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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어법 6제(외1편) / 서 숙

장대명화 2022. 8. 13. 11:43

                                                                   모순어법 6제 / 서 숙

oxumoron: 모순어법(그리스어원 oxy=예리한, moron=바보, 즉 똑똑한 바보)

세상은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혼연일체에서 합종연횡으로 가는 길목, 일사분란과 논리정연에 다다르는 와중에 패러독스와 모순과 부조리의 우여곡절을 거친다. 혼돈에서 질서로, 질서에서 혼돈으로의 여행길에 잠시 들르는 놀이동산에서 롤러코스터를 탄다. 거꾸로 돌다보면 어느새 제자리, 잠시 어지럽다. 모순어법도 그 어디쯤에 자리 잡는데 일종의 반어법을 통해 강조의 방점을 찍는다. 모호한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언어의 애매성은 고통이지만 어휘를 뒤집어보고 뜯어보고 조립하는 언어유희의 재미가 따로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말장난을 붙잡는 사색의 간이역에서 아주 잠깐 각성이라는 이방인과도 조우할 수 있다.

심오한 무위도식

도시인의 밥벌이를 해결해주는 대부분의 직종은 사계절의 변화에 무심하다. 근면 속의 몰개성 가운데 컨베이어벨트 위의 통조림처럼 규격화와 무한반복의 규칙성, 나아가 비인격을 요구한다. 이런 생활에 지친 이들이 탈도시화를 지향한다. 자연 속에서의 건강한 노도오가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여지를 꿈꾸기 때문이다.
보던 책에서 눈을 떼고 허공을 헤매던 시선은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는다. 초점 잃은 눈이 멍청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생각을,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 로마의 공화주의자 마르쿠스 카토는 ​"인간은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 가장 활동적이며 철저하게 혼자 있을 때야말로 가장 고독하지 않다."라고 했다. 사유의 뜰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의미다.
평소에 왜소하기 짝이 없는 각 개인은 사색 속에서는 우주로 무한 팽창하여 스스로를 확대시킨다. 눈을 부릅뜨고 살아가는 대신에 눈을 감으면 잘 보이는 자기만의 세계를 찾아 길을 떠난다. 인간 존재의 탁월성은 그런 것이다.

공들인 지리멸렬

인사동의 갤러리 동네에는 오늘도 물감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그림들이 많이 걸려있다. 예술적 기량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이지만 수준미달의 미술품들에 화랑계가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야 없다. 작가로서야 무진장 애를 쓴다지만, 아직은 습작에 불과하다는 의구심에 덧붙여 매정한 평가가 절로 나온다.
양산되는 책 때문에 소모되는 펄프가 아깝다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자성自省과 자조自嘲​의 목소리도 크다. "냄비 받침"이라는 제목의 수필집이 있다. 자신의 저서가 그래도 냄비를 받치는 용도만큼의 효용은 있을 것이라는 의미다. 또한 어떤 수필집에서는 자평으로 '심혈을 기울인 쓰레기'라는 표현을 쓴 것을 본 적이 있다. 삶의 궤적을 해석하는 지성과 주변을 감싸고 미래를 펼치는 감성으로 공감의 파장을 일으키는 것이 수필의 본령일진대 자신들의 글이 안이함에 머물러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의 목소리였다. 스스로에게 내리치는 죽비소리로 들려 신선했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구태의연하고 시시콜콜하여 식상한 수필이 다반사이긴 하다. 심미적 성취라든가 허심탄회한 인생관조 등의 책으로서의 읽을 가치가 없다면 그저 종이의 낭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거기에 덧붙여 작가연然하는 지적 문화적 허영심마저 언뜻 감지되면 그야말로 구제불능​, 처치곤란의 지경이 된다.
우리는 과연 예술이라는 이름을 코에 걸친 거대한 '낭비족族'들이 아닐까 반성하게 된다. 오늘도 사슴의 관을 얻어 쓴 염소는 자족감과 자괴감 사이, 우월의식과 열등의식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간다.

심각한 농담

요즘 TV 드라마에는 흔히 비극과 희극이 뒤섞여 있다. 한참 울고불고 하다가 갑자기 난센스 코미디의 설정이 펼쳐진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도 진중했다가 경솔했다가 일관성이 없다. 소위 막장이니 저질이니 하며 '욕하면서 보는'드라마나 퓨전 사극, 로맨틱 판타지 드라마 등속의 구성이 주는 그런 식이다. 그런데 이들 드라마들이 꽤 재미가 있다.
'말도 안 된다'고 치부하면서 왜 드라마의 추이가 궁금한가?​ 아마도 우리네 갈팡질팡 살아가는 모습과 매울 닮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 바로 현실이고 '말이 되는' 상황은 비현실이다. 전통극이 보여주는 사필귀정, 권선징악, 결자해지, 회자정리, 대단원 등보다는 우연의 남발, 정의롭지 못함, 억울함의 호소, 미미한 사라짐이 이 세상을 더 많이 메우고 있다.
모파상은 <여자의 일생>에서 주인공 잔느의 입을 빌려 "인생이란 그렇게 행복한 것도, 그렇게 불행한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박인환은 <목마와 숙녀>에서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이라고 했다. 김수영은 "인환아, 너는 언제까지 그런 감상적인 시나 짓고 말거냐?"라고 그의 경박함을 질타하였다. 우리는 김수영의 치열함을 높이 우러르지만 박인환의 달콤한 허무주의가 마음이 편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통속'적인 센티멘털리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찰리 채플린이 말했다지만 사실 인생은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그저 희극이면서 동시에 비극이다. 무미한 일상 속에서, 그 사실을 일깨우는 TV의 희비극들이 선사하는 눈물 한 방울과 박장대소 한바탕에 사람들이 목말라 있음에랴.

낯선 익숙함

자투리 시간에 집착하는 것은 인간의 숙명인가. 어쩌다 가져보는 여분의 시간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다보면 현실에서 도피하여 정작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에는 소홀하게 된다. 지금 여기, 생의 대부분을 보내는​ 우리의 일상이 보다 본질적으로 우리를 이루고 있는 요소다. 그 익숙함 속에서의 낯선 얼굴을 찾으려는 부단한 노정에 우리의 진실이 있다.
생활의 동력을 찾아 늘 뭔가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여행, 산, 바다…. 그런데 그 새로움이라는 것이 낯설지가 않다. 각자에게는 색다른 경험이겠으나 모아놓고 보면 대동소이하다. 오히려 전혀 새롭지 않은 것에서 낯선 것을 찾으려는 노력이 귀하다.
나의 언어를 마련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진실을 전한다고 하지만 언어는 또한 지창에도 능하다. 번지르르한 언어의 성찬에 숨어있는 속임수를 찾아야 한다. 문체는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려는 노력 가운데 정작 나다움(I-ness)를 내 안에 정립해야 한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 그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남의 생각, 남의 말을 흉내나 내다가 말 것이다. 성철스님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대오각성의 경지에 가보려는 노력은 가상하나 아울러 소박하더라도 나의 삶 가운데 나의 언어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자투리의 시간에서 말고.

미개한 첨단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달하여 모든 불가지론과 비합리가 사라지면 종교가 사라질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요즘은 영화배우 톰 크루즈의 종교로 유명한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가 화제다. 이는 과학에 구원의 메시지가 어우러진 새로은 컬트문화라고 한다. 모든 것을 다 해명해낼 수 있다고 오만했던 과학이 그 한계를 인정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초월적​ 미지의 신비주의를 끌어들이는 현상이 흥미롭다.
인지와 과학의 진전에 힘입어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건만 미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서울의 테헤란로는 첨단의 정보산업이 몰려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가장 성업 중인 곳은 역술인의 집들이라고 한다. 신기술을 앞세운 소위 벤처기업가들이 심심치 않게 점집을 찾는다는 사실에서 보다시피 과학과 미신 사이는 생각보다 가깝다. 둘 다 상상력에 비해 지성이 약하다는 차이점이 있다고나 할까. 아무라 과학문명이 발달해도 생명을 둘러 싼 미스터리와 우주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아직 요원하다. 지금까지의 추이로 보건대 과학만능은 또 다른 미신일 뿐이다.
한때 좋은 사주에 맞추어 출산날짜를 조절하는 것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의학의 발달과 사주라는 운명론이 결합한 것이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흘렀는데 그렇게 맞춤사주로 태어난 아이들이 사주 덕을 크게 본 것 같지는 않다. 단지 확실한 것은 과학과 미신의 결탁 속에 물불 안 가리는 인간의 무모한 욕망의 실체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비옥한 사막

인간은 오랜 세월 자아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서 마침내 개인이 우주의 중심인 세상을 만들었다. 그 대가로 잃은 것은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고 타인에게 온전히 이해받는 것이다. 도시는 이동성과 익명성을 보장한다. 쉽게 주거를 옮기고 어디에고 숨어들기가 용이하다. ​온전한 개인으로 자립하여 군집에서 탈피한 자유로움이 있는 반면에 광장 속의 고독을 감수해야 한다. 도시의 노마다는 이동의 자유분방함과 정착의 평화로움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고 싶다. 그러나 결국 두 마리를 다 놓치고 언제나 빈손이기 십상이다. 분주함의 추억만 씁쓸하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 속에서 사람들은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본다. 도시 중산층의 고독, 소외, 방관자적 무심함, 적막과 허무한 분위기 등을 호퍼만큼 섬세하게 표현한 화가는 없는 듯하다. 외면적으로 풍요로움을 구가하는 도시의 외관 두에는 항상 외로운 군상들이 섬처럼 떠돌며 허기와 소외감으로 어디론가 휩쓸려가고 있다. 네온의 현란한 반짝임에 둘러싸인 사람들의 내면은 모래사막의 황량함을 닮았다. 제각각 혼자. 대화도 없고 공감도 없고 일체감도 없다. 이 풍요롭고도 삭막한 도시에서 사람들은 같이 있어도 따로따로, 언제나 홀로 먼 곳을 응시한다.​

자유와 고독.

외롭다고 어렵사리 손에 넣은 이 자유를 포기할 수 있을 것인가. 카잔차키스 묘비명의 구절이 일말의 해답을 준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혼즐과 베프 사이 / 서 숙

혼자 먹으려고 그럴듯한 요리를 하여 예쁜 그릇에 담아 테이블세팅을 한 기억이 내갠 없다. 그런 준비는 언제나 타인과 같이하려 할 때였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다르다. 혼자 밥 먹고(혼밥) 혼자 술 마시고(혼술) 혼자 놀고(혼놀) 혼자 영화보고(혼영) 혼자 여행하고(혼행)…. 혼자 즐기는 ‘혼즐’이 시대의 흐름을 타고 있다. 홀로 자신만을 위한 쿠킹을 하며 즐겁다는 것이다. 찻집이나 식당에는 탁자가 벽이나 창에 붙어 있어서 혼자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부쩍 많아졌다. 소위 혼밥족이 늘어나는 추세를 반영한다.
사람들은 점점 타인과 생활을 나누는 것을 불편해 한다. 자신의 공간에 남의 숨결, 남의 자취를 남기는 것은 싫다.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싶다. 간섭이나 구속은 질색이다. 혼자 잠을 자고 혼자 TV를 본다. 가족을 만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외로움은 필연이지만 견딜만하다. 자기 일상은 자기가 해낼 수 있도록 편리해진 세상 덕분에 홀로 살아가는 일이 그다지 문제가 안 되므로 기꺼이 고독을 찾아, 독립된 삶을 추구한다. 사회는 이렇게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혼자 사는 즐거움」의 저자 사라 밴 브레스낙은 현대인들의 심리를 가장 잘 아는 작가 중의 한 명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다. 그녀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며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한다. 혼자 산다고 해도 세상에서는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고 그 가운데 고유한 자신만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이렇듯 자발적으로 고독을 껴안으려는 혼놀족도 있지만 좁은 공간에 갇혀 근근이 끼니를 때워야 하는 비자발적 혼밥족도 있다. 경제적으로 파탄의 지경에 이른 사람들은 가족이 한 지붕 아래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기가 불가능할뿐더러 생계가 막연한 나머지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도생해야 한다. 고시원 동네의 원룸에는 생존이 급급할 뿐 미래를 저당 잡힌 사람들이 싸구려 밥집에서 혹은 열악한 혼밥으로 민생고를 해결한다. 이래저래 혼밥의 의미는 결국은 혼자 꾸려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재래의 가족관계가 붕괴하는 현상을 대변하므로 ‘혼밥’이라는 말은 처지가 제각각인 현대인들을 두루 포괄하여 널리 공통분모를 이룬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매우 끈끈한 혈연사회 안에 있다고 여겼는데 가족제도는 균열되어 이렇듯 어이없게 단시일에 그 종말로 가고 있는 듯하다. TV의 홈드라마가 보여주는 대가족의 설정은 그러한 가족의 해체에 대한 애석함의 발로로써 흘러가 버린 것에 대해 마지막 조의를 표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결혼제도의 지속성과 그에 따른 군집생활의 필요는 그 시효가 언제까지일까. 프랑스 사람에게 결혼 대신 동거는 이제 일반적이다. 외로움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기 싫지만 언제라도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열린 미래를 지니겠다는 의미다. 재래식 가족제도가 해체되는 혼즐의 연장선상에 결혼을 졸업한다는 졸혼과 미혼모를 놓을 수 있다. 노년에 이혼하지 않지만 결혼생활에서 벗어나 별거하며 각자 자유롭게 살기를 택하는 졸혼은 남녀 공히 해방구가 될 수도 있다. 통계청은 인구센서스 항목에 미혼모와 미혼부를 추가했다. 결혼과 상관없이 아이를 낳아서 혼자 기르는 게 행복하다는 생각이 확산되면 결손가정이라는 편파적 잣대가 없어지고 나아가 저출산 해소에 다소간 도움이 될 수 있다.
1인 가구가 늘면서 그들을 대상으로 솔로 이코노미라고 하는 소비시장이 커지는 중이다. 싱글슈머(single + consumer = singlesumer 1인 가구 소비자)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혼자 살다보니 가구 등 살림살이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 간소화와 소량화, 일회성 물품이 키워드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일이나 장례를 집 밖에서 치르는 일은 큰 흉이 잡히는 일이었다. 아마도 장례식장의 일반화는 가족에서 개인으로의 가족해체라는 급격한 파편화의 조짐이었던 것 같다. 결혼도 환갑도 마을잔치였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제사도 사라지는 추세이고 아직은 명절이면 밀리는 귀경차량을 볼 수 있지만 그런 행차도 슬그머니 줄어드는 추세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하고 혼자가 편하다고, 자유롭고 속박도 없다고 하지만 혼밥이나 혼술의 이유는 함께할 사람이 없어서 이기도 하다. 홀로서기는 가뿐하긴 한데 간헐적으로 찾아드는 외로움이 문제다. 혼자 있고 싶은데 외롭지는 않고 싶다는 이율배반으로 같이 술을 마시고 대화를 나눌 친구가 필요하다. 피상적 인간관계가 허전한 차에 절친한 친구를 줄여서 ‘절친’으로 부르고 베스트 프렌드를 줄여서 ‘베프’라고 부르며 진한 관계를 맺고 싶다. 그러므로 줄임말의 세상에서 혼밥의 대상에 베프가 있다. 그러나 혈연 대신에 들어앉은 베프, 그 연결고리는 허약하다.
싱글 라이프, 의지할 데 없는 망망대해의 돛단배 신세, 각자 외롭게 떠돌아다닌다. 자발적이건 비자발적이건 앞으로는 독거가 보편적인 주거형태가 될 것이다. 혼밥과 혼술 속에 살다고 자력으로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면 요양원에서 얼마간 머물고 장례식장에서 생을 마감하는 현대인의 삶이 스산하게 여겨져도 시류는 어쩔 수가 없다. 까딱하면 독거노인이 되어 고독사를 하거나 집도 돈도 잃고 행려병자의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100세 시대, 고령화 사회의 풍경을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