서 지난날이 수백 년 같고 또는 덧없고 허랑해서 10년이 한두 주일이 같다. 그 시간의 착각을 견디면서 빽빽하나 서늘하게 늘어선 나무들을 내다본다. 알아봤더니 저 숲은 산림청 소속의 땅이라 한다. 산림청의 한 자락을 날마다 지켜보는 자리가 허락된 건 예사 행운이 아니다. 다른 몇 가지 피곤쯤은 감수할 가치가 충분하다.

  2007년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시간 속에서… 시간의 흘러감을 견디며 속수무책 참나무를 내다보는 시간. 참나무와 꿀밤과 다람쥐와 마침내 호랑이와 그리고 나와 내 앞의 컴퓨터와…. 그 존재와 역학과 인연을 이러저리 음미한다. 생명은 단순한데 그 단순이 중첩되어 그림자가 생기고 그 그림자가 다시 겹겹의 음영을 드리워 세상은 아득하고 덧없다. 한 해가 저무는 어스름에 허공을 향해 컹컹컹 짖는다. 외로움에 관한 한 꽤 감각이 괜찮은 시인 신현림처럼 부질없이 컹컹컹!

 

                                              표정이 마음을 만든다 / 김서령

 

동시대에 수십억이 함께 산다. 우리 각자는 수십억 중 하나다. 그렇지만 남과 차별되는 유일한 자기만의 얼굴을 가진다.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이다. 아무리 똑같이 생긴 일란성쌍둥이라도 곁에서 들여다보면 확실히 다른 점이 발견된다. 뻔한 얘기를 새삼 꺼내는 이유는 표정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고 싶어서다.

어린 아기의 얼굴은 사실 별 차이가 없다. 신생아실에 나란히 눕힌 아기들에게 엄마 이름을 쓴 팔찌를 채우는 건 얼굴만으로는 엄마도 제가 방금 낳은 아기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첫아기를 낳던 때 우리나라 산부인과는 아기를 신생아실로 데려가버리고 산모 곁에 눕혀주지 않았다. 하루에 몇 차례씩 아기를 보러 널따란 유리벽이 있는 신생아실로 내려가야 했다. 그 유리방 안 작은 바구니 속에 누워 있던, 같은 날 태어난 수십 명 아기들의 얼굴, 팔찌가 아니라면 알아보지 못했을 20년 전 그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 애들을 다시 그렇게 나란히 줄 세워본다면?

자라면서 우리 얼굴이 그토록 다양해지는 건 각자 자주 쓰는 얼굴 근육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을 서로 구분하는 건 물론 이목구비의 생김새겠지만 나이 들면서 차츰 얼굴 근육이 만들어내는 표정이 이목구비의 원래 생김을 덮어버린다.

얼마 전 한 신문 칼럼에서 폴 에크먼(Paul Ekman)이라는 학자의 연구를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그는 세계를 돌며 온갖 민족의 갖가지 표정을 사진 찍어 와서 꼼꼼하게 분류해 냈다.. 사진들에서 에크먼 교수가 찾아낸 얼굴 근육은 총 43가지였고 그의 작업은 이걸 작동 단위별로 나누어서 일련번호를 붙이는 일이었다.

에크먼은 “얼굴은 2개의 근육만으로 300가지 표정을 만들어낼 수 있고 3개 근육으로는 4,000가지, 5개 근육을 서로 달리 조합하면 눈으로 구별할 수 있는 1만 개 이상의 표정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관찰해 냈다.. 그토록 다양한 조합 중에서 에크먼은 특별히 유의미한 표정 3,000개를 골라내서 거기 쓰인 근육에 번호를 붙여나갔다.

얼굴 작동부호 시스템으로 에크먼이 얻어낸 것은 한둘이 아니다. 심리 변화가 근육을 움직이지만 반대로 근육의 움직임이 심리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낸 것이다.

에크먼식 슬픔 제조법도 있고 웃음 제조법도 있을 수 있다. 좋은 웃음의 기본은 광대뼈에서 입술 가장자리를 잇는 대협골근과 눈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안륜근 등 두 가지 근육에서 나온다. 이 두 근육을 움직이면 눈꼬리에 주름이 잡히면서 뺨과 입술 양끝이 약간 위로 올라가게 입이 벌어지는데 에크먼은 “이 두 근육을 사용하는 웃음이 뇌에서 즐거움의 감정을 지배하는 부분을 자극한다”는 것까지 밝혀냈다. 따라서 일부러 이 근육을 움직여 웃는 표정을 만들면 근육 움직임이 대뇌를 자극해 웃을 때 분비되는 호르몬까지 의도적으로 생성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슬픔 제조법도 간단하다. 눈썹을 내리고(4번 근육) 윗 눈꺼풀을 올리고(5번) 두 눈꺼풀은 좁히고(7번) 입술을 밀착시키면(24번) 슬픈 표정이 만들어진다. 이 표정이 만들어지면(일정 근육이 작동을 하면) 곧이어 심장박동이 12~14회 올라가고 손바닥이 뜨거워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단다. 희한한 일이다. 내 것인 줄 알았던 내 마음이 실은 내 얼굴의 근육에 따라 변하다니! 이런 연구가 심리학의 한 분야라는 것도 흥미롭다.

이 ‘얼굴 작동 부호화 시스템(facial action coding system)’을 에크먼 시스템이라고 부르는데 만화영화「슈렉」이나「토이 스토리」를 만들면서 주인공의 자연스러운 표정을 만들어내는 데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

에크먼에 따르면 혐오는 작동단위 9로 코 찡그리기를 담당하는 윗입술콧방울 올림근의 몫이다. 공포는 작동단위 1, 2, 4 즉 속눈썹 올리기(이마근 내측부 근육)와 눈썹 올리기(이마근 내측부), 눈썹 내림근이 동시에 움직여 만들어내는 표정이다. 여기에 5번(윗눈꺼풀 올림근)과 20번(입술을 잡아늘이는 입꼬리 당김근)이 추가되면 공포는 더욱 생생해진다. 중앙일보.중앙일보 2006년 5월 10일자「분수대」이정재 기자의 글 참조 -필자 주

에크먼의 연구는 거꾸로 표정 근육의 움직임을 관찰해서 인간의 현재 심리상태를 읽어내는 데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몇 번 근육을 주로 움직이는지를 에크먼은 정확하게 가려낸다. 수사관은 피의자의 얼굴 근육의 변화로, 심장박동으로 측정하는 거짓말 탐지기보다 훨씬 정확하게 진실 여부를 판독할 수 있게 되었다. 한 사람의 진정한 마음은 얼굴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이나 눈 깜빡임 같은 사소한 신체 떨림, 목소리 주파수의 변화 등 비언어적 단서들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엔 총 178개의 근육이 있고 그중1/3쯤인 50개가 얼굴에 집중돼 있다(한편 미국 스탠퍼드 의대 윌리엄 프라이 교수는 ‘사람이 한바탕 크게 웃을 때는 인체의 650개 근육 중 231개가 움직여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라고 했으니 총 근육 수에 대해서는 좀 더 확인해 봐야겠다).). 표정이란 이 50개 얼굴 근육들의 수축과 이완이 만들어내는 결과다. 감정이 변하면 얼굴에 있는 일정 근육이 수축한다. 근육의 수축은 파동 치는 물결처럼 피부 속 진피에 전달되고 진피 속 미세 세포들이 다시 수천 개의 수축으로 대응한다.

우리가 어떻게 울고 웃고 환호하고 화내고 동경하고 혐오했는지를 얼굴 근육들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기록해 둔다.. 그리고 그 반복을 누적했다 슬그머니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표정이다. 인간은 제 감정의 역사를, 정교한 바이오그래프로 만들어 각자 하나씩 쳐들고 다니는 셈이다. 차갑고 엄숙한 디자인이다.

거울 앞에서 일부러 웃는 표정을 지어볼 필요가 있다. 자, 얼굴에서 어떤 근육이 수축하고 어떻게 파동 치는가.. 우리는 평소 얼굴의 50개 근육을 골고루 사용하지 않는다. 쓰는 건 기껏 여나믄 개밖에 없다. 쓰지 않는 근육들이 처지고 약화되는 건 얼굴이라고 다른 근육과 다를 바가 없다. 충남 천안시 병천에서 황토집을 짓고 오이농사를 짓고 사는 김정덕 할머니는 독특한 얼굴근육 운동법을 개발해 아침마다 몇 분씩 반복한다. 입꼬리를 위로 당겨올리고 눈꼬리를 관자놀이로 당기면서 펴는 운동이다. 일흔 중반인데 50대 같은 얼굴을 유지하는 김 할머니도, 마흔 넘으면 제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는 링컨도 에크먼을 직접 알지는 못했겠지만 그들의 관심은 맞추어 같다. 에크먼의 달라이 라마 연구도 비슷한 관점이다. 달라이 라마의 표정이 나이를 구분할 수 없이 생기 있고 유연한 이유를 찾다가 그는 알게 됐다. 달라이 라마만큼 얼굴 근육을 활발하게 움직이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달라이 라마는 전혀 가식적인 표정을 짓지 않았다. 제 감정에 거리낌이나 숨김이 없으니 철저히 자기 감정에 몰입했고 몰입은 얼굴 근육 전부를 사용하게 만들어줬다. 감정에 몰입한다는 것은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인 모양이다. 슬픔도 흘려보내고 기쁨 또한 흘려보낸다. 순간의 감정에 어린애처럼 정직해지면 그걸 흘러보내는 것도 그만큼 쉬워지리라. 순수하게 기뻐하고 순수하게 슬퍼하고 순수하게 열중하면서 사는 사람은 살수록 얼굴 근육이 맑게 단련된다. 늙어서 아래로 쳐지는 게 아니라 힘차고 그윽하게 깊어진다. 성형외과 의사가 얼굴에 칼을 들이대서 찾아내는 미보다 훨씬 확실하고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끌어올릴 수 있다. 나이 들어 제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은 스스로의 책임이다.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가 정확하고 가차없이 표정에 드러난다. 너무 욕심 부리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고 성급하게 화를 내지도 말고, 제 얼굴 근육을 상냥하게 달랠 수밖에. 아니 반대다. 제 얼굴 근육을 상냥하게 달래면서 제 마음속 탐진치를 어루만질 수밖에! 학문이란 결국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기 위해 존재한다. 에크만의 저 집요한 표정 연구도 결국 우리더러 이렇게 말하는 게 목적일 것이다. 탐진치에 빠지지 말라. 눈앞의 기쁨을 마음껏 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