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오는 손님 / 장 란 순
새벽에 오는 손님
이른 아침, 참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옵니다. 늦잠이라도 자려고 문치적대면 어림도 없다는 듯 몰려와 더 큰소리로 합창을 하지요. 배가 고픈가 봐요. 얼른주마, 속삭이며 모이통에 넣어 놓은 쌀을 내 손으로 한 움큼, 두 움큼, 세 움큼, 화단의 빈자리에 고루 뿌려주지요. 가끔은 잡곡을 주기도 하고, 특식으로 호두 땅콩이나 아몬드를 잘게 부수어 주기도 해요. 어찌 알았는지 비둘기 한 쌍도 살며시 날아와 모이를 쪼아 댈 때엔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아 한 움큼 더 뿌려 주지요. 맛나게 먹고는 구~우 구~우, 한소리 내고는 날아갑니다.
이곳은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살던 아담한 아파트 이층이지요. 살던 집이 그리워 다시 돌아오니 애착이 간답니다. 베란다 창문을 열면 멀리 우암산이 보이고 가까이는 무심천이 흐르는 한적한 곳이어서 새들이 더 찾아오지 않나 싶어요. 아니 새들도 옛 주인이 그리워 찾아오는 건 아닐까? 하고 혼잣말을 해봅니다.
화단에 서있는 백목련, 라일락, 감나무, 모과나무, 호두나무숲이 연륜을 말해주는 듯 울창해졌지요. 참새들이 봄이 되면 날아와서 가을이 깊어 낙엽이 떨어질 때쯤이면 어디론가 날아갑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네요.
어느 사이 나무숲이 둥지인 양 참새들이 모여 와글와글 대요. 내 인기척에 이 나무 저 나무에 앉아 있던 새들이 인사라도 하듯 파드닥 파드닥~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른답니다. 덩달아 손뼉을 치니 화답이라도 하듯 짹 짹 짹~ 노래를 하지요. 감나무에 앉아 있던 새 한 마리가 용기 있게 제일먼저 내려오면 다른 새들도 쪼르르 따라 내려와 모이를 쪼아요. 그 모습이 앙증맞고 귀엽죠. 그런데 새들이 어찌나 예민한지 내가 먹이를 준지도 몇 달이 지났건만 누가 해코지라도 할까봐 흘끔거리며 눈치를 살펴요. 어쩌면 나처럼 새소리에 아침잠에서 깨어나 지켜보는 이웃이 또 있지 않나싶어요.
참새를 보고 있으니 문득 유년시절이 떠오릅니다. 가을 들녘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갈 때쯤 학교에서 돌아와 책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새를 보러가야 했지요. 가기 싫어 딴청이라도 부릴라 치면 할아버지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한손엔 빈 깡통을 들고, 또 한손엔 됫병을 들고 갑니다. 집에서 2~3km 정도 가면 되는 길인데 그때는 왜 그리 멀게 느껴졌을까요. 학교에서 배운 구구단도 외우고 노래도 부르며 갔어요. 논가엔 너럭바위가 있어서 자리를 잡고 앉으면 새들이 흘끔거리며 못 본 체 하네요. 요것들 봐라, 내가 어린아이라고 깔보는 것이냐? 빈 깡통을 사정없이 두드리며 훠~이 훠~이 훠~이 큰 소리로 외쳐야만 달아났답니다. 다 지은농사 나락(벼) 한 톨이라도 새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농부의 마음이 아닐까요. 그 사이 벼에 붙었다 이리 튀고 저리 튀는 메뚜기를 됫병 속에 가득 잡아넣으며 신이 났지요. 메뚜기를 불에 살짝 그슬려서 날개를 떼어내고 들기름에 달달볶아 소금을 뿌리면 고소하고 맛이 좋아요. 어머니가 해주신 최고의 도시락 반찬이었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동내 삼촌이나 오빠들이 모여 새총을 만들어 참새를 잡아다 구워먹었어요. 아이들은 가라하며 여자들이 참새구이를 먹으면 접시를 깬다고 얼씬도 못하게 했어요. 먹거리가 귀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손주들에게 할아버지 할머니의 어린 시절엔 참새나 메뚜기가 식용이었다고 말하니 깜짝 놀라더군요. 참새는 보호해야 하는 조류이고 메뚜기는 해충을 없애주는 이로운 곤충이라나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에 난감하였지요. 곤충을 유난히 좋아하는 3학년 손자는 사슴벌레를 키우며 누가 건드릴세라 애지중지하거든요. 요즘엔 개나 고양이뿐만이 아니라 새 곤충도 아니 자기가 좋아 하는 동물이라면 반려가 될 수 있는 세상 이어서일까요. 격세지감이 느껴질 뿐입니다.
새벽이면 찾아오는 손님 참새들이 한바탕 만찬을 즐기고 또 어디론가 날아갑니다.
저 멀리 우암산 너머로 여명(黎明)이 밝아오 며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는군요. 눈부신 태양을 바라보며 오늘하루도 무사 무탈하기를, 좀체 멈출 줄을 모르는 코로나19 질환에서 벗어나 모두가 편안하기를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참새들이 재잘대는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나는 참으로 즐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