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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살았을까 / 한 시 영

장대명화 2022. 5. 2. 09:45

                                                        누가 살았을까 / 한 시 영

 

자박자박 흙길을 걷는다. 또각또각 소리를 내는 아스팔트와 달리 발에 닿는 느낌부터가 부드럽다. 편리성에 익숙한 도시의 포장도로가 아닌 시골길이 비구름에 쌓여 운치를 더한다. 경계를 지으면서도 휘어져 도는 유유한 토석담이 고목을 끼고 마을을 잇는다.

 

산청 단성면 남사 예담촌. 가세를 짐작게 하는 고택의 기와 끝에 봄비가 떨어진다. 비에 젖어 더욱 검어진 기와색이 고색창연하다. 세력가의 집 앞에 심어졌다는 부부회화나무가 서로에게 기대어 바람의 성미를 아는 옛사람들의 지혜라는 듯 정갈한 대문 입구를 지키고 있다. 달빛 스며들었을 툇마루 빛바랜 창호가 유구하게 살아온 사람 이야기를 무언으로 전한다.

 

집은 한자로 집우宇 집주宙라 쓰고 두 글자를 합쳐 작은 우주라 한다. 집은 단순한 비바람을 막아내고 의식주를 영위하는 기능적 공간만이 아니다. 태어나서부터 천명을 다할 때까지의 깊은 정신이 숨 쉬는 원형의 공간이다. 대대손손 무수한 사람이 들고 났어도 가문의 질서가 고스란히 뿌리내리는 사랑 터이다.

 

버석하게 말랐어도 정씨고가 사양정사 대청마루를 받치고 있는 기둥이 꼿꼿한 선비의 위용 같다. 몇백 년 세월을 거친 나무에서 재생의 생명을 느낀다. 정신과 마음에 담긴 뜻을 풀어 현판에 새긴 주인의 팽팽한 직심直心이 보인다. 제 색 지워진 문살과 낡은 마루를 만져 본다. 쓸어내고 닦아내며 먹고 자고 부대끼며 살 부비고 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양반이나 평민이나 다를 바가 없으리라. 거칠게 골 파인 주름 같은 마루 틈서리에서 풍상의 세월이 닿는다. 방을 들여다본 것도 아궁이에 불을 지핀 것도 아닌데 노랗게 콩물 먹인, 구들장 달궈진 뜨끈한 아랫목이 눈앞에 그려진다.

 

사실 나는 무서운 기억으로 오래된 집 가까이에 가는 걸 꺼렸다. 어릴 적 친구 집 마당에서 놀다 지붕 위에 똬리를 틀고 앉은 세상에서 제일 클 것 같은 흰 구렁이를 봤다. 아이들 아우성에 친구 할머니가 뛰어나왔다. 할머니는 얼른 쌀 한 대접과 물 한 그릇을 떠다 항아리 뚜껑 위에 올려놓고 무언가 주문을 하며 연신 절을 했다. 할머니의 지극한 지성이 통한 것일까. 머리를 빳빳이 곧추세우고 마당 아래를 한참 내려다보던 구렁이는 순간에 똬리를 풀고 어디론가 스르륵 사라졌다. 이후 그 친구 집에 다시는 가지 않았지만 집을 지켜주는 구렁이의 모습은 잊히지 않는다.

 

이젠 곳곳에 고택 기행을 다녀도 그런 무서움은 전혀 없다. 샤머니즘의 구전이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아니어도 각 집마다 수호신이 가정을 지켜주고 보호한다는 믿음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가통을 이어가는 근본과 가족들의 길흉화복을 비손하는 정성은 위난의 시대일수록 더 간절했을 것이다. 조상을 섬기고 영생을 돕는 존재로 성주처럼 구렁이는 집 안팎을 지켜주는 의지의 가신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 사는 모습도 고택의 이모저모도 바뀌었다. 우물은 상수도로 아궁이는 가스로 식솔 떠난 호젓한 집으로 많은 것들이 사라져간다. 그러나 아직도 바뀌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은 가풍의 명맥을 유지해 가는 고택 그대로를 보존하며 지켜가는 것이다. 그것이 기둥이다. 기둥마다 사람의 곧은 기개와 학풍의 향취가 묻어난다. 급물살 같은 변화의 세파 속에서도 굽이치는 옛길과 욕심 보이지 않는 돌담 골목의 폭과 둥구나무의 품은 그대로 마을을 지키고 있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서 자연에 순응하는 품위가 겸양의 미덕을 가르친다. 깔끔한 단순함이다. 바람이 담을 넘나들고 앞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대문 안으로 들린다. 대청마루에 앉아 일필휘지 난을 치고 곡차 잔 기울이던 올곧은 선비가 보고 싶다. 선비의 한적한 풍류에 화답하듯 쪽문 건너 마른 댓잎 사운댄다.

 

새순 발갛게 물 올리는 목단 꽃봉오리, 달빛처럼 벙글어 온 마을 비춘다는 목련나무. 단아한 정원의 이른 봄이 꽃사태 날 그날을 초연히 기다리고 있다.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한 집의 간격과 각도, 꽉 채우지 않은 빈 마당, 높지도 낮지도 않은 맞배지붕, 사람의 온기 전하듯 화선지에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글귀, 천 년 먹의 흔적이 세도가의 곧은 결기로 집을 지킨다.

 

산간마을 고즈넉한 고도 따라 걷는 마음 적요하다. 유유자적 느리게 걷다 보니 이 집 저 집 살림살이와 주인의 사연이 궁금하다. 담장 안 백토 다져진 너른 마당, 저 집에는 누가 살았을까.

 

                                                    홍시의 두 맛 / 한 시 영

 

 그가 흔들리며 갔다. 휘청거리는 발걸음 따라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가 휘적거린다. 바람에 흔들리고 비틀거리는 걸음 진폭에 따라 굽은 등이 허허해 보인다. 남자의 등은 힘과 기세를 나타낸다는데 그의 등은 지치고 생기가 없다. 그가 아니라 그의 등이 밉고 부끄러워 말없이 뒤를 따라 걷는다.

 겨울 초입이건만 북풍이 유난히 차다. 오랜만에 귀국한 남편이 남동생 안부를 묻더니 저녁을 함께하자고 했다. 마주한 식탁에서 거나해진 술에 두 남자가 굳이 노래방을 가자며 이차 길을 나선 것이다. 나란히 걷는 곧은 등과 굽은 등이 지나가는 차의 불빛에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되풀이했다.

 삶은 누구에게나 만만하지 않다. 신도시 지하철역 부근의 밤 풍경도 밤에 더 고단해 보인다. 지하도를 들고 나는 사람들과 인근 노점 행상들이 북적거리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거리까지 풍겨져 나오는 선술집의 냄새도 후줄근한 실상을 보탠다. 그래도 어묵 국물 달이는 냄새와 삼겹살집이 풍기는 기름 냄새는 하루살이 삶을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 그게 살아가는 냄새지만 다 그런 건 아니다.

 하루를 열심히 살고 안온한 둥지를 찾아드는 사람들의 걸음이 부러워서일까. 눈에 보이고 소리 들리는 것이 많은 밤 풍경이지만 검은 봉지에 자꾸 눈길이 간다. 조금 전, 몸을 움츠리고 목청을 돋우던 과일상 노점을 지난 흔적이다. 초겨울은 홍시 군고구마의 계절이다. 그는 다홍빛 제 빛깔을 내는 홍시 가게를 멈칫거리다 그냥 지났다, 되돌아와 감 좌판 앞에 멈추더니 점점이 얼룩이 박힌 감 몇 알을 샀다. 반들거리는 잘생긴 홍시를 마다하고 얼룩진 감을 산 것이다. 풀어 헤쳐진 옷자락과 어눌한 손놀림만 보면 그냥 어쩌다 마주칠 수 있는 도시의 소시민일 수 있다. 그런데 그가 내 남동생이다. 삐걱대는 걸음에 흔들거리며 매달려 가는 감 봉지. 진한 혈육의 고리가 움푹움푹 가슴을 후벼 판다.

 어린 시절, 11월 쯤이었다. 일남 삼녀를 둔 어머니는 막내 남동생만 불러들여 부뚜막에 앉혔다. 찬장에 숨겨둔 홍시를 아들에게만 물래 먹였다. 엄마가 유난히 좋아하는 말캉한 홍시였다. 늘 아들에게만 한 개라도 더 먹이고 싶었던 모습을 딸들은 모른척했지만 한두 번은 눈에 뜨이기 마련이다. 그땐 딸과의 차별에 속상했는지 여자로서 어머니를 이해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때의 아들은 성장했어도 어머니의 홍시를 여직 잊지 못한 게다.

 동생은 노래방에 들어서자마자 나훈아의 ‘홍시’를 찾아 불렀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다 생각이 난다….”

 지팡이에 기대어 ‘홍시’를 부르는 남자는 그냥 둥지를 잃은 한 마리 새다. 둥지를 찾으려 어머니의 홍시를 떠올린다. 바로 서지 못하고 살아온 불편한 몸이 붉은 조명 아래에 흐늘댄다. 동생에게 홍시는 기억 저편에 있는 엄마에게로 향하는 그리움의 통증일까. 회상의 기쁨일까. 과거와 현재의 어느 중간쯤에 묻혀 있다가 흐린 조명 아래 불시에 쏟아내는 노래 가사는 애지고 아리다. 목이 메게 부르는 남자의 홍시는 노래가 아니다. 불안과 고통의 거친 삶 속에서 날카롭게 빙결되어 가슴을 훑어 내리는 설움이다. 세상 바람 거세게 맞은 날 기댈 등이 그립고 그리워 온전히 살고 싶다고 보내는 타전의 신호음이다.

 늦게 태어난 아들에게 미리 정을 다 주려 한 걸까. 위로 딸 셋 후에 태어난 외아들이 야무진 누나들 틈에서 치일세라 엄마는 무슨 잘못을 하든 끔찍이 감쌌다. 위험하다고 만류하는 권투를 하고 오토바이를 탈 때도 그랬다. 이후 엄마가 돌아가신 허전함을 더 오토바이와 술로 달래려 했는지. 결국 대형 교통사고가 정신도 육신도 삐뚤게 한 시초가 되었다. 단 한 번의 교통사고로 동생은 피폐한 사람이 되었다. 성장하기 위해 받아야 할 사랑과 그 사랑의 힘으로 견뎌내야 하는 성장통마저 송두리째 잃어버렸다.

 교통사고는 한 남자 한 인간의 방황과 좌절의 시작이었다. 1년 8개월의 병원 생활과 세 번의 대수술을 받았지만 인생과 세월을 이겨낼 건강한 다리를 돌려주지 못했다. 딱딱하고 온기 없는 지팡이에 의지하는 인생이 시작되었다. 제대로 설 수도 걸을 수도 없으니 제대로 살 수가 없었다. 허정허정 절룩대며 살아내는 모습이 그저 위태롭기만 했다. 생 없는 생이었다. 장애를 안고 따가운 시선 받으며 온전히 딛지 못한 발길마다 얼마나 단단한 디딤돌을 놓고 싶었을까. 나무는 희망이라고 한다. 초록 잎이 지면 과목은 열매를 맺는다. 감나무 잎을 물들이고 감을 매달았다가 겨울이면 떨군다. 하지만 다음 해가 되면 언제 찬바람에 힘겨웠냐는 듯 다시 잎과 열매를 맺는다.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면 나름대로 익어가건만 그렇지 못한 나무도 사람도 있다. 동생도 누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아니면 내 눈물을 보았는지 초로의 손으로 부스륵부스륵 봉지를 연다. 화장지에 쓱쓱 문지르고는 말없이 건넨다.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이나 추억을 더듬는 사람들이게 서정의 매체인 홍시가 무심히 주고받는 이야기가 된다. 얼룩덜룩 점박이 껍질이 벗겨지자 주홍빛 속살이 찐하게 드러난다. 호르륵 베어 문 입에 홍시 물이 흘러내린다. 달면서 쓰다. 감정 없는 노래방 기계는 제 혼자 멜로디를 울려댄다.

 건강한 사람도 때로는 비틀대며 살아가는 게 인생이다. 모질지 못한 저 어른 아이의 삶은 어디서부터 방향을 비켜 간 것일까. 든든한 남자로 성장을 하기도 전, 모정을 영원히 잃어버린 열아홉 살 겨울 그때부터일까. 험한 세상에서 엄마란 아무런 계산과 대가 없이 주는 사랑과 희망, 존재를 세워주는 지팡이다. 그 상실로 오십 줄 나이까지 엄마와 홍시에 대한 기억에서 성장이 멈추어 있는 것인지.

 동생이 혼수상태로 병실에 누워 있은지 벌써 칠 개월이 지났다. 감이 발갛게 익어가는 철이다. 내 꿈속에서조차 불안으로 선몽했던 부모님. 영혼의 비손이 기다려진다. 피고 지는 계절을 지나 황홀한 빛깔의 열매가 되는 홍시처럼 기적 같은 희망을 간절히 청해 본다. 지팡이에 갇힌 다리일지라도 힘차게 딛고 다시 서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주변에 동생을 지키는 건 누나들뿐이다. 그 묵默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동생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아 같은 무의식 속에서도 홍시의 추억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게다. 그에게 각인된 홍시는 엄마의 단맛일까. 생의 쓴맛일까.