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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빛 외 3편 / 박 금 아

장대명화 2022. 11. 7. 00:47

                                                                    흰 빛 / 박 금 아

 

뙤약볕이 내리는 절두산 성지에 섬초롱꽃이 피었다. 지나던 순례객이 던진 말이 크게 들려왔다.
그래. 지금은 섬초롱꽃이 필 때지.”
그녀도 바다가 고향이었을까? 성전으로 향하는 언덕을 오르면서도 고개를 돌려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흰 초롱 속에 얼굴을 감추고,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깐 모습에서 오래전의 풍경 한 장이 겹쳐졌다. 꽃에 다가가 귀엣말을 하고 싶었다.
나도 섬에서 왔단다.”

섬의 여름은 무척이나 지리한 날들이었다.배들은 본격적인 여름에 이르면 어장을 접어야 했다. 몸이 뜨거워진 바다는 속엣것들을 밀어냈다. 물고기들은 숨 쉴 곳을 찾아 먼바다로 떠났고, 고기잡이배들은 축항에 포로로 묶였다. 뱃사람들은 몸에 리듬을 타고났는지 출렁이는 바다 위에 있을 때라야 중심을 잡았다. 배에서 내리면 곧장 멀미를 앓았다. 섬의 흙은 근육질 사내들의 뿌리를 보듬기에는 너무 얕았다. 파도에 심느라 깊이 내린 뿌리였다. 배를 수리하고 어구를 손질하는 정도로는 남는 힘을 주체할 수 없었을까. 뭍으로 나가서는 며칠씩 기별이 없기 일쑤였다. 그러면 섬은 바다를 떠난 물고기처럼 할딱거렸다.
숨이 가빠지면 아낙들은 갱변을 헤집어 조개를 잡던 호미를 찾아들고 섬 꼭대기로 갔다. ‘산밭이라 부르던, 돌산을 일구어 만든 밭이었다. 호미를 넣으면 흙은 야멸차게 밀어냈다. 아낙들은 포달을 부리는 땅을 어르고 달래며 다독였다. 그러면 품은 것이라고는 없을 듯한 산밭도 간신히 품을 열어 풀뿌리 몇 개와 남새 몇 이파리를 내어 주었다. 흙 반 자갈 반인 돌밭에서 얻은 수확물이라야 작고 못난 것뿐이었지만, 섬은 아낙들이 거두어 온 볼품없는 수확물로 여름을 연명해갔다.
섬의 여름은 참으로 가난했다. 물은 더없이 귀했다. 뒷산 바위틈에서 눈물처럼 똑똑 떨어지는 샘물을 간신히 긁어모아 이고 온 한 동이 물로 온 식구가 하루를 났다. 마른장마가 시작되면 집집 마당에서는 바다에서 건져 올린 미역과 파래, 우뭇가사리들이 햇살 속에서 제 속의 수분을 뺐다. 말라가는 해초 줄기처럼 생명 있는 것들은 살아남기 위해 바싹 몸을 줄여야 했다. 어패류도 마찬가지였다. 빈속을 딱딱한 껍질로 무장한 채 입을 꼭 다물었다. 속을 비우기로 치면 섬 아낙네들을 따를 바 아니었다. 아낙들은 물로 둘러싸인 섬에 살면서도 늘 목이 말랐다.
바다는 하얀 띠를 그리며 섬을 휘감아 돌고 있었다. 흰 끈으로 이마를 동여매고서 열병을 참아내는 섬처럼, 여인들은 질끈 묶은 머릿수건 하나로 섬을 향해 내리쬐는 뙤약볕을 통째 받아냈다.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씻어내리며 이제 막 흰 꽃송이를 달기 시작한 목화의 북을 돋우거나, 쓰러져 내리는 애콩나무 줄기를 보듬어 세우며 힘이 다하여 주저앉고 싶어지는 자신들을 스스로 둥개질했다. 그 몸짓은 하도 가냘파서 멀리서 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한 그루 깻대 같았다.
종일토록 아낙들의 그림자가 머무르지 않는 섬 집 마당가에는 소풀꽃*이 배고프게 자라며 나그네 한 명 찾아오지 않는 빈집을 지켰다. 집 앞바다를 건너는 도선渡船의 기계 소리는 양철지붕을 뜨겁게 달구며 마당 한가운데에 하얀 적막을 떨구어 놓고 갔다.
섬은 처연한 흰빛이었다. 그 색은 더는 내어 줄 것이라고는 없는 가난의 색이었고, 희망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절망의 색이었다. 한 줌의 흙에 가족의 양식을 심어야 하는 목숨의 색이자, 언제 또 태풍이 불어와서 걷어가 버릴지 몰라 지붕에 한 장의 양철을 더 얹는 두려움의 색이었다. 그러나 영원한 가난과 절망, 두려움일 것만 같은 흰빛도 섬의 아낙네들로 하여 속성을 바꿀 수 있었다. 추운 살림에도 이웃에게 덮을 것을 주는 온정의 색이었고, 지독한 고난 속에서도 우뚝우뚝 일어서는 오뚜기의 색이었으며,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하룻밤이면 잊어버리는 용서의 색이었다. 자신을 향해 쏟아져 내리는 뜨거운 생을 한여름의 산밭 고랑에 엎드려 고스란히 받아내는 순종의 색이었다.
섬은 가난을 떨쳐내기라도 하듯 격렬히 몸을 털었다. 그래도 남정네의 굳은 가슴에는 닿지 못하는 빈 아우성이었다. 섬 집 돌담, 담쟁이넝쿨을 헤집고 달리던 도마뱀의 꼬리 짓만큼이나 공허한 몸짓이었다. 도마뱀이 사라져간 곳을 생각하며 돌담에 턱을 괴고 있노라면 산밭 쪽으로 머리가 돌려지곤 했다. 어머니는 해가 이슥해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발꿈치를 들어 산밭을 올려다보면 섬길을 따라 섬초롱꽃이 하얗게 피어났다. 희디흰 그 적적한 팔월의 영혼 속으로 생기를 불어넣으며 실한 꽃대를 세우는 것이었다. 한 번 꽃망울을 연 꽃은 밤에도 꽃잎을 접는 일 없이 등불처럼 피어 있었다.
바다 위로 달이 떠오르면 아낙네들이 산밭에서 돌아오는 소리가 났다. 자박자박…….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온다는 기쁨도 잠시, 치매에 걸린 증조할머니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런 때 할머니는 똥을 싸놓고 손주며느리인 나의 엄마를 당신의 엄마인 양 애절히 찾았다. “용현아야! 용현아야!” 어머니는 마루에 한 번 걸터앉아보지도 못하고 할머니가 싼 똥을 치우고 씻겼다. 그러고 나면 다음날 아침밥을 지을 물이 없었다. 어머니는 이제 물을 길으러 갔다. ‘뒷등 새미로 가는 길은 산밭을 지나고 당산나무를 지나고 묏등을 지나야 했다.
겨우 스물네댓의 어머니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어린 내 손을 꼭 잡고 걸으면 섬초롱꽃이 밤길을 밝혀주었다. 한참을 기다려서 한 양동이 물을 길어 집으로 오면 할머니는 이제는 배가 고프다며 또 용현아를 찾고 있었다. 어머니는 물동이를 내려놓자마자 풀무질하여 밥을 지었다. 어머니는 몇 번이나 방에 들어가서 자라고 했지만, 나는 댓돌에 앉아 어머니를 지켰다. 졸린 눈을 비비다 보면 뽀얀 쌀밥이 담긴 밥상을 들고 문지방을 넘어 할머니 방으로 들어가는 어머니의 흰 치맛자락이 보였다. 또 얼마를 졸았을까. 마당 한가운데 빨랫줄에 할머니의 옷이 하얗게 널리면 이젠 어머니가 잠을 자러 갈 수 있겠다는 안도감으로 방에 들곤 했다.
그런 날 밤이면 자주 바다를 건너는 꿈을 꾸었다. 불쌍한 어머니가 더는 고생하지 않아도 될 뭍으로 가는 하얀 꿈을.
섬초롱꽃이 하얗게 피어나던 밤이었다.

*소풀꽃; 부추꽃의 경상도 방언

 

                                조율사(調律師) / 박 금 아 (2015 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이른 봄을 마실 나온 햇살 한 조각이 하얀 건반을 베고 비스듬히 누워 있다. “띵.띠이잉.”여러 번의 두드림에도 침묵하고 있는 흰색 건반‘솔’,제소리의 높이를 기억할 수 없다.옆지기‘파’와‘라’의 중간쯤이었으리라.엄지와 중지의 지문이 기억하는 어렴풋한 자리를 더듬더듬 찾아간다.

조율사가 왔다.목발을 짚은 그를 따라 그의 아내도 함께 왔다.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한 손에 큰 가방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남편을 부축하는 모습이 힘에 겨워 보였다.

 

조율사는 건반을 눌러 현의 울림을 들었다.청진기를 대듯 심장의 박동으로 혈류를 감지하고 숨소리로 심폐 기능을 진단했다.쿨럭쿨럭.시기를 놓친 폐렴처럼 쇳소리 같은 기침이 새어나왔다.공명판에 탈이 난 모양이었다.집 안은‘수술 중’사인이 켜진 병실 같았다.나는 가족의 수술대를 지키는 마음으로 조율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부부는 조율의 모든 과정을 공유하고 있었다.말이 없어도 제때에 다가가 도움을 주는 곡진한 모습은 강약이 잘 짜인 악보의 한 소절 같았다.독일 병정을 닮은 남편의 포르테와 산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깨금발을 옮기는 아내의 피아니시모가 이룬 완벽한 하모니였다.

 

얼마 전에 만난 친구가 생각났다.원룸으로 초대한 그녀는 별거 중이라고 했다.늦가을 낙엽같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나는 멍해졌다.가출까지 감행한 결혼이었다.서울 부잣집 외동딸과 가난한 농가 장손의 만남은 캠퍼스에 순애보를 남겼다.결혼 후,그녀의 나날은 남편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그랬던 그녀가 변했다.일 년 전,남편이 회사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면서부터였다.비서가 남편을 도우면서 우두커니 서 있는 날이 많아졌다고 했다.한층 패기 넘쳐 보이는 남편을 인정할수록 자신은 초라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그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가,남의 삶을 산 것 같다며 울음을 터뜨렸다.남편도 아내를 이해하기는커녕 결백만을 주장했다고 한다.최선을 다해 달렸을 뿐인 그로서는 황당했을 수도 있었겠다.결국 그는 아내의 완강한 별거 제의에 응하고 말았다.

 

방 한구석에 놓인 피아노가 눈에 띄었다.얼마 전에 친정어머니 초상을 치르고 결혼 전에 자신이 치던 피아노를 가져왔다고 했다.그제야 그녀가 피아노를 전공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건반을 누르더니 그녀는 금세 손사래를 치고 말았다.

 

“너무 방치했었나 봐.소리가 안 나.”

 

동창들이 전업주부인 처지를 한탄했을 때도 굳건했던 그녀였다.친구들이 오래전에 겪었던 상실(喪失)을 그녀가 지금 앓고 있었다.친구를 혼자 두고 오는 발길이 무거웠다.

 

피아노는 벌써 여섯 시간째 조율 중이다. 88개의 건반과200개가 넘는 현을 가진 피아노는 조화로운 음역으로‘악기의 대명사’로 불린다.사람의 몸도 수천 개의 기관들이 만들어내는 어울림으로 생존을 이어간다.성인의 뼈는206개이고 관절은100개 이상,근육 수는 그보다 훨씬 많은650개이다.혈관의 길이는96,000킬로미터로 지구를 두 바퀴 반이나 돌 수 있는 거리라고 한다.인간의 몸은 수십억 인구 중에 똑같은 세포를 가진 사람이 없을 만큼 정교한 악기이다.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횟수의 조율이 필요한 걸까.

 

조율사는 피아노의 외장(外裝)을 살폈다.이십 년을 옮겨 다녔으니 수난의 흔적이 역력했다.힘든 수술을 끝내고 환자를 인도하는 심정이었으리라.

 

“보물입니다.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소리이지요.”

 

그들 부부의 삶이 궁금해졌다.

 

“두 분 사이에 특별한 조율의 방법이 있나요?”

 

“흠집은 조심해서 고쳐야 합니다.무리해서 없애다 보면 고유 음을 잃고 말지요.소리 속에는 상처의 크기와 무게가 다 계산되어 있어요.부부 사이도 그렇지요.”

 

그들도 긴 조율의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축구선수였던 남편은 결혼 초,사고로 다리를 잃었다.마음에도 큰 병이 왔다.몇 년 동안 남편은 방바닥만 지켰다.생계를 대신한 아내의 정성도 외면할 뿐이었다.어느 날 귀갓길에 아내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다.오랜 치료에도 다리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대신,연이어 찾아온 불행은 남편을 돌아오게 했다.피아노 치기를 즐겼던 그에게 아내는 함께 피아노 조율을 배우기를 권했다.

 

그가 상기된 얼굴로 건반을 눌렀다. ‘종달새의 비상’*이었다.붉어진 귓불 곁으로 종다리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올랐다.아내의 단아한 눈빛이 남편의 눈길을 따라 새가 날아간 창문을 넘어갔다.부부의 모습이 황혼녘에 쟁기질을 끝내고 산비탈에 서 있는 겨리소처럼 정다웠다.부부란 삶의 파고(波高)에서 생긴 흠집까지도 보듬어 세상에서 가장 애틋한 소리를 만들어가는 조율사들이 아닐까.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연주에 앞서 늘 악기를 튜닝한다.한 시도 쉬지 않고 스스로를 변주(變奏)시키는 소리의 성질 때문이다.친구네 부부에게도 튜닝이 필요할 게다.처음엔 불협화음의 고통을 감수해야 할 테지만 조율의 시간을 지나고 나면 변형되기 이전의 소리를 찾을 수 있을 게다.어쩌면 그들은 벌써 튜닝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별거는 조율을 위한 잠깐 동안의 해체일 뿐이니까.

 

이 밤에도 친구는 잃어버린 음(音)을 찾아 건반을 더듬거리고 있을 테지.친구를 도와주고 싶었다.전화를 걸었다.

 

“얘,조율사를 보내줄게.”

 

 

                                                                 꽃등() / 박 금 아

내가 사는 아파트 정문 건너에는 작은 사찰이 있다. 일주문과 불탑은 물론, 대문도 담도 없다. 조악하게 올린 기와 아래에 대웅전(大雄殿)이라고 쓴 나무 현판만 없다면 일반 가옥과 다름없는 밋밋한 콘크리트 건물이다.
얼마나 급했으면 부처님을 아파트 앞까지 내려오시게 했을까. 하긴 교회도 성당도 사람 사는 곳 가까이에 있는데 절만 깊은 산 속에 있으란 법 있을까. 애초에 사람 곁에 있던 절을 깊은 산중으로 내쫓은 것이 간사한 인간들 아니던가. 이렇게 마음을 고쳐먹었다가도 이웃을 배려하지 않은 행동거지에는 불쑥불쑥 눈살이 찌푸려지곤 했다.
떨어진 거리라고는 차 두 대가 겨우 지날 정도여서 절집의 일상은 아파트에 고스란히 담겼다. 새벽 네 시면 목탁 소리가 들려오고, 아침 열 시면 스님의 설법 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여름이면 독경 소리가 녹음테이프를 타고 해넘이까지 흘러나왔다. 그만으로는 참을 만했다. 사찰 마당 빨랫줄에서 사흘이 멀다, 하고 옷가지가 펄럭이는 풍경은 꼴불견이었다. 가사와 장삼은 물론, 여염집 남정네도 아닌 스님의 아래 속옷이 대명천지에 너풀대는 모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민망하여 눈길을 돌렸던 적이 여러 번이었다. 절집 바로 앞길은 관악산으로 오르는 입구여서 등산객들조차 아연한 풍경에 쓴웃음을 보내곤 했으니 동네 말썽꾸러기가 따로 없었다. 그런데 그새 정분이라도 든 걸까. 슬슬 절집 안이 궁금해지면서 언제인가부터는 기웃대기까지 했다. 아파트 마당을 거닐다가도 가까이에서 눈을 치켜뜨기만 하면 법당과 서가, 선방(禪房) 내부가 햇살에 비친 스님의 속옷 솔기처럼 훤했다.
며칠 전이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러 나갔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절집은 땅거미가 내리도록 발 디딜 틈 없어 보였다. 잿빛 생활 법복을 곱게 차려입은 중년 여인이 하얀색 등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몇 번을 두리번거리더니 감나무 아래로 가서는 감꽃 가지에 걸었다. 연등에 달린 이름자가 바람에 나부꼈다. 여인은 리본을 쓰다듬으며 한참이나 서 있었다. 낯이 익었다. 기억을 더듬고 보니 그녀였다. 몇 해 전, 사고로 아들을 잃고서 우울증을 앓다가 이사를 한 5층 주민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 마주쳤을 뿐인데 나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합장을 해 보이기에 나도 엉겁결에 머리를 조아렸다. 잠시 후에 고개를 드니 여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웅전 맨 앞자리에서 백팔 배인지 천 배인지 모를 절을 하염없이 올리는 그녀를 겨우 찾았다. 그녀가 걸어 둔 연등을 올려다보며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았다.
사찰과 아파트 사이 좁은 가로수 길을 따라 색색의 등이 내걸렸다. 머리가 하얀 초로의 여인이 파란색 등을 걸고 있었다. 산길 산책길에서 자주 만난 아주머니였다. 나를 보자 환하게 웃으며 며칠 전에 태어난 손주라며 핸드폰을 열어 보였다. 그 뒤에서는 또 한 여인이 빨간 등을 달아놓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연등 아래에 매단 이름자가 선명했다. 마흔이 넘은 딸의 배 속에 있다는 태아의 이름이라며 조심조심 읽었다. “
흰색 등을 든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세상의 모든 그리움이 한 송이 흰 꽃으로 피어난 것 같았다. 흰 등 아래를 지날 때면 나도 숙연해졌다. 그때 한 얼굴이 떠올랐다. 세상을 떠난 지 삼십 해가 훌쩍 넘은 이름이었다. 그 순간에 왜 그가 생각났을까. 그에게도 한 개의 등이 필요했던 걸까.
절집 안으로 들어갔다. 하양, 노랑, 분홍, 빨강, 파랑, 초록. 크기가 제각각인 등이 저만의 빛을 품고서 등불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흰색 등 하나를 골랐다. 연등 파는 여인이 붓 펜을 건네다 말고 가만히 볼웃음을 지었다. 내 손에 낀 묵주반지* 때문이었을까. 다시 붓 펜과 리본을 주며 물었다.
누구 이름으로 시주하시겠습니까?”
기억 속 이름자를 썼다. 그런데 그 이름만으로는 허전했다. 새 리본을 받아 가톨릭 세례명까지 꾹꾹 눌러 썼다. 행렬을 따라가다 맨 끝자리에 연등을 걸고 보니 망자의 얼굴이 꽃으로 피어나는 듯했다.
연등 아래를 걸으며 꽃받침 아래에 쓰인 이름자들을 되뇌어본다. 송이송이 연꽃이 피는 자리마다 어둠이 사라진다. 저만치에 잠시 밀쳐둔 어둠이 아니다. 어둠살을 그러모아 만든 빛이다. 태어나지 않은 배 속 아기도, 세상을 떠나 저승을 사는 사람도 이승의 어두움을 밝힐 수 있다니……. 그보다 더 큰 위안이 있을까. 자신이 행한 행위와는 상관없이 이승에서 한 번 생명이었던 적 있는 것은 다 꽃이 되고 빛이 될 수 있단다. 만물이 꽃등()이다.
오늘도 절집 빨랫줄에는 빨래가 나부낀다. ! 웃음이 난다. 그러고 보니 스님의 속옷이 펄럭이는 길가, 이곳이 부처가 제자들에게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했다는 영산(靈山) 아닌가. 어찌 이 자리뿐일까. 내가 서 있는 곳곳이 예수와 공자, 여러 성인과 현자들의 말씀을 듣는 성전(聖殿)이요, 강당이다. 한 발짝 높은 산을 오르는 수고도 없이 진리를 들었음인가.
예서 제서 꽃등() 벙그는 소리 들린다.

 

                                        댕댕이 신 한 켤레 / 박 금 아

 

난분분한 나뭇잎들이 만추의 스산함을 더하고 있었다. 늦은 밤, 서울대입구역에서 집으로 오는 길섶에서였다. 가막덤불 속에서 푸른 열매 몇 개가 언뜻언뜻했다. 가랑잎을 치우자, 진한 물빛이 도는 파랑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아닌가. 그것들도 놀란 듯했다. 길두 아재가 ‘댕대이’라고 부르던 나무의 열매였다. 그렇게 얼마를 서 있었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 앞 산길이었다. 빨간 팥배나무 열매가 가로등 아래에서 먈갰다. 길냥이들이 불빛이 닿지 않아 희읍스름한 화살나무 아래를 종종거리며 희롱하고, 길 아래 관악빌라 할머니의 남새밭에서는 맷돌 호박 한 덩이가 새들해진 이파리 몇 잎을 달고서 늦가을 밤을 지켰다. 살쾡이 한 마리가 긴 나무 의자에 앉아 있다가 나를 보자 뒤편 산딸나무 아래로 사라졌다. 살쾡이가 내준 자리에 앉으니 밤하늘 속으로 아까 보았던 푸른 열매가 떠올랐다.

  길두 아재 등에 업혀 진외가로 가던 밤길이 생각났다. 바지게 안에서 무서리를 맞으며 바라보던 외할머니의 무명 치맛자락과 산짐승 울던 말티고개와 먼 데 있던 검은 산들이 들어와 박혔다. 곡두를 보는 듯했다. 그날 밤, 졸작 「길두 아재」를 썼다. 그 밤 내내 내 방 창틀엔 유년처럼 무서리가 내렸고, 내리자마자 녹아버린 무서리의 시간을 위무하는 듯 간간이 소슬바람이 머물다 갔다.

  세 살 때 부모를 떠나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외가에서 살았다. 산골 외딴집엔 외할머니와 외할머니의 먼 친척뻘로 머슴살이를 와 있던 길두 아재뿐이었다. 외할머니는 사시사철 종일토록 과수밭에서 살다시피 해서 나는 아재만 졸졸 따라다녔다. 아재는 부르기만 하면 어디서든 달려와 내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 주었다.

  여섯 살, 서릿가을 무렵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내 신 한 짝이 아재가 잠자던 쇠죽방 아궁이에 들어가 있었다. 섬에 살고 있던 엄마가 며칠 전에 오일장에 다녀온 사람 편으로 보내 준 새 운동화였다. 아재가 아침 쇠죽을 끓이다가 발견하고 꺼냈지만, 반이나 타버린 후였다. 그날 내내 아재를 따라다니며 “내 신발 물어내라.”며 졸랐다. 외할머니가 새로 사 주겠다고 해도 그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밥상머리에 앉자마자 울기 시작해서 점심때까지 밥도 먹지 않고 떼를 썼다. “바보 아재! 개새끼 아재!"라고도 했던 모양이다. 달래다 못한 외할머니가 회초리를 찾자, 아재가 달려와 나를 덥석 안아 들고서 과수밭으로 달아났다.

  과수원 뒷산은 댕댕이 천지였다.

  농사가 끝난 늦가을이면 아재가 베어다가 겨우내 과실 소쿠리와 삼태기를 만들곤 하던 넝쿨이었다. 아재가 풀숲에 나를 내려놓고서 댕댕이 넌출을 손으로 잡아당겼다. 암만 꺾으려고 해도 덩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낫을 들고 와서야 질긴 줄기를 잘라낼 수 있었다. 아재는 그것으로 알기살기 신 한 짝을 엮어 내 발에 신겨 주었다. 신발 콧등에 달린 파란 댕댕이 열매를 보고서야 울음을 그쳤던가. 아재는 다른 한 짝도 만들어 줬다. 외가로 돌아오던 길에 아재가 태워 주는 목말을 타고 댕댕이 신을 신은 두 발을 까불거리며 바라보던 하늘은 얼마나 높았던가.

  유년의 시간 속에 길두 아재가 없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어른으로 자랄 수 있었을까. 아재는 내게 놀이를 함께 해 준 하나밖에 없는 친구였고, 내 긴 머리를 땋아 주다가 도시로 떠난 막내이모였고, 토끼몰이와 새 잡기를 보여 주다가 서울로 공부하러 간 외삼촌이었다.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은 남이면서도 때론 아버지였고 엄마였으니 아재는 내 유년의 시간 속에서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그 모든 이’였다.

  별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고, 별이 반찬이 되어 밥상으로 올라오는 것을 꿈꾸게 해 주었다. 감나무를 어떻게 오르고 내리는지, 들녘에서 피어나는 생명들을 어떻게 부르는지도 알게 해 주었다. 아이도 어른과 친구가 될 수 있고, 어른이 되면 마음으로도 걷는다는 걸, 그러니 어른으로 살아가려면 발뿐 아니라 마음에도 여간해서는 헤지지 않을 단단한 신 한 켤레쯤 필요하다는 것을 일러 주었다. 평생을 신어도 닳아 떨어지지 않을 댕댕이 신을 어떻게 엮는지, 그 기술을 가르쳐 준 사람도 길두 아재였다.

  평소 같으면 대번에 꺾어 와 꽃병에 담아 두고 혼자 보았을 넝쿨을 그날은 그 숲에 소롯이 남겨 놓고 왔다. 누군가 발견한다면 그도 나처럼 아름다운 추억 하나 떠올릴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어쩌면 그때 내게 튼튼한 신 한 켤레가 절실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길을 걷는 동안 홀연 신발이 망가져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우뚝 멈춰버린 적이 많았다. 그런 날 그 숲에 달려가 길두 아재가 가르쳐 준 대로 댕댕이 신 한 켤레 삼아 신고 싶었을까. 어린 소녀를 달래던 눈빛이 조롱조롱한 그 푸른 열매로 아직도 울고 있는 내 안의 나를 달래고 싶었던 걸까.

  가끔 궁금해진다. 중년을 훌쩍 넘어선 지금, 길두 아재가 나를 만난다면 뭐라고 할지를. 아재는 아마도 “자야, 니가 우찌 이리 마이 컸노!” 하고는 너털웃음을 칠 것이다. 유년의 어른들 모두 “자야, 니가 우찌 이리 마이 늙었삤노!”라고 할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