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우수 수필

순수필문학상 수상작 / 1,2,3회

장대명화 2022. 6. 15. 22:52

                                         우화 / 라옥순 - 제1회 순수필문학상 당선작

 

"곱게 화장도 해드렸습니다."

유리문이 열리며 들은 첫마디였다. 체온 없는 공기가 덮쳐온다. 고운 화장이라니, 시선이 허공을 헤맨다. 공감을 얻는 문장이 되기 위해서는 인접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세수라면 몰라도 화장이라는 말은 대상과의 거리가 너무 멀다. 이것은 삭제되어야 할 문장이다. 텅 빈 화면에서 멈춘 커서처럼 방황하는 생각들로 머릿속이 뒤엉킨다. 한생을 글로 엮거나 입담으로 풀어낼 때 말미가 전체를 아우르는 경우가 있다. '했습니다.'가 아니라 '해드렸습니다.'에 붙들린 시간이 뒷걸음질 친다.

제대로 된 화장대는 차치하고 화장수 한 병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부르튼 곳에 바르는 연고뿐이다. 갈라진 발뒤꿈치에 걸려 올이 뜯긴다고 결 고운 이불을 덮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장롱 속 명주이불은 이제 제구실도 못 하고 한순간 연기로 사라질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검불 같은 생이 짊어지고 온 지난한 삶이라는 것에 울화가 생긴다. 그러나 나 또한 그 삶에 얹힌 생이라. 이내 바람 한 점 피할 곳 없는 벌판에 홀로 선 것처럼 허허로워진다.

요동 벌에서 호곡장好哭場을 외치던 순간 그도 자신이 백지에 찍힌 한 개의 점처럼 느껴졌을까. 뜬금없이 무연한 연암에게 묻고 싶어진다. 극으로 치닫는 감정이 슬픔인지 원통인지 칠정조차 구분이 되지 않는다. 애곡哀哭이든 아니든 기댈 나무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서 우는 울음은 내면의 자신을 향한 것일 터였다. 소리로도 발하지 못한 호곡의 묵음을 삼킨다. 후회뿐인 지난날이 목울대를 옥죈다. 추억은 행복의 편린이고 기억은 고통의 조각일지도 모른다. 모난 기억들이 폐부를 찌른다. 눈을 감았다가 떠도 외면하기에는 조도가 너무 높다.

다시 봐도 생경하다. 이제껏 분단장한 얼굴을 본 적이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간극이 먼 비문을 읽는 것처럼 답답하다. 일제 강점기를 살아내고 전쟁을 겪느라 젊을 때의 사진 한 장 없어서 꽃다운 청춘을 연상할만한 흔적도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이미 40대였으므로 젊은 시절을 비켜선 모습이었다고는 하나 당연한 것처럼 무감했었다.

옆도 돌아볼 여력 없이 허리띠 졸라매고 살아온 생이 나이 저물어 느슨해질 때가 있었다. 자신을 위해 고집을 세운 것은 90 평생에 그 한철이었을 것이다. 평소와 다르게 옷 고르는 일에 유달리 까다로워진 것을 가실 때가 되어 마음이 변한 것이라 치부했다. 그때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니라 억눌러왔던 심정이 드러났다고 했어야 맞는 표현이었다. '세상의 모든 늙음은 젊음의 연속선상에 있고, 사람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본능이 있다.'는 문장에 주어가 되어보지 못한 생이 분단장한 얼굴로 누워있다. 꽃이 만개한 옷을 입고 열여덟 소녀처럼 웃어 보이던 가을 한 날이 주저앉는다. 꽃잠 드는 날 입고 있던 옷이 첫눈에 흡족해했던 옷이었음을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지 분별조차 없어진다. 표백된 조명이 부정하고 싶은 현실을 여과 없이 비춘다.

일각이 먼지처럼 부유한다. 한평생 다른 사람을 위해 살다 가는 생에 이승에서의 마지막 집을 지어주는 염장이 이마에 땀이 돋는다. 손끝에 일물일어의 진중함이 실려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누에가 지은 고치 같다. 자신을 들여다보기에 고치만큼 좋은 집이 또 있을까. 새 직장에 적응하느라 부분 탈모가 생긴 조카가 동경하는 코쿤족을 생각한다. 관계의 삶과 과중한 업무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 누에고치처럼 독립된 공간에서 혼자만의 쉼을 갖고자 하는 이들이 바라는 것은 완전한 자유며 더 나은 삶을 향한 몸짓일 것이다.

온전히 혼자가 되는 침묵의 시간,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 이생의 부족함이 채워지는 용화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염하는 이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마지막을 여민다. 모두 내려놓은 흔적이 희고 둥글다. 다음 생은 결 고운 생이라야 한다고 고치 위에 붉은 장미를 마침표로 얹는다.

유리문 밖에 주문처럼 춘설이 내린다. 꽃이 피었다가 지는 한순간을 백 년처럼 살다간 생이 노랑나비로 탈바꿈할 봄의 문턱이다.

                                                 

                                           초록의 도道 / 장미숙 2020제2회 순수필문학상

 

색이 터졌다. 이른 아침, 갈색 화분에서 잎 하나가 고개를 뾰족 내밀었다. 연필심만큼이나 자그마한 싹이다. 날 때부터 초록 옷을 입은 싹은 흙 속에서 단연 돌올하다. 흙의 진통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눈치 채지 못하게 생명을 잉태한 후 조용히 품고 있었나 보다. 큰일을 하고도 짐짓 태연한 걸 보니 흙의 몸에는 신비로운 비밀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갓 태어난 초록은 수직의 상승을 꿈꾸는 듯 너볏하다.

소생의 계절은 흙의 아우성으로부터 시작된다. 초록의 움직임에 땅속은 분주해지고 대지는 서서히 몸을 연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안오한 음지를 박차고 모험 속으로 뛰어든 초록들은 여리지만 당차다. 봄은 기다림과 어울림의 계절이다. 기다림 속에는 봄을 봄답게 하는 초록의 존재가 있다. 초록의 기운을 흠모하여 합일하고 싶은 사람의 욕망이 계절을 부른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건 바람도 햇빛도 아니다. 밭두렁이나 논두렁에 돋아나는 작은 생명이 봄의 전령이다.

신이 초록을 우주의 바탕색으로 빚어놓은 건 탁월한 선택이다. 빨강의 지나친 개성이나 노랑의 애매모호함은 초록이 가진 품의 넓이에 미치지 못한다. 겨울의 이미지를 생동감으로 바꿔 가는 초록은 깃듦의 미학이다. 천천히, 보일 듯 말 듯 세상 속으로 스며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이 흐르듯 서서히 물들어간다. 그러면서도 빈틈없이 채우는 세심함이 있다.

초록은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다. 낮은 것은 낮은 것대로 높은 것은 높은 것대로 자리를 지킨다. 나무에 돋아나는 싹들도 때가 되어야 수피를 찢고 나온다. 빨리 나왔다고 거침없이 자라거나 늦게 나왔다고 소심하게 움츠리지 않는다. 사람의 조급함과 다르게 우주의 질서 속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조화로운 층위를 이루며 번식한다.

초록은 꽃처럼 급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화르르 피었다가 어느 순간 시르죽는 꽃의 나르시시즘이나 가을날 산을 붉게 물들이는 단풍의 호들갑스러운 열정과는 다르다. 요란스럽지 않게, 차분히 제자리를 찾아간다. 후미진 세상 곳곳에 초록이 자리를 잡고 나서야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홀로 아름답거나 호롤 돋보이는 색이 아닌 초록은 함께 있어야 빛을 발한다. 나무가 울창한 숲이 그렇고 보리밭이나 밀밭이 그렇다.

초록에는 표정이 있다. 이제 잣 돋기 시작한 나무이파리에는 호기심이 서려 있고 천변에 피어난 풀은 장난기가 다분하다. 담을 기어오르는 담쟁이덩굴은 삶에 대한 애착을 보이고 마당을 가득 채운 잔디에서는 생기발랄함이 엿보인다. 호수를 감싸고 있는 야생의 풀은 강인함으로 다가오고 숲을 이룬 초록에는 기품이 있다.

어떤 초록은 현실의 사색을 넘어 내면 깊숙이 파고든다. 감정에 강한 붓질을 했던 초록을 강원도 여행 중에 만났다. 초여름 강원도는 초록의 성지였다. 넓은 밭에 펼쳐진 감자, 양상추, 브로콜리는 신성함으로 다가온 초록이었다. 색깔도 다양했다. 연하고 부드러운 게 있는가 하면 강하고 냉철한 색도 있었다. 은근하거나 얇은 게 있고 두껍거나 직설적이기도 했다.

양상추는 흙이 피워 올린 초록 꽃이었다.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연약함, 하지만 비바람을 이겨낸 내공을 겹겹이 두르고 햇볕과 열애 중이었다. 감자의 초록빛은 의연했다. 온몸의 기를 뿌리에 내주고도 색을 붙잡고 있는 뚝기가 프로다웠다. 브로콜리의 진한 초록은 진영陣營을 연상케 했다. 동그마니 부풀어 오른 꽃을 지키고 있는 초록의 병사들, 굵고 튼튼한 잎줄기는 꽃을 보호하느라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진한 초록 갑옷으로 무장한 줄기 안에서 브로콜리의 초록은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초록의 세상에는 질서와 아름다움,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땀이 녹아 있었다. 아름다워서 오히려 깊은 슬픔이 묻어날 것 같은 초록 앞에서 도道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색이 어떤 경지에 다다른 듯한, 도를 깨우친 색이 있다면 바로 햇볕 아래 뜨겁게 달아오른 초록이 아닐까 싶었다. 순간적인 즐거움이나 위안, 혹은 경이로움이나 기쁨을 맛보기 위한 초록이 아니었다. 인간에 대한 자연의 보시布施며 생명으로 이어진 선宣의 색이었다. 농부의 영혼에 색이 있다면 바로 초록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을 때 색은 시공을 뛰어넘었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만난 초록은 시간의 흐름에 상관없이 강한 색채로 남아 현재의 삶을 주도한다.

초가 옆 담벼락 밑을 푸르게 물들이던 토란잎은 시골아이의 눈에 최초로 각인된 색이었다. 그때 순수의 눈에 새겨졌던 토란의 초록은 초등학교 건물 뒤에 있던 느티나무로 이어졌다. 그리고 직장생활의 현장에도 뛰어들었다. 공장에 있던 작은 공원의 숲은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아침마다 마주한 초록은 시르죽은 청춘의 색을 살려주었다. 초록은 그렇게 내 몸에 깃들었다.

마흔이 저물어갈 즈음 출근길에서 만난 가로수의 초록과 쉰을 넘어선 뒤 천변에서 본 초록은 이제 편안함과 위안의 색으로 다가온다. 가파른 인생길처럼 색도 거친 세파를 함께 건너온 셈이다. 집안에 화초를 두고 그들과 눈을 맞추는 건 탁해진 내 안에 숨어있을지 모를 작은 선을 찾고자 함이다.

초록이 터지는 날, 마음이 환해지는 건 티끌만한 선의 씨앗이 살짝 고개를 쳐들기 때문임을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씨, 내포하다 / 문 경 희 - 제3회 순수필문학상

 

씨 마늘이 발을 내렸다. 파종 전에 하룻밤 침지를 했더니 밑둥치에 하얀 실밥 같은 뿌리를 내민 것이다. 왕성한 생명의 피돌기를 눈으로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뿌리가 정靜이라면 발은 동動이다. 끝내 한 자리만 파고드는 것이 뿌리의 속성이라면, 끊임없이 앉은자리를 박차게 만드는 도구가 발인 까닭이다. 부지런히 걷고 뛰어야만 겨울이라는 냉혹한 계절의 마수를 벗어날 수 있다는 다그침 같은 것일까. 사람들은 마늘에 뿌리가 아닌 발을 달아주기로 했는가 보다. 나도 그들을 흉내 내며 마늘이 내민 뿌리를 발이라 읽는 중이다.

 

늦은 오후의 햇살을 등지고 발이 난 마늘을 꾹꾹 눌러 심는다. 얼었다 녹았다, 비록 월동의 가풀막이 험난하다 하여도 발의 투지가 저리 다부지니 옹골찬 봄을 의심할 수는 없겠다. 마늘을 심으면 마늘이 나온다는 당연하고도 싱거운 이치에 들떠 엉성한 초보 솜씨로나마 번잡을 떨어보는 참이다.

 

시골에 터를 잡은 후 씨에 집착하는 버릇이 생겼다. 백지를 앞두면 야릇한 의무감부터 발동을 하는 글쟁이로서의 본능 때문인지 모르겠다. 듬성듬성 비어 있는 화단을 보면 알 수 없는 부채감이 자꾸만 나를 다그쳤다. 꽃씨를 모으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름은 물론,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씨가 맺히는지조차 모르는 것이 태반이었다. 그런 처지에도 길을 걷거나 남의 집 담벼락을 기웃거리며 욕심껏 꽃 진 자리를 훑었다. 뿐인가. 농군들의 SNS에 씨앗 나눔 글이 올라오면 체면불고 염치불고 ‘저요!’를 외치기까지 했다. 그렇게 구걸한 씨 덕분에 올봄 우리 집 화단이 제법 봄다웠다.

 

흙이라는 모태에 수십 가지 꽃의 자식들을 묻었다. 해토머리를 지나자 그들은 연둣빛 기척으로 생존신고부터 했다. 정성의 밑거름을 두둑하게 깔아놓고서도 기다림이라는 인고의 추비를 아끼지 않았다. 화려한 만개에만 환호하던 나로서는 줄기와 잎을 거쳐 꽃에 다다르는 느리지만 꿋꿋한 씨의 보법에 조갈이 나기도 했다. 그런들 우물에서 숭늉 찾는 우愚를 범하랴. 저만치 앞서는 마음을 불러들이며 줄탁동시의 주문을 고명처럼 얹었다. 몇 번의 기대와 몇 번의 허탕 끝에 만났던 첫 꽃의 환희라니. 씨, 그 고요한 반전은 번데기를 탈피한 한 마리 날 것의 비상처럼 경이로웠다.

 

"여기가 머리구요, 여긴 심장. 심장 뛰는 소리 들리시죠? 손가락, 발가락도 모두 정상이고, 건강하네요"

 

까마득한 초음파실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내 안에 착상한 작고 까만 점에서 심장이 쿵쾅거리는가 싶더니, 손발이 나오고 눈코입이 선명해지는, 마술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더러는 웃기고 더러는 울려가며 좌충우돌의 사춘기를 보내고, 이제는 나보다 훌쩍 덩치가 커버린 아이들 역시 0.05mm, 티끌만 한 씨에서 발원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 한다면, 뿔처럼 솟구쳐 원성을 샀던 아들 녀석의 송곳니도, 딸아이의 손톱 속 하얀 초승달도, 두 녀석 공히 말수가 적은 성향까지도 씨 속에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백일홍이 피고, 분꽃과 채송화와 달맞이와 맨드라미와…, 각양각색의 꽃들이 돌림노래처럼 화단으로 번져갔다. 어렵사리 발아한 시계초 씨는 시계를 똑 닮은 연보라색 꽃을 내다 걸었고, 해바라기는 세숫대야만 한 얼굴로 담장 밖을 노랗게 기웃거렸다. 호기심으로 묻어두었던 박 씨에서는 조롱박, 자루박, 청자박이 꽃만큼이나 환하게 허공을 밝혔다.

 

붉고 푸른 색감의 꽃과 형언 못할 향기까지, 씨는 자기만의 순서로 가진 것들을 끄집어냈다. 붕어빵 속에는 붕어가 없다지만, 씨는 이미 자신이 만들어낼 완성체까지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알갱이들의 분투 덕분에 무덤덤하던 일상에 연일 총천연색의 감탄사가 만발했다. 내가 발견한 씨의 내포는 역동성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도 나를 경탄케 한 것은 다시 내 손으로 돌아온 씨였다. 씨의 시간을 동행하며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었어도 결국 처음이 되는 이상한 사칙연산이 그들만의 세계에 있었다. 장난감 요요처럼, 제 세상을 양껏 구가하고 출발점으로 회귀하는 씨. 그것이야말로 물화된 미래지향이요, 종種을 완성하는 한 권의 모노그래프 monograph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그토록 씨에 연연했던 것은 새로운 출발선상에서 희망을 캐는 작업이었노라고 은근슬쩍 미화를 해본다.

 

어느새 등줄기가 서늘하다. 겨우 마지막 마늘을 꽂은 참인데 내 그림자가 저만치 멀어져 있다. 종자로서의 한 톨 마늘 속에는 자신이 뜨겁게 극복해나갈 겨울의 시나리오가 마련되어 있으리라. 하여, 서리가 내리고 한파가 몰아져도 꽁꽁 언 동토를 헤집으며 튼실한 뿌리의 왕국이 건설될 것이다. 초 긍정의 주문으로 툴툴 하루를 털고 일어선다.

 

먼 산자락에서 태양의 뿌리가 들썩인다. 태양이 숭덩 뽑혀나간 세상에는 절망 같은 암흑천지가 할 거를 할 것이다. 비록 쫓기듯 귀가를 서두르지만, 주눅 들지는 않는다. 밤이 파종해 둔 어둠의 씨가 무엇을 품고 있을지, 웬만큼은 어림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