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조 윤 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조 윤 수
연못의 물은 파랗고 물고기가 뛰놀고 있다. 둘레 돌 틈새에는 큼지막한 분홍색 꽃이 한 송이 피어 있고 연못가의 버드나무 가지가 치렁하다. 그 시절 연못 주위엔 버드나무만 많았다는 것을 나중에 사진을 보고 알았다. 연못가 풀밭에 새들인지 병아리인지 알 수 없는 날짐승 두 마리도 아이들 속에서 놀고 있다. 연못은 넓은 집 마당에 인위로 만든 작은 물웅덩이 같은 게 아이의 그림답다고나 할까. 풍경 앞에는 짧은 파마머리를 한 젊은 엄마가 카메라를 조준하고 있다.
연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집을 짓고 살았던 우리는 동네 아이들과 더불어 덕진공원에 자주 드나들었다. 늘 튼튼한 다리를 붙여서 함께 자동으로 찍을 수 있는 사진기를 들고 다녔는데, 그때의 추억들이 사진처럼, 울긋불긋한 색조의 ‘연못’ 속에 담겨 있다. 내 딸이 초등학교 3학년 때 미술학원에서 열린 전시회에 출품했던 작품이다. 연못에서 놀던 기억을 떠올려 그렸지 싶다. 그림 속의 주인공들이 이제는 어엿한 성인들이 되어 한여름 날을 수놓고 있다. 엄마들은 연꽃보다 더 어여쁜 꽃 중의 아이 꽃을 돌보기에 여념 없다. 할머니가 된 내가 옛날 그랬던 것처럼.
무더위가 피어낸 연화장(蓮花藏)에 내려앉아 액자 속의 추억을 떠올린다. 더운 여름에는 집 안을 깨끗이 해야 덜 덥다고 하던 그 사람의 잔소리도, 다시 만나기로 한 이별 같이 한두 철 전의 일처럼 일상의 어느 귀퉁이에서 그림으로 나올 때가 있다.
사랑의 열기를 품고 달려갔던 연지. 얼굴의 홍조가 연꽃들로 더더욱 붉어져 가슴이 두근거렸던 그 새벽. 이른 아침 안갯속에 시퍼렇게 넘실대는 연잎 사이사이로 올라와 있는 연향이 하늘 한가득 그윽했다. 연못가를 거닐고 있는 사람들이 옷깃 사이로 연향을 날리며 한 풍경 속으로 어우러졌었지. 뜨거운 여름에 연꽃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위를 탓할 수 없지 않은가.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으로 기억하리라.
봄 내내 푸름을 키워내며 산과 들은 여름의 절정을 오르느라 한시도 한가할 틈이 없었다. 초록 카펫을 깔아놓은 듯, 한끝을 말아 쥐고 둘둘 굴리면 한없이 감아질 것 같은 들녘. 말았다 폈다 할 수만 있다면, 비어 있어 싸늘할 겨울 들녘을 위해 마련해 두고 싶다.
마침내 배롱나무에 빨간 꽃잎이 달리기 시작하니 초록 들판은 긴 숨을 들여 마시고 생동감 넘치는 춤사위를 준비한다. 백일 동안 배롱꽃이 피고 지는 사이 눈물 같은 벼꽃도 피어서 영근 꿈을 키울 것이다. 후끈하게 땀이 배어 끈끈한 여름날의 사랑도 한여름의 소낙비에 젖으면 다시 생기를 얻고 밤바람 속에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뜨거운 열기를 날렸지,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생명이 숨 쉬는 숲 속의 밀어들, 아침 새벽부터 부지런한 새들의 요란한 지저귐. 여름이 아니면 언제 들을 수 있을 건가. 오랫동안 갇혀 품어 왔던 생의 분출을 위한 애절한 울부짖음. 처절한 절규인 듯 온 생명이 다하도록 외쳐대는 매미들의 독주도 여름의 백미가 아닌가.
흐르는 땀방울을 감당할 기력이 없어 쩔쩔매면서도 이 생명의 절정을 구가하는 여름이 빨리 가기를 원치 않는다. 하루의 피곤을 느슨히 풀어내는 태양의 한숨인 듯, 노을 지는 서녘 하늘이 어찌나 고마운지. 절대 변하지 않는 위대한 유산, 사랑만은 멈출 수 없는 것. 원하기도 전에 이미 가고 말 이 여름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천 년 된 연실에서도 싹을 틔워낸다는 연꽃의 꿈을 연화 세상에 와서 다시 읽는다. 진흙 바닥 같은 삶의 터전에서 연심(蓮心)을 챙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