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말하다 / 곽 흥 렬
말을 말하다 / 곽 흥 렬
할아버지는 생전에 갓을 무척이나 아끼셨다. 당신께서 기거하시던 사랑방 한쪽 구석에는 늘 둥그런 밥상보를 닮은 갓집이 모빌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 안에 반질반질 윤기 흐르는 갓이 신줏단지 모시듯 갈무리되어, 부름을 받게 될 날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노상 어둠 속에 갇혀 지내다 이따금 할아버지의 긴한 출타 때면 잠깐씩 햇빛을 보곤 했다. 그래서 갓은 내게 그냥 단순한 쓰개 이상의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었다.
처음엔 갓이 말총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다. 생김새로 보나 색깔로 보나 둘 사이에는 서로 닮은 구석이라곤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애벌 구운 도자기에 유약을 발라 고열로 소성하듯 미완성의 갓에다 옻칠을 올려 완전히 탈바꿈을 시켜 놓으니 원래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다.
갓의 주재료가 말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연전, 나들잇길에 우연히 전통공예 공방을 운영하는 지인의 작업실을 들를 기회를 가졌었다. 그날 지인으로부터 관모 제작 과정에 관한 설명을 듣고 비로소 그 비밀스러운 세계를 수박 겉핥기로나마 엿볼 수 있었다. 어떻게 말총을 갖고서 갓을 만들 생각을 다 했을까.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생활의 지혜에 저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말은 주역 팔괘의 상으로 보면 건괘에 해당된다고 한다. 건乾은 곧 하늘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머리에 쓰는 장신구인 갓을, 하늘을 상징하는 말의 털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일 수는 있겠지만 어쨌거나 참 아이러니하다 싶다. 할아버지가 평소 갓을 그토록 애지중지한 것도, 아마 머리가 하늘같이 귀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굳은 믿음을 신앙처럼 여기고 계셨던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젊어서부터 장년의 고개를 넘어설 때까지 푸른 세월을 비단 장사에 고스란히 바치셨다.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그 ‘비단이 장사 왕 서방’이 아니라 ‘비단 장사 곽 서방’이었다. 비단 필목을 등에다 짊어지고 이 고을 저 고을을 떠돌아다니면서 쌀이며 보리, 콩 같은 먹을거리로 바꾸어 와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고개를 넘고 개울을 건너고 오솔길을 타박타박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기를 수십 리 길, 그 고달팠을 삶은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만 하여도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당신께서는 아마 그때 말 같은 탈것 생각이 간절하셨으리라. 그 시절만 해도 사람의 등짐에 의존하지 않는 운송 수단이라고는 가마나 말 정도가 고작이었으므로. 구한말과 일제 치하를 숨 가쁘게 살아내면서 간난이 목젖까지 차올라왔으니, 말의 힘을 빌린다는 건 양반 신분이 아니고서는 언감생심이었을 노릇 아닌가.
‘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마패다. 하늘의 해와 달처럼 눈부신 광채를 발하던 물건, 조선 시대에는 거기에 새겨진 말의 마릿수가 곧 신분의 상징이었다. 『어사 박문수전』에서 박문수 대감이 탐관오리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 백성들을 목도하고 마패를 번뜩이며 “암행어사 출두야!”를 외치는 장면은 가슴속이 후련하도록 통쾌했었다. 어린 내게 마패는 불의한 세상을 응징하는 정의의 사도로 뚜렷이 각인되었다.
비록 암행어사는 아니어도, 갓을 쓴 할아버지가 말을 타고 비단을 팔러 다니셨더라면 얼마나 근사했을까, 즐거운 상상을 해 본다. 거기다 말 그림이 그려진 쥘부채까지 곁들였다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구색이 되었으리라.
그 무엇이 세월의 강물을 거스를 수 있을 것인가. 자동차며 오토바이 같은 편리한 문명의 이기들이 생겨나면서 말은 차츰 교통수단으로의 기능을 잃어갔다. 시간이 돈이 되는 세상에서, 단순히 육체의 힘에만 의존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더 이상 경쟁력을 가질 수가 없지 않은가.
대신, 다른 데서 용도를 찾았다. 이를테면 생활의 편의를 위한 이동 수단에서 승마라는 유희의 방편으로 쓰임새가 옮겨간 것이다. 승마는 이제 하나의 취미 생활이 되거나 운동경기 종목으로 우리에게 즐거움을 안겨준다. 경주마에 올라탄 기수들이 아슬아슬하게 장애물을 뛰어넘는 비월飛越경기를 관전할 때의 짜릿함은 상상만으로도 벌써 가슴이 뛴다.
말과 관련된 유희로는 경마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수십 마리의 말들이 일정한 주로를 따라서 갈기를 휘날리며 질주하는 광경은, 지켜보는 이들에게 황홀한 쾌감을 선사한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 사람들은 아낌없이 돈을 거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분에 넘치는 욕망이 인생을 파멸의 길로 이끌 수 있다는 귀한 가르침도 배우게 될 것이다.
학창 시절, <석양의 건맨>이나 <황야의 무법자> 같은 미 서부영화에서 말 탄 장면이 나오면 그렇게 멋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미끈한 백마 위에 올라앉아 카우보이모자를 비껴쓰고 ‘휘이∼ 휘이∼’ 휘파람을 불며 유유히 황야를 누비는 광경은 완전히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먼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의 마음을 한껏 부풀게 만들었다.
말은 민첩하면서도 영리한 동물이다. 유랑극단의 공연에 말이 단골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말의 이 민첩성과 영리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쩌다 유랑극단 배우가 말과 한 몸이 되어 묘기를 펼치는 서커스 장면을 구경할라치면, 넘치는 스릴로 가슴이 요동친다. 사람과 말이 서로 호흡을 맞추며 역동적인 동작을 선보일 때, 그 짜릿한 광경에 구경꾼들은 열렬히 박수갈채를 보낸다. 그건 서커스가 단순히 묘기 차원을 넘어 하나의 예술로까지 승화하는 까닭에서이리라.
수삼 년 전, 제주도 여행 도중 난생처음 말을 타 볼 기회가 있었다. 그때 폭신한 안장에 오르는 순간, 느닷없이 할아버지 얼굴이 떠오른 것은 어인 일일까.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 산길을 넘고 개울을 건너며 진종일을 타박거렸을 할아버지, 그 신산스러웠던 한살이에 연민의 마음이 인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나는 마음속에다 고이 간직하고 있는 듬직한 말 한 마리를 선사해 드린다.
어느새 갓을 비껴쓴 채 말 그림이 그려진 쥘부채를 설렁설렁 흔들며 말잔등에다 비단을 싣고 장삿길을 나서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순간, 어쭙잖게 효손이라도 된 듯 기분이 흔흔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